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14일차 -------------------------
리이처드는 레오 후작령 인근에서 활동하는 D급 모험가다. 보수가 있는 일이라면 난이도고 뭐고 닥치는 대로 의뢰를 수행했다.
결혼 자금.
농사만 짓자니 돈이 부족했다. 다행히 리이처드는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칼밥은 좀 먹을 수 있었고,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딱 적당한 난이도의 임무만 골라서 했다.
접수원이 물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해요?"
리이처드는 답했다.
"돈을 모아서 예쁜 반지를 살 거다. 그리고 어디 전선이 아닌 조용한 영지에 집을 살 거다."
과연 D급 의뢰만 받고 신혼집을 마련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접수원은 나름 낭만을 가진 리이처드의 꿈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 의뢰는 어때요?"
"이건 뭔데? 던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
"예. 비르고 남작령에서 의뢰가 들어왔어요. 남작령에서 제법 먼 거리라서 기사를 보내기도 애매한? 뭣보다 엘프의 숲이 인근에 있어서 괜히 병사들을 끌고 갔다가는 문제의 소지도 있고."
"얼마나 주길래? 보자. 음.... 좋아! 이 의뢰, 내가 받지."
리이처드는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였다. 난이도는 딱 적당히 D등급으로 판정되었다. 어차피 던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일.
"다들 귀찮아서 안 했나? 흐흐."
리이처드는 한걸음에 비르고 남작령에 도착했고, 제법 반반하다는 남작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집사의 이야기에 따라 바로 문제의 장소로 향했다.
"별 거 없구만!"
이라는 말도 잠시.
그는 문제의 화전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절벽 앞, 이상한 화전촌에 도착했다.
"...외지인? 모험가? 여긴 무슨 일로."
얼굴은 반반하지만 제법 억척스럽게 생긴 여인이 리이처드를 맞이했다. 여인은 스스로를 릴리라고 소개했다.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리이처드는 마을의 상태를 살폈다. 목책도 제법 그럴듯하고 마을 사람들의 상태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찝찝한 점이라고 한다면 마을의 상태에 비해 마을 사람들의 수가 너무나도 적다는 것.
"이 마을의 이름은 뭡니까?"
"라스촌."
"네?"
"라스촌이야. 언젠가 더 넓어지게 된다면 라스 시티니 뭐니 바뀐다고 하지만, 일단 지금은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 그래서 라스촌."
리이처드는 릴리의 말을 수긍했다.
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은 고작 10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였다. 그리고 리이처드는 릴리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냈다.
"혹시 마을 이름을 다른 분이 정했습니까? 촌장같은 분이 계신가요?"
"응. 있어. ...지금은 닭 잡으러 갔지만."
"그러시구나. 그럼 양계장은 어디에?"
"......."
릴리와 라스촌의 주민들은 노골적으로 리이처드를 꺼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건 단지 화전마을 특유의 외지인에 대한 경계보다 더 심한 눈총이었다.
"...왜 굳이 살펴보려고 하는 거야?"
"아, 별 건 아닙니다.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던전에서 나오는 고블린같은 마물들이 닭 냄새는 기똥차게 맡고 달려들지 않습니까? 하하."
"흠, 그래? ...이 안이야. 우리는 동굴 안에서 닭을 키워."
"예?"
"밖에다 해놓으니까 자꾸 사라지더라고. 조심해. 지금 알을 낳고 있을 중일테니까."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리이처드는 뭔가 상식에서 어긋나는 상황의 연속에 기시감을 느꼈고,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양해를 구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있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하지만 리이처드는 모험가의 상식으로 판단했기에, 동굴 안쪽이 어떤 식으로 되어있을지 전혀 상상상하지 못했다.
"그냥 자연 동굴치고는 뭔가 이상-"
크르륵.
어둠속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나왔다. 그곳에는 검은 깃털을 엮어 입은 마물, 구울이 있었다.
"으, 으아악!!"
그게 리이처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확실해졌네. 던전이 있을 것 같다는 정보는 퍼졌어. 하지만 아직 확정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하나 둘 오는 걸 봐서는."
기절한 남자 모험가, 리이처드의 모험가 등록증과 의뢰 수행증은 많은 정보를 제공해줬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서스는 던전에 들어오는 어리석은 존재들을 잡아다가 포로로 가져왔다.
"더 얻을 정보가 있겠습니까?"
"없어. 이미 이전에 온 여자 모험가들한테서 충분히 정보를 얻었다. 오늘은 교차 검증이야."
"레오 후작령 모험가 길드에서 공지. 비르고 남작령 인근 엘프의 숲 근처에 던전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음. 소수 인원으로 파악 요망. 이거 맞죠, 주인님?"
"그래. 엘프의 숲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지 몰랐군."
들어가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지만 대규모 정찰대를 보내기에는 애매한 지역. 비르고 남작은 무슨 의도인지 의뢰금을 상당히 짜게 책정했고, 그에따라 어중이 떠중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서스. 작업 끝나면 이건 너희들이 알아서 막사로 들고 가라. 식사 끝나면 천장에 있는 슬라임들한테 부탁해서 뒷처리 맡기고. 정면을 부탁한다."
크르륵.
하서스가 포로 감옥의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리이처드는 빈털털이 상태로 구울들의 막사로 초대를 받을 것이다.
"륜, 지금까지 몇 명이나 들어왔지?"
"오늘 들어온 남자까지 전부 15명이요!"
"거 며칠 사이에 생각보다 많이 왔네."
원래 카운트 다운이 경과할수록 적도 많이 늘어나는게 국룰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뜸하기만 하던 적들이 하나 둘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죄다 하서스 선에서 커트 가능해서 다행이군."
"아더도 나서고 싶어 합니다만."
"아서라고 전해라. 진화도 아직 못했는데 무슨."
"아더 말고도 다들 진화 못해서 대기중이잖아요."
"끙.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고."
지난 며칠사이, 우리 던전은 상당한 전력 강화를 이루어냈다. 소환 시설의 바로 옆에 있는 이 시설, '제물의 관' 덕분.
<제물의 관 Lv.0> 마석이나 마물을 이용하여 부하, 마물을 강화하는 시설. 등급을 올릴 수록 경험치 상승량이 상승한다.
고등급의 개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마물들의 레벨이 최대치에 올랐다. 사실상 현상황의 최대 전력이 갖추어진 시점.
"경험치는 계속 올릴 수 있는데 최대 레벨이 문제란 말이지. 쯧."
"그러니까 마물 강화권 그냥 쓰시는 건 어때요, 아빠?"
"안 돼. 그건 모아뒀다가 내가 쓸 거다. 어차피 애들 진화하거나 합성하면 ★ 늘어나서 최대 레벨도 오르잖냐."
최대 레벨이 문제였다. 륜이나 에일라처럼 태생부터 등급이 높은 개체와 달리, 저등급인 녀석들은 15나 35라는 등급별 만렙을 찍고난 뒤로 성장이 정체되어 있었다.
"아오, 진화도 막힐 줄 알았으면 합성 뒤로 미루는 건데."
"그래서 제가 좀 더 알아보고 하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뭐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다음부터는 좀 천천히 진행하마.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 참아줄래?"
"끙."
던전 생활 9일차에 안드라스로의 합성을 시작했고, 어느덧 이제 안드라스가 태어나기까지 48시간 정도가 남았다.
출석을 따지면 어느덧 14일차.
새로운 시설은 늘어났지만 정작 그 시설을 활용할 방법이 없다거나, 그저 기존 시설의 등급을 높였지만 이 이상은 발전이 불가능하다거나 하는 일 말고 우리 던전에 큰 변화는 없었다.
딱 하나 '문'이 생긴 걸 제외하고.
"언제 온다고 했지?"
"곧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다녀오마."
모든 부하들이 공동 곳곳에 숨어 던전에 올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상황. 과연 손님이 될 지, 아니면 적이 될 지는 직접 맞딱뜨려봐야 아는 일.
"후우."
나는 절벽으로 통하는 뒷통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개발해놓은 던전의 뒷길, 현재는 막혀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와 안드라스 서브 던전이 있는 사거리를 넘어, 절벽 구멍으로 통하는 길의 바로 오른쪽.
다그닥, 다그닥.
우리 던전에서는 들릴 리 없는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마전 던전에 들어온 모험가들로부터 노획한 싸구려 철제 검을 꽉 움켜쥐고 통로에 섰다.
"멈춰라. 그 이상은 용납 못한다."
"용납 못하면 어쩔 건데. 싸울 거야?"
통로 반대편에서 요염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색의 말을 탄 여인은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 이야기하는데 내려서 얘기하지?"
"싫은데? 내가 더 높은 등급인데 뭐하러 그러겠어? 오호호."
"등급이 꼭 던전 주인의 강함을 나타내는 척도는 아닐텐데."
"그거야 등급 낮은 것들이 정신적으로 자위하려고 내뱉는 말이지. 1위에 가까울수록 강한 거 모르니? 깔깔."
여인은 말-인줄 알았던 낙타에서 내렸다. 검은 드레스는 직접 벗겨봐야 알겠지만, 실루엣만으로 알 수 있을만큼 여인의 몸은 볼륨감이 있었다.
"안드라스의 던전을 점령한 애가 누군가 싶었더니 이런 멍청이일 줄이야."
"그래서 그 멍청이랑 한 판 붙어볼까?"
"훗, 무식하게 싸우는 애랑은 상종 안 해. 그래서 말인데. 결정은 내렸어?"
여인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하수인이 될 지, 아니면 나와 전면전을 벌여 다 죽어서 노예로 남을지. 이 그레고리 님이 모처럼 직접 와서 제안하는 거야. 선택해. 항복할래, 아니면 죽을래?"
"......."
약육강식.
마왕 솔로몬은 72개의 던전을 운영하며, 던전 주인들에게 일정 일수마다 등급에 맞춰 보상을 보냈다. 자신의 던전이 더 높은 단계에 해당될수록 보상의 정도도 달랐다.
<이름 쟁탈전>.
1위부터 72위까지 등록된 이름은 인류 연합과의 전투에서 얼마나 공헌하였는지에 대한 기준, 위험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다른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솔로몬은 하위 등급의 던전 주인이 상위 던전의 주인에게 도전하여 던전을 빼앗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뒀다. 내가 안드라스를 죽이고 그걸 차원석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내 던전을 공략하러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꼭 하극상만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언더독들이 윗 등급을 물어뜯으려하는 것처럼, 윗 등급의 놈들도 하위 던전을 공략하려고 이빨을 들이미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 그레모리 처럼.
"언제까지 이런 곳에 서있게 할 거니? 예의가 없네."
"앉고싶나? 내 침대 옆이라면 얼마든지. 아니, 눕게 해주마."
"후훗, 너같은 돼지는 내 취향 아니야. 꺼져. 안드라스는 어떻게 한 거야? 난 분명 안드라스 던전을 공략하려고 포탈을 열었어. 너같은 돼지 오크가 아니라, 알몸 새대가리들이 나를 맞이해야 했다 이거야."
"알려준 이유는 없지. 왜? 새대가리들에게 돌려먹히기라도 하려고 했나?"
나는 일부러 그레모리를 도발했다. 계속된 모욕에 그레모리는 눈을 찌푸렸지만,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 반대지. 우리 던전의 수컷들 말자지 맛 좀 보게 해주려고 했어. 안드라스네 부하들, 수만 많지 하나하나는 약하잖아? 오호호."
"그래서 맨날 타고 다니는 그 말이랑 박고 다니나봐? 드레스 아래에서 아주 밤꽃냄새가 풀풀 나는데."
"......."
그레모리는 대답을 피했다. 옆에 따라온 말도 고개를 돌렸다.
"...진짜로?"
"남의 성생활에는 신경 끄시지. 너, 내가 진짜 가만히 안둬. 나보다 약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덤비려는 거야?"
"꼬우면 여기서 싸워보던가. 진짜로 약한지 아닌지는 직접 해봐야 아는 거 모르냐?"
"흥, 어찌저찌 좋은 부하 하나 구해서 안드라스를 잡은 모양인데 나한테는 안 통해."
"그래서 지금 사흘 째 넘어올 때마다 뚜드려맞고 튀고 있냐? 항복? 개떡같은 소리하고 있네. 항복은 니들이 해야지."
나는 철검을 슥 들어올렸다. 그레모리는 순간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성질 뻗쳐서 정말. 어떻게 진짜로 붙어봐? 어? 너 잡히면 아주 조져버릴테니까. 내 침대에다가 갖다박은 다음에 내가 한 번 맛보고, 우리 던전의 종마 애들한테 돌려버리게."
"이, 이 무례한 돼지! 됐어! 협상은 결렬이야! 싸워! 그리고 너는 회쳐서 숯불 위에다가 구워버릴 거야! 고블린들이 좋다고 뜯어먹겠지!!"
그레모리는 빽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렸다. 뒤뚱뒤뚱 걷는게 오리궁둥이같았다.
"그래. 꼭 한 판 붙어보자."
나의 싸구려 도발은 생각 이상으로 더 잘 먹혀들었고, 그레모리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애초에 협상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레모리를 본 이상 협상할 생각이 일거에 날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먹이는 환영이다."
저 검은 드레스 아래 속살은 어떤 맛일까. 나는 철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캬아아악!!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포탈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땅딸보만한 고블린들의 모습에 절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륜 상대로 벽 들박하다가 갑자기 옆에서 뛰쳐나왔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흘 전.
륜과 어두운 통로에서 비밀스럽게 뒷구멍을 박던 도중, 갑자기 열린 포탈에서 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나와 그레모리의 쟁탈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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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으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