0010114일차 -------------------------
"에이, 쓰벌. 피 묻었네."
나는 로브 앞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냈다. 그 바람에 내 배가 훤히 드러나기야 했지만, 일단 이 끈적하고 불쾌한 피는 닦아내야했다. 고블린의 것임에도 내가 피를 흘린 것 마냥 기분이 나빠졌다.
"죄송해요, 주인님."
륜을 쭈뼛거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음에도 륜은 내가 성을 낸 것이 제 실수로 인한 짜증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피가 묻은 손을 로브에 슥슥 닦은 뒤, 륜의 어깨를 붙잡고 주변을 가리켰다.
"아니다, 륜아.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 나쁜 건 시작부터 이런 장난질을 쳐놓은 그레모리 던전의 하수인들이지. 들어오자마자 앞에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잖냐."
나는 손을 펼쳐 주변을 가리켰다. 우리의 주변에는 고블린과 낙타 괴물들의 시체가 잔뜩 널브러져있었다. 얼추 눈으로 헤아리기만 해도 족히 20은 넘는 수였고, 그 모든 시체들에는 바람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난사.
나는 륜에게 포탈을 넘어가자마자 전방을 향해 화살을 난사할 것을 명령했다. 륜은 내 지시대로 포탈을 넘어가자마자 화살을 쏘았고, 사방을 향해 흩뿌려진 화살비는 고블린과 낙타 괴물들을 꿰뚫었다.
내게 밟혀 죽은 고블린, 그러니까 차원문 바로 아래에서 륜을 기습하려고 했던 놈 빼고.
"좋은 거 알았네. 공격 들어오면 바로 대기하다가 죽이려고 했구나. 음, 똑똑한 년이야."
"제가 눈치를 챘으면...."
"앞에만 보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미안해 할 것 없다. 로브야 가서 빨면 되잖아. 지난번에도 그랬고."
나는 로브를 살짝 손으로 쥐어짰다. 안드라스의 피가 묻어있던게 아직 덜 빠져서 그런지 로브에는 검붉은 핏기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했다. 손세탁을 할 방법도 마땅찮기는 했으니, 그냥 그대로 둬도 큰 문제가 없다 싶었다.
"그보다 륜, 이쪽으로 손을 뻗어봐라."
나는 우리가 건너온 곳, 포탈을 가리키며 손을 뻗었다. 륜도 마찬가지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분명 우리가 넘어온 곳이건만, 우리의 손은 포탈을 넘어 동굴 벽을 짚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알림> 현재 통과할 수 없는 포탈입니다!
# 방향 : 쿰처쿠 척의 던전 -> 그레모리의 던전
# 방향 전환 : 23시간 53분 뒤.
"이상한데."
"뭐가요?"
"우리는 넘어갈 수 없지? 그런데 그레모리는 본인이 직접 넘어왔다가 돌아갔잖아."
"......그렇네요?"
륜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어떻게 돌아갔을까요? 혹시 그레모리만 편애하는 걸까요?"
"글쎄."
시스템이 지원하는 일방향 통로라면 그레모리는 돌아갈 수 없는게 맞았다. 처음으로 내 던전에 공격을 들어온 마족의 침입에 당황해 그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레모리가 쉽게 돌아간 것을 생각하고 이쪽도 뭔가 돌아갈 방법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왔더니 퇴로가 막혔다.
24시간 가량이 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레모리 던전에 갇혔다.
"그럼 저희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상황을 알았다면 여러 가지 전략을 짰을 거다. 하루 버텼다가 양방향 포탈이 되는 중에 총공세를 펼친다거나, 아니면 그레모리가 제 풀에 지쳐서 포탈을 직접 닫는다거나. 하지만 상관없어. 애초에 우리가 들어온 목적은 단 하나다."
나는 륜의 뒤에 섰다. 통로 반대편에서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이 그레모리를 잡는다."
소수 정예에 의한 던전 정복. 그것이 지상과제이며, 일단 지금 당장은 또다시 접근해오는 적들을 사냥하는 일이었다. 나는 륜에게 통로 너머를 살피도록 지시했다.
"륜아. 이쪽도 지금 일방통행이지?"
"네. 저 너머에서 여러 갈래 길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적이 이쪽으로 밀고들어오면 계속 싸워야겠죠?"
안드라스 던전이 그러했듯, 그레모리 던전도 포털이 설치된 곳은 막다른 통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포털 근처의 경계병들을 전부 다 때려잡으니 두 번째 웨이브가 몰려왔다.
절그럭, 절그럭.
박쥐 형상의 가고일들이 우리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대부분 내가 예전에 소환했던 2성 짜리를 닮아있었고, 일부 아주 극소수가 색깔이 달랐다. 꼭 청동같은 외형이었다.
"그래. 싸워서 이겨야지."
다른 던전의 주인을 상대로 쉽게 이길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안드라스 때는 뭔가 불안한 느낌에 속전속결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지금은 전부 다 때려잡는게 중요했다.
'24시간 뒤에 우회로 우리 던전을 공격할 수 있다.'
전부 다 죽여서 불안의 싹을 제거하자. 일단 차원문 근처의 모든 적들을 죽여야만 했다.
"야! 그레모리!"
듣고 있을까? 듣고 있을 것이다. 통로가 얼마나 길 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레모리는 분명히 우리의 침입을 알아채고 전황을 예의주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레모리가 이성을 잃고 직접 나타나도록 도발해야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야말로 던전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기 위해. 어딘가에 숨어있으면 그곳까지 소리가 메아리쳐서 닿을 수 있도록, 나는 배에 힘을 꽉 주고 사자후를 터뜨렸다.
"니 빨통 나보다 작더라!!"
작더라 작더라 작더라---
동굴 통로에 메아리가 울렸다. 가고일 무리의 진격이 잠시 멈췄고, 나는 철검을 움켜쥐고 전방을 향해 달렸다.
번쩍!
가고일들의 눈에 붉은 안광이 튀었다. 나는 선두에 선 가고일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그어내렸다.
"부하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카--앙!!
돌덩어리와 잡철로 된 칼날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일으켰다. 철검은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크게 떨리고 초격부터 날에 이가 나갔지만, 애초에 나는 가고일을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퍼억-!!
나는 다시 검을 세워 가고을의 대가리를 내리찍었다. 검날이 뭉툭하게 무뎌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이가 빠진 철검을 톱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아래로 다시금 내리쳤다.
퍽, 퍼억!
손이 아주 살짝 시큰거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륜이 애널로 조이는 때가 더 아팠고, 가고일들을 때려부수기에는 너무나도 손쉬웠다.
"야! 그레모리!!"
나는 다시금 그레모리를 향해 소리질렀다.
"가슴도 작은 년이 V자로 파인 드레스 입지 마라!!! 추하다!!!!"
...실제로는 아니다. 나와 협상을 한 그레모리는 분명 불륨감이 넘쳤고, 배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였다. 그레모리는 분명 볼륨감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근데 자기보다 못난 놈한테 욕 들어처먹으면 기분 나쁘기 인지상정이지.'
하지만 마족 년놈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이 자존감 넘치는 곳을 모욕당하면 분노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레모리의 젖가슴이 만지기 딱 좋은 크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다고 도발했다.
"브라는 왜 차냐!!"
끄어어어어억!!
가고일 석상 뒤로 흥분한 낙타 괴물들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달려왔다. 역시나 그레모리는 듣고 있었던게 분명했다.
"륜! 어서 그걸 준비해! 내가 시간을 벌겠다!"
"...주인님."
뒤에서 서슬퍼런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주인님 보다 작은데요."
"......너는 이제 클 거니까 괜찮아!!"
아무래도 나의 국지도발은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끼친 것 같았다. 륜은 힘없이 날개옷을 펼쳤고, 나는 가고일들이 륜을 볼 수 없도록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가리를 부수고 다녔다.
"네 찌찌 안드라스보다 맛없겠더라!!"
* * *
쾅!
그레모리는 마법서를 바닥에 내팽겨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리고 드레스를 가슴께에서 좌우로 북 찢었다. 탐스럽게 익은 유방이 크게 출렁거렸다.
"돼지 새끼가 뭐 어쩌고 저째? 이 가슴이 작아? 그것도 자기보다?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그레모리는 자신의 흉부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분신'을 보던 돼지의 시선은 적나라하게 가슴골에만 꽂혀있었다.
볼 건 다 즐겨놓고는 저딴 식으로 말하다니. 분명 그레모리를 도발하려는 처사였다. 고작 이런 도발에 넘어가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당하는 것.
"전군 지시대로 이동! 돼지 새끼를 죽여버려!"
그래서 그냥 그레모리는 하찮은 도발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했다.
상대는 자신의 본진으로 귀환하는 스크롤을 가지고 올 것 처럼 머리가 좋아보이지도 않았고, 그레모리 자신처럼 분신을 활용하는 우아한 방법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공수가 전환되자마자 좋다고 냅다 뛰어들어왔을 터.
'70위권 애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런 멍청이에게 자랑스러운 가슴이 작다고 도발당했다. 이 도발을 가벼이 넘어간다면 던전 부하들에게 면이 서지 않는다. 그레모리는 마왕님의 은총에 따른 시스템의 지원을 통해 전 마물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고일들이 시간을 벌어! 고블린들은 함정을 설치! 조카멜들은 트랩에 걸린 돼지를 밟아죽이는 거야, 알겠지!!"
끄어어엉!!
마물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그레모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씩씩거리던 그레모리는 분을 삭히기 위해 등에 혹이 네 개나 나있는 4족 보행의 낙타 괴물, 조카멜 필터스의 옆으로 몸을 옮겼다.
"후우, 진정해야지. 음,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푸르르.
조카멜 필터스는 실제 말이라도 되는 양 투레질을 하며 혀를 내밀었다. 그레모리는 제 얼굴을 할짝이는 혓바닥의 아래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 그 등 위에 올라탔다.
"전투만 끝나봐. 너한테 하이엘프 맛보게 해줄게. 호호."
조카멜 필터스는 환호하듯 발을 굴렀다. 낙타의 아래에는 검붉고 길쭉한 무언가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조카멜 필터스의 혹 사이에 올라타 천천히 하반신을 앞뒤로 쓸며 전황을 살폈다.
"...조금 하네?"
방금, 마지막 가고일의 머리를 향해 이가 다 빠진 철검이 내리꽂혔다. 시간벌이용 가고일들이 전부 죽어 연결이 끊어졌고, 그레모리는 한결 여유로운 얼굴로 오크가 빨리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야. 후후후, 어디로 올까나?"
첫번째. 내성이 없으면 벽에 얇게 펴발라진 극독에 중독되는 길.
길을 지나다니며 숨만 쉬어도 전신의 근육이 굳고 몸에 마비가 오게 될 것이며, 옆에 있는 하이엘프는 고블린들에 의해 윤간당할 것이다.
두번째. 상위 던전으로부터 힘겹게 분양받은 4성 촉수 마물이 천장에 잠족하고 있는 길.
그레모리 조차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촉수가 뿌려대는 최음 성분에 따라 쾌락에 절어버리게 될 것이며, 옆에 있는 하이엘프는 촉수 가닥에 모든 구멍을 꿰뚫릴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발을 잘못 디디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곳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 함정이 있는 길. 열심히 길을 따라 이동한 끝에는 조카멜들이 싸지른 똥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함정에 빠지면 낙타들이 싸지른 분뇨의 호수에 가라앉아 죽거나 다시 기어올라오는 걸 선택해야했다.
과연 돼지 오크는 어디로 들어올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하이엘프는 촉수의 방으로, 돼지 오크는 똥통에 빠져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레모리는 존카멜 필터스의 등에 올라 고간을 앞뒤로 비비며 그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
5분이 지났다. 상대도 던전의 구조를 파악하나 싶었다.
"너무 늦는데…."
30분이 지났다. 그래도 나름 안드라스 던전을 제압한 만큼, 적어도 세 갈래 길을 앞에두고 고민이라는 걸 하는 놈인가 싶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레모리는 세 방향으로 정찰용 고블린들을 파견했다.
"어디에 숨었나? 오호호! 어리석기는! 마왕님의 시스템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레모리는 부하 고블린들과 공유되는 시야를 통해 돼지 오크의 위치를 살폈다. 고블린들의 시야는 전부 그레모리의 시야가 되었다.
하지만 던전 내부를 샅샅이 뒤져봐도 세 길 어느 곳도 들어온 흔적은 없어보였고, 그에 따라 그레모리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귀환 스크롤을 가지고 있던 걸까?'
멍청한 오크는 그렇다 치더라도, 옆에서 보좌하던 하이엘프가 오크의 꾀주머니 역할을 할 수도 있을 법했다. 잡으면 반드시 성적으로 타락시켜 조카멜들의 아래에 깔려 앙앙거리도록 만드리라.
벼르고 벼르며 탐색한지도 어언 3시간째.
"......왜 없어?!"
고블린들의 시야에는 오크와 엘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