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6일차 -------------------------
릴리는 의식을 되찾았다.
구름속에 빠진 듯 붕붕 뜨던 몸의 열기는 가라앉았고, 릴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흑, 흐윽...!"
절망했다. 릴리는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알을 낳았다는 것 이상으로,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했다.
인간이 알을 낳았다.
그것도 마물의 알을 낳았다.
이제 릴리는 인류의 공적이 되었고, 더이상 인간들의 속에서 숨어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여신교.
인류 연합의 중심이자 마왕군과의 대결에서 가장 열의를 보이는 여신교도들은 마물들과 통정한 이들을 마녀사냥하고 다녔다.
애초에 화전촌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금기를 범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세금도 세금이거니와, 여신교단의 광신도들을 피해 나무를 태우고 땅을 확보해 마을을 지었다.
여신교단의 교도들은 마물은 무조건 죽인다.
마물과 통정한 이들도 모조리 죽인다.
하물며 마물과 통정하여 그 씨를 받아 알을 낳기 까지 하였으니, 릴리는 이제 돌아갈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흑, 흐윽, 흐윽...!"
그리고 무엇보다도 릴리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 것은 '쾌감'.
37년 동안 릴리는 살면서 이런 쾌감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돈을 벌었을 때의 쾌감은 물론이거니와, 살면서 성행위를 하면서 얻었던 그 어떤 쾌감과 비교해도 알을 낳은 쾌감은 상상을 뛰어 넘었다.
한 번 더 맛보고 싶다.
릴리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저기...."
"......뭐야."
릴리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다른 여자 사냥꾼에 자신도 모르게 날선 어투로 답했다. 똑같이 괴물에게 한 번씩 박혀봤으면서, 릴리가 알을 낳았다고 굳어버린 그 표정은 잊지 않았다.
"그, 그게...."
"왜? 역겨워?"
릴리는 다른 여자 사냥꾼을 눈으로 훑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들 슬라임의 체액을 퍼먹으며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릴리에게 식사를 권유하거나 함께 먹기를 거부했다.
"우웁."
릴리와 눈이 마주친 여자 사냥꾼 하나는 아예 먹던 슬라임의 체액을 뱉어낼 뻔 했다.
릴리가 알을 낳던 장면이 떠오른 듯 했고, 그들이 릴리를 바라보는 표정은 더럽고 불결한 것을 넘어 아예 상종조차 하기 싫은 눈치였다.
'어이가 없네.'
릴리는 알을 낳으며 직감했다. 과연 자신만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될까? 그저 순서가 자신이 먼저였을 뿐이다.
'차라리 그 괴물에게 당한게 나아.'
적어도 괴물은 자신을 한 번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나름 한 번 사용한만큼 적어도 이 노예 집단에서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안 그러면 다른 괴물들에게 먹힐 수 있어.'
차라리 오크에게 먹히는 편이 나았다.
크르륵.
저 시체같은 괴물들은 지금은 비록 아랫도리가 없지만, 그보다 상위종의 괴물은 분명히 달고 있다.
던전에서 그 괴물들에게 한 번 당했던 트라우마로 은퇴한 동료를 떠나보낸 릴리로서는 그런 경험을 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알을 낳고, 심지어 그걸 더 하고 싶어 지더라. 릴리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 이거...."
여자 사냥꾼은 나무컵을 들이밀었다.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슬라임의 체액이 가득했고, 릴리는 자신에게 아무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여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 더러워?"
"......."
여자 사냥꾼은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좋았어?"
"뭐?"
릴리는 황당함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자 사냥꾼이 화들짝 놀라 쉬쉬거렸다.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좋았냐니.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
"나 여태까지 너랑 하면서 그렇게까지 가버리는 거 처음 봤다고."
"......."
릴리는 침묵했다. 상대는 자신과 한 침대에서 몇 번 행위를 나눈 사람이었고, 릴리나 여자나 같은 이유로 화전촌을 드나들게 된 사람들이었다.
"저기, 진짜로 그렇게 좋았어? 나랑 할 때보다 더...?"
"몰라.... 직접 해보던지."
"......그래도 될까?"
"이런 미친 년이."
상대는 진심이었다. 고작 쾌감 때문에 괴물과 행위를 나누겠다는 말에 릴리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치만,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걸."
여자는 체념하고 있었다. 여전히 목책 곳곳에는 구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괴물이 얘기했잖아.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는 살 수 없게 됐다고. 그럼 차라리 그냥...."
"저기, 나, 나는 너 지지해."
지루남이 나무컵을 들고 근처에 다가왔다. 괴물은 모르지만, 이 셋은 한 번 다같이 침대에서 몸을 뒹굴거린 적이 있었다.
"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그냥 죽을 수는 없어."
"너.... 하아."
릴리는 한탄했다. 피라미드의 최하층 내에서 발생한 미묘한 파벌 싸움에서 릴리는 그나마 그곳에서도 흙으로 된 왕관을 쓰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편은 두 명 뿐이었다.
3:4.
여자 사냥꾼들은 물론이거니와, 조루남까지 릴리가 '알'을 낳은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저벅. 저벅.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일곱 사냥꾼들은 화들짝 놀라 먹던 체액을 꿀떡 삼켰다.
"흠. 잘 지내는 것 같군."
생전 처음보는 차가운 인상의 금발 여인은 마치 기사처럼 절도 있는 모습을 보이며 사냥꾼들을 내려다봤다. 사냥꾼들은 그 오연한 눈빛을 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존재였다. 오랫동안 하층민으로 살아온 그들은 상대의 행색에서 금방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에게서는 괴물의 냄새가 진하게 베어있었다. 그게 릴리를 순간적으로 짜증나게 만들었다.
"흠흠. 반갑다. 나는 에일라. 주인님의 기사이니라."
"...기사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리고 릴리는 에일라의 뒤에 서있는 새로운 괴물을 발견했다.
"어...."
괴물, 아니 남자는 자신을 향해 상쾌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을 범한 괴물처럼 근육질이 탄탄했지만, 배에는 뱃살 하나 없이 근육이 턱턱 박혀있었다. 그리고 바지로도 가릴 수 없는 거근에 릴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똑같은 녹색 피부였지만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릴리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미쳤다고 확신했다.
"네가 릴리인가?"
"......."
릴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에일라는 한참동안 릴리를 바라보더니, 뒤의 오크 청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 아들이다."
"????"
"네가 낳은 알이 아들이 되었다."
인간들은 혼란에 빠졌다. 릴리가 알을 낳고 기절하여 괴물이 던전으로 들어간 지, 불과 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엄연한 전사처럼 보이는 오크가 릴리의 아들이라고? 당장 릴리부터가 믿을 수 없었다.
"아...."
하지만 릴리는 오크, 아더를 볼 때 마다 느껴지는 기시감에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만면에 미소를 휘감은 모습은 먼 옛날 자신을 안아주던 아버지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어.... 쟤 너랑 좀 비슷한 것 같다?"
지루남은 청년과 릴리를 수 차례 번갈아가리켰다. 분명히 둘은 닮아있었다.
"자, 잠깐만요. 지, 진짜로 내 아들이라고요?"
"물론. 주인님의 은총을 받아 알을 낳기 까지 고작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다. 10개월이 2일로 줄어든 것 처럼, 성장도 아주 빠르지. 복잡하면 주인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라. 나도 자세하게는 모른다."
에일라는 순순히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오크의 등을 떠밀었다. 오크는 어색한 눈치로 릴리의 앞에 섰다.
"어.... 엄마라고 부를 까요, 아니면 어머니라고 부를까요?"
"하아."
릴리의 인간으로서의 상식이 무너졌다. 하지만 감성과 본능은 오크에 대하여 분명한 감정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네 이름은?"
"아더. 아버지가 아더라고 하셨어요."
"......."
언젠가, 아들을 낳으면 아더라고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아들이 갑자기 생겨날 줄이야.
"......후우."
릴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뜯어보니, 그 괴물에게서 태어났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쾌남의 상이었다. 무엇보다도 허리가 잘록한게 마음에 들었다.
'아들만 아니었으면.'
"......크흠흠. 내가 무슨 생각을."
릴리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더는 인간이기를 생각하기 전에 여성으로서 호감을 일으키게끔 하는 시원시원한 외형이었다.
즉, 반대로 얘기하면 릴리는 아더를 명백한 이성이 아닌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으로는 말하기 힘든 뭔가 본능같은 것이었다.
"아더는 여기서 생활하며 너희들을 도울 것이다. 던전 안에서 나와 대련을 하며 힘을 기르게 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너와 함께 생활할 것이다."
"잠깐만요. 당신이 누구길래...?"
"명망있는 가문의 기사였다고 해두지. 그리고 나는 네 아들을 나의 종사로 삼을 셈이다."
에일라는 절도있는 자세로 릴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부디 너와 주인님의 아들을 내가 가르치게 해다오."
"지, 진짜 기사님이세요?"
"물론."
에일라는 적어도 자세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릴리는 적어도 에일라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허, 허락을 구하고 자시고."
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락을 하는 것은 즉 아더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상식에 얽메이는 판단과 관념보다 생존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다.
"...제 아들을 잘 부탁드려요."
"고맙다. 그럼 아더, 나는 일단 주인님께 돌아간다."
"네, 에일라 어머니."
"뭐...?"
릴리는 한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선 아더-아들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뭐부터 하면 될까요?"
"......."
릴리는 슬쩍 다른 사냥꾼들을 흘겼다. 그들은 모두 알이 수 시간만에 건장한 사내가 되어 나타난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릴리의 감은 명백히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여자 사냥꾼들은 아더를 위아래로 훑으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고, 조루남은 어깨를 움츠리며 아더에게서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일단 아더."
릴리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아더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엄마라고 부르렴."
"...네, 엄마!"
아더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 * *
다른 이들을 진화시켜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진화에 나선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진화는 마찬가지로 소환 시설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나의 몸이 조금씩 뒤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화.
새로운 존재로의 각성.
라임이 그냥 평범한 슬라임에서 슬라홀까지 진화한 것 처럼, 나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화 테크트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과연 어떤 존재로 변할까. 나는 담담히 안개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푸후우."
...예전보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나는 가장 먼저 배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뱃살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몸의 변화도 없었다.
"뭐야?"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안개를 손으로 헤쳤고, 곧 륜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
"히익."
륜이 나를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진짜 괴물이라도 된 건가?
"주, 주인님...!"
륜은 나를 주인이라고는 했지만 겁을 먹었다. 도대체 어째서? 왜?
"주, 주인님이.... 흐아앙!"
륜이 제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팔을 들어올렸다.
"헐."
팔은 달라진게 없었다. 하지만 팔에는 갈색의 이상한 옷자락이 생겨나 있었고, 그 팔을 거두니 전체에 기하학적 무늬의 자국들이 생겨났다.
"아니 시발?"
나는 내 몸 위로 생겨난 괴상한 형태의 로브를 벗어던졌다. 여전히 근육과 뱃살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팔에서부터 이어진 기하학적 무늬는 전신에 새겨져 있었다.
"설마, 설마!"
나는 아래에 생겨난 속옷을 내렸다. 정말로 다행스럽게 나의 자지에는 이상한 문신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정보를 살폈다.
<파후우 쿰처쿠 척> ★★★★☆
이름. 나는 파후우 쿰처쿠에서 파우후 쿰처쿠 척이 되었다. 사실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레벨 : 75 / 90
레벨. 나도 어느새 90레벨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5레벨만 올리면 루나와 맞상대가 가능할 터.
종족 : 오크
나이 : 3세 (33세)
성별 : 남성
등급 : Rare
출생 : 포르네우스의 던전
소속 : 쿰처쿠의 던전
직업 : 오크 주술사.
주술사라니. 아니, 직업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내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기하학적 문양의 무늬들.
벅벅벅.
아무리 손으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륜은 나를 보며 눈물을 훌쩍였고, 나도 울고 싶었다.
"주, 주인님 몸에 낙서가.... 흑, 흐윽...!"
"이, 이런 젠장...."
진화의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4성이 되었고,
근돼에 문신까지 한 오크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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