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6일차 -------------------------
륜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난 뒤.
나는 나의 진화에 대하여 그 이유를 생각해야했다. 내가 3성에서 4성이 되기까지 했던 일을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먹고 싸고 하는 일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평소와 다르게 했던 것을 찾아보자면 포르네우스의 던전에서 탈출한 이후부터 매일같이 하던 운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물을 소환하며 이런 저런 의식을 치렀다는 것.
가챠.
나는 매일같이 가챠신에게 기도했고, 좋은 마물이 나오기를 희망했다. 설마 그런 이유로 주술사로 전직은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도 뭔가 이능이 생겨서 낫기는 낫네.'
그냥 문신만 생기고 말았으면 진심으로 울 뻔 했다. 다행히 이런 능력이라도 생겼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 문신만 남아서 허세만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떤 존재로 탈바꿈 할 것인가. 내게는 아직 하나의 ☆이 남아있다.
'뭘로 진화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진화 루트가 개방되지 않았을까 확인했고, 무려 세 개의 진화 루트가 나타났다.
" <진화> [파후우 쿰처쿠 척]을 진화시킵니다.
[대족장]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75 / 90 )
2) 서로 각기 다른 존재에게 파종을 하여 번식에 성공한다. ( 5 / 12 )"
3) 부하, 마물 등을 3개체 이상 환생시킨다. ( 1 / 3)
" <진화> [파후우 쿰처쿠 척]을 진화시킵니다.
[던전 로드]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75 / 90 )
2) ★★★★★ 부하, 마물을 5개체 이상 확보한다. ( 1 / 5 )
3) 던전의 등급을 A까지 올린다. ( E / A )"
" <진화> [파후우 쿰처쿠 척]을 진화시킵니다.
[대전사]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 75 / 90 )
2)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1:1로 5개체 이상 쓰러뜨린다 ( 0 / 5 )
3) ★★★★★의 적을 3개체 이상 쓰러뜨린다. ( 0 / 3 )"
"......이 똥망겜 보소?"
3성에서 4성으로 올라가는 조건은 넉넉하기 짝이 없더니, 갑자기 5성으로 올라가는 조건은 뭐이리 힘들고 어렵단 말인가.
'그만큼 빡시다는 건가?'
5성 90레벨이 솔로몬 72던전의 10위권 안의 마족들이라면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에스투같은 버그캐가 아니라면, 이 세계에서 손에 꼽을 만한 강자는 거의 레벨이 100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성장 방향은 분명히 달라.'
성기를 이용해 널리 씨를 퍼뜨리는 데에 주력해야 할 <대족장>은 파종과 수확에 특화되어 있다.
던전의 등급을 올리고 별이 높은 부하나 마물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할 <던전 로드>는 진화와 던전 성장에 특화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대전사>는 그냥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할 지는 당연지사.
'무조건 대족장이지.'
힘든 길은 선택하지 않는다. 어차피 똑같은 5성으로 나아간다면 가장 쉽고 빠른 길이 좋지 않겠는가.
박고 싸기만 하면 끝. 에일라가 기적적인 확률로 환생을 했던 것 처럼, 앞으로 누구든 두 번만 환생하면 횟수는 금방 채울 것이다.
0.1%라는 것은 즉, 1000번을 사정 하면 한 번은 이루어질 확률이 아닌가.
"륜아."
"네."
"너 내가 하루에 10번씩 싸면 그거 하루에 다 받아낼 수 있겠니?"
"100번이고 1000번이고 다 받아드릴게요."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나의 대족장의 꿈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조건들도 채우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하든 서로 맞물려서 상승되게 되어 있어.'
번식에 성공하여 정원을 늘리려면 던전 등급을 높여야 하고, 던전 등급을 높이려면 그만큼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고, 또 그 적들을 퇴치하여 포획하면 씨를 뿌릴 대상이 늘어난다.
결국 어떤 진화든 내게 있어서는 '세력을 확장시킨다'로 귀결되었다.
'심정적으로는 대족장 길을 걷는게 제일 맞지만, 역시 다른 길도 포기할 수는 없어.'
일단 레벨부터 올리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아마 레벨은 내가 던전 등급이 B나 A로 오르지 않는 이상, 그리 올릴 기회가 잘 없지 싶었다.
'슬라임 던전을 아무리 돌아도 레벨은 오르지 않았어.'
어디 좋은 던전 없을까. 메어리가 서브 던전을 만들 수 있는 차원석을 하나 더 발견해주는 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륜아."
"네."
"아무래도 네가 제일 급한 것 같다."
"뭐, 뭐가요?"
"3성."
던전 등급의 상승 조건. 3성 3인 확보까지 이제 딱 한 명 남았다. 그리고 륜의 레벨링을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륜아."
"네."
"아무래도 너의 역할이 충분히 필요한 때가 된 것 같다."
"......? 혹시 한 번 더 싸시고 싶으세요?"
나는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륜은 자신없는 얼굴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저 활 쏘는 건 못해도 혀 쓰는 건 잘 할 수 있는데요!"
"륜아, 너 엘프다. 레인져야. 그런 말 하면 못 써."
"힝...."
륜은 울상을 지었지만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륜이 3성이 되기위한 대여정의 시작이므로.
저벅, 저벅.
동굴 맞은 편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에일라가 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주인님?"
"그래, 나다."
"몸에 그것은.... 워페인트 입니까?"
"그런 셈이지."
나는 팔을 걷어 내 근육을 과시하며 에일라에게 씩 웃었다. 에일라는 애매한 미소로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에일라는 문신을 꺼리는 것 같았다.
"너는 문신이 싫냐?"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혹시 그걸 이 던전의 심벌로 사용하시려나 싶었습니다."
"아, 그런 건 나중에. 지금은-"
"주인님. 귀족가문에 가문의 문장이 중요하듯, 던전에도 멋진 문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일라는 갑자기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공동에는 다른 이들이 없기는 했지만, 갑자기 웃통을 까는 건 떡을 치고 싶다는 신호가 아니었-
"보십시오."
우우웅.
등을 돌린 에일라가 몸에서 마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에일라의 등에는 양의 얼굴같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너 진짜 기사는 기사구나?"
"윽.... 주인님께서 저를 온전한 기사로 만들어주신 겁니다! 그보다 잘 보십시오. 보이십니까, 저의 문장, <아리에스 가문의 문장>이?"
"오냐. 그래. 엄청 잘 보인다."
덧붙여서 옆가슴도. 그냥 앞으로 다가가서 가슴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에일라의 진지한 얼굴에 잠깐은 참기로 했다.
"네. 보시는 바와 같이, 제게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주인님께도 이런 문장이 필요합니다. 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음....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러면 여기다가 주인님 문장을 새길게요."
륜은 자신의 아랫배를 손으로 감싸쥐었다. 혹시 얘 알고 이러나 싶어서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곧 이어진 시스템의 안내에 더욱 얼척이 없었다.
<타투> 주술사로서 사용가능한 기술. 상대의 몸에 주술적 각인을 하여 특수한 효과를 일으킨다.
# 저주
# 흥분
# 속박
"......륜아, 네 덕분에 나는 오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었구나."
"뭐예요?"
"던전의 것들이 모두 나의 것이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일종의 표식이었다. 이 던전에서는 자유로운 행위를 권장하지만, '이들'만큼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표시기도 했다.
륜, 에일라, 라임.
거기에 더 추가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셋은 무조건 확정이었다.
"흐흐, 기대해라. 내가 디자인 하나는 끝내주게 잘 하거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타투의 수만 여럿이다. 내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륜은 싱글벙글 웃으며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 어디 나가려고 하십니까?"
"응. 나갈 곳이 있어."
"나갈 곳이요?"
"그래. 너도 같이 갈래?"
"어딘지 모르겠지만 허락하시면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갈 곳은...."
나는 밖을 가리켰다.
"바깥이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남작님."
그에이 경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상대는 비르고 남작이었고, 남작은 굳은 얼굴로 그에이 경을 마중나왔다.
"...조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네. 물론입니다."
비르고 남작은 툴툴거렸지만, 그에이 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남작은 머뭇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에이 경, 혹시 크림파이 좋아하십니까?"
"네.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럼 가시기 전에 하나 먹고 가겠습니까? 떠나시기 전에 배를 채우고 가시는게...."
"하하. 죄송합니다, 남작님. 수도에 가서 먹겠습니다."
그에이 경은 정중히 사양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은 벌써부터 투레질을 하며 주인을 재촉하고 있었고, 비르고 남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예. 명령하신 것은 잘 수행하겠습니다."
그에이 경은 바로 말에 올라 성을 떠났다. 영지민들이 웃고 떠들고 있는 대로를 지나, 성문에 이를 때까지 비르고 남작은 그에이 경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쯧."
객관적으로 볼 때, 비르고 남작은 분명 미인상이었다. 청초한 흰 장미같은 여자. 그리고 장미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어딜 중앙 귀족을 몸으로 낚으려고.'
비르고 남작은 자신에게 온갖 추파를 던지며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그건 비르고 남작이 중앙 귀족 출신인 그에이와 연줄을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스테이크? 혼자서 열심히 써시지.'
비르고 남작은 스테이크를 권했다. 함께 식사를 하자는 의미였고, 남작의 식사 권유는 은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에이는 비르고 남작의 앞에서 교양있게 스테이크를 썰며 마구잡이로 먹어 치웠다. 미노타우르스의 살을 통으로 구워 만든 스테이크는 상당히 맛이 좋았다.
'크림파이? 수도에 널린게 크림파이다.'
그에이 경은 고개를 돌려 남작성을 향해 침을 뱉었다. 고작 먹을 걸로 자신을 유혹하려 하다니. 남작은 그에이 경을 몰라도 한참 몰랐다.
'마왕군이랑 전쟁만 끝나봐. 이런 변방에 뭐하러 있겠어?'
기껏 후방으로 도망쳐왔더니 그 영지의 주인이 자꾸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닌가. 절대 이런 곳에서 말뚝이 박힐 수는 없다.
"그래, 그에이야. 적어도 네 아내로는 성녀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
그에이는 스스로에 대해 정말로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성녀님 남편이 될 사람인데 괜한 이혼 경력을 만들 수는 없지."
더군다나 상대는 장미같은 여자. 부친을 독살하고 영지를 이어받았다는 소문이 팽배한 사갈같은 여인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말을 맞춰서 이런 짓이나 저지르지.'
용병을 동원하자.
용병을 동원해서 던전이 진짜로 있는 지 없는 지 파악해보자.
"흐흐흐."
그에이는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작이 제안한 '용병 동원'에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작을 혐오했다.
동족혐오.
그에이는 남작을 혐오했고,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대했다.
* * *
퍼억!
비르고 남작은 책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부친의 서고에 있던 쓰레기같은 관능 소설을 집어던진 남작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눈치 없는 개새끼가...!"
그에이.
검술 실력과 가문의 위세만 빼면 멍청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보신주의자.
그래도 가문이 상당히 중앙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고, 본인도 가문 내에서 제법 입지가 놓은 자인 만큼 연줄을 놓아보려고 했건만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알고 그런 걸까? 교묘히 빠져나간 건가?'
알면서 그랬으면 남작에게 창피를 준 개새끼고, 모르고 그랬으면 남작에게 창피를 준 등신새끼였다. 남작은 화딱지가 나서 책으로 책상을 퍽퍽 두드렸다.
"하아, 하아, 하아."
남작은 자괴감에 빠졌다. 다른 영애들은 조금만 빡쳐도 유리 화병을 집어던지기 일쑤인데, 자신은 망가지지 않는 책을 책상에 두드리며 화를 풀어야 했다.
"후우, 이게 다 돈 때문이야...."
남작은 책상 위에 놓아둔 지도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곳곳에 붉은 잉크로 X자가 그어져 있었다.
"그래.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범죄자 놈들...."
남작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활짝 웃었다.
"세금을 안 내면.... 오호호!"
남작의 눈에는 벌써부터 괴로워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역력했다.
* * *
나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정찰대를 편성하여 던전에서 제법 멀리까지 나왔다.
륜이나 에일라나 레벨은 전혀 높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레벨은 높지 않았지만 그들은 숲에서 꽤 오래 살아온 경험자들이다.
"주인님, 곧 나타납니다."
종마 사냥꾼들이 선행하여 다른 화전촌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륜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했다. 다행히 종마 사냥꾼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면 되냐?"
"이제 곧.... 헙."
우리는 몸을 낮췄다. 그리고 언덕 아래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코를 막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먹이가 기다리고 있는 거라스."
그곳에는 나체의 새대가리들이 부리에서 침을 흘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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