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4일차 -------------------------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에스투'라고 불러주세요."
"이름 가명인 거 같은데."
"네. 본명은 제 주인님만이 알고 계시니까요. 주인님이 독점욕이 상당하신 분이라, 남들 앞에서는 이름도 밝히지 못하게 하세요."
"......거 주인이 참 야박하시네."
피부조차도 노출 못하게 오피스룩에 검은 스타킹까지 맞춰놓은게 여간 변태가 아니다.
"......주인님 덕분에 당신이 던전의 주인이 된 거거든요? 저희 주인님이 아무리 희대의 쓰레기같은 개변태라도, 당신도 주인님이 만드신 <시스템>의 지원을 받고 있다면 조용히 하세요."
"주인님이 누군데?"
"솔로몬 님이세요."
마왕이면 인정이지.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잠시 성호를 그렸다. 에스투는 주변을 아련한 얼굴로 훑었다.
"음.... 여기도 엄청 그리운 곳이네요."
"여기에 뭐 있었냐?"
"네. 72던전의 1등, <바알>을 아시나요?"
"알다마다."
인류 연합과의 최전선에서 홀로 왕국 하나와 백중지세를 펼치는 차기 마왕을 어찌 모를까.
"그 바알이 이사를 가기 전에 제일 처음 시작했던 곳이 여기거든요."
"헐."
빈집이 생각보다 거물의 터였다.
"그럼 나 바알한테 모가지 날아가는 거냐?"
"아뇨? 바알 본인도 여기를 되찾으려고 하지는 않을 걸요? 한 번 본진까지 털렸다가 본인이랑 부하들 목숨만 건사해서 도망쳤던 곳이라. 오히려 당신이 여기서 던전을 복구하면 고마워 할 거예요."
"그런가. 다행이네."
어쩐지 땅을 파면 팔수록 마석이 나온다 싶더라. 예전에 던전이었으니 그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네가 온 이유에 대해서 말인데...."
나는 에스투를 위아래로 훑으며 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OL룩의 서큐버스라니. 레벨과 별의 앞에 깔았던 성기가 다시 빳빳하게 서는 느낌이 들었지만-
"......흐흐?"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라서."
잠시 에스투의 몸매와 선이 다 드러나는 오피스룩에 꼴렸지만, 마왕의 여자를 건드렸다가는 바로 고사상에 머리가 올라갈지도 모른다.
"흠흠. 그래서 제가 온 이유도 대충 감이 오시죠?"
"관리 외 던전이라고 했지."
마왕 솔로몬은 자신의 아래에 72개의 던전을 만들어놓았다. 내가 있던 <포르네우스>의 던전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왕님의 던전 말고도 다른 던전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마왕님의 <시스템> 지원을 받지 않는 던전이죠."
"아하."
"72 던전은 모두 마왕님이 만드신 던전 운영 시스템의 지원을 받고 있어요. 마왕님이 만드신 마법 술식의 도움에 따라서 아주 손쉽게 던전을 구축하는 거죠."
에스투는 내가 우러러 보기도 어려운 강자였지만, 이렇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는 걸로 봐서 에스투는 천사였다. 악마의 날개를 단 서큐버스지만.
"보아하니 당신도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네요. 그렇죠?"
"그래. 덕분에 나흘 만에 부하 30이 생겼다."
"...그래요. 그게 지금 상당히 난감하다는 겁니다."
에스투는 곤란한 얼굴로 공동 전체를 가리켰다. 온통 회색으로 된 세계에서, 에스투는 시설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당신이 얼마나 던전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빠르게 던전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어요."
"......?"
이게 무슨 개소리야.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라뇨. 당신 지금 던전 주인이 된 지 얼마나 됐어요?"
"음...4일?"
날짜로 치면 오늘이 딱 4일이 되는 시점이다.
"그래요. 나흘. 그럼 나흘만에 이정도로 던전을 만든 역사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다들 이 정도는 하지 않아?"
"허."
에스투가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이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하는 표정이었다.
"당신, 지금 3일째까지의 성적만 따지고 보면 모든 던전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탑 10안에 들어갈 정도예요."
"...이게 10등 안에 들어갈 발전 속도라고? 마족 놈들, 개병신인가?"
"당신이 이상한 겁니다. 처음 가이드 지원도 받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스스로 던전을 발전시키는 게 이상해요. 잠시만요."
에스투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훑으며 뭔가를 뒤적거렸다. 그게 꼭 스크린을 넘기는 손짓이라 나는 왠지 동질감이 들었다.
"아, 찾았다. 보통 소환 시설 Lv.2를 구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7일이거든요?"
"이걸 소환하는데 7일이나 걸린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이상한 거라고요! 세상에 소환 횟수 10회를 매일같이 꽉꽉 채워서 소환하는 경우가 어디있어요?"
"10회까지 소환하라고 하면 10회 다 하는게 정상 아니냐?"
"아니. 누가 그래요?"
"내가."
직감했다. 나와 에스투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냥 당신이 던전 발전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하죠. 그래요. 나흘만에 ★★★에 해당하는 마물을 소환할 만큼."
"소환? 진화가 아니고?"
"네. 소환."
에스투는 구두를 세워 소환진을 두드렸다.
"방금 ★★★이 소환되려던 거, 제가 잠깐 틀어막고 대신 튀어나왔어요."
"야이."
10% 짜리 확률로 소환을 했는데 그걸 막아세웠다고?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화딱지가 났지만, 내 분노는 저 255라는 레벨 앞에서 자연히 수그러들었다.
"이 대화 끝나면 그러면 바로 나오냐?"
"......그것 때문에 난감해서 제가 튀어나온 겁니다. 2성까지야 어떻게 눈가리고 아웅 할 수 있어도, 3성부터는 기록이 남아요. 마물 소환이라는 거, 마왕 님의 던전에서 각 던전으로 마구잡이로 파견을 보내는 식이라서."
"거긴 무슨 공장이냐?"
"네. 인류 연합을 이기기 위해서는 물량 공세가 답이니까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설마 각 던전에 소환되는 마물들이 솔로몬이 직접 공급하는 마물일 줄이야.
그러면 하루에 10마리까지 제한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솔로몬 허리 엄청 바쁘겠네."
"네. 오늘도 생산활동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그럼 하루 10번 제한은 더 못 늘리냐?"
"당신은 10번일지 몰라도, 모든 던전에서 10번씩 돌리면 솔로몬 님은 하루에 720번을 싸셔야 해요."
새삼스럽게 마왕에게 존경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만큼 인류 연합에 대한 마왕의 정복욕이 대단하다고도 느꼈다.
"마왕이라는 거 할 짓이 못 되는 구만."
"이 세상을 마족들의 땅으로 만드시려는 마왕 님의 의지가 대단하신 거죠. 마왕님이 거기 하나는 정말 절륜해서."
에스투의 눈이 시무룩해진 내 분신을 훑었다.
"흠흠, 마왕님이랑 비교하면 나는 어떻지?"
"...제가 당신이랑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비교를 해요?"
"그건 그렇네. 그럼 지금 테스트를 해보는 건 어때?"
"퍽이나. 저는 99레벨 이하랑 안 해요. 하다가 부러뜨려서."
100레벨에 도달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에스투는 점점 혈기가 차오르는 내 성기를 한참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참.... 솔직하다고 해야할 지. 알았어요. 시도 때도 없이 서는 거 이해하니까, 애써서 물 빼려고 하지 마요. 지금은 설명하는게 급하니까."
"무슨 설명?"
"'소환'에 관한 거죠. 다른 거야 당신이 알아서 어련히 다 해결하겠지만, 마왕성과 연동되는 소환 시설은 얘기가 다르거든요?"
에스투는 구두굽으로 바닥을 죽 그었다.
"당신이 3성을 소환했다는 걸 알면 기록에 남을테고, 다른 마족들은 그럼 당신의 던전을 눈치채고 침략을 하러 오겠죠. 싹부터 제거하려고."
"그건 그렇지."
나같아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이 있으면 자근자근 밟을 것이다.
"관리 외 던전이라 마왕님도 편을 들면 72던전의 편을 들었지, 당신의 편을 들지는 못하겠죠? 아무리 당신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래."
"그래서 제 제안은 이거예요."
에스투가 마력으로 허공에 문구를 띄웠다.
<일반소환>
# ★☆☆☆☆
# ★★☆☆☆
"콜."
"설명도 하기 전에?!"
"★★★ 이상으로는 못 보내 주는 대신, 5성까지 진화가능한 질 좋은 놈들로 보내주겠다 그거 아니냐."
"......다른 마족들도 당신처럼 머리가 잘 돌아갔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에스투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를 대견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물론 모두 5성까지 진화 가능한 애들로 보내줄 수는 없어요. 하루에도 수 백 마리의 마물이 태어나고, 그게 72개의 던전으로 퍼지니까요."
"충분히 이해한다."
애초에 5성짜리를 소환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덕지다. 에스투는 눈을 껌뻑이다가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쳤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데, 5성이 있다고 해서 5성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소환 시설의 상태가 좋아야 그만큼 더 우수한 마물들을 파견할 수 있으니까."
"알았고, 확률이나 얘기해줘."
"......머리좋으니까 가르치는 맛이 없네. 칫."
에스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게 확률에 관한 데이터를 제공했다.
<일반소환> Lv.5
# ☆ 35%
# ☆☆ 35%
# ☆☆☆ 20%
# ☆☆☆☆ 15%
# ☆☆☆☆☆ 5%
"5성이 5%? 개혜자인데?"
"...무슨 이해못할 소리를.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마왕님 컨디션 안 좋으면 5성도 안 나오는 날이 있고, 또 다른 던전에 소환 될 가능성도 있죠."
무능한 마왕 놈.
"태생 2성은 어쩔 거야?"
"통계 상으로는 통상 확률의 2할 정도가 ★★으로 태어나요. 그것도 어디까지나 통계니까 정확한 수치는 아니고요."
에스투도 확률의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난감해했다.
"...그리고 당신의 소환 시설은 지금 상당히 등급이 낮은 상태고, 제가 방금 보여드린 건 끝까지 증축했을 때의 얘기에요."
"뭐? 그러면 만렙이 얼마인데?"
"5레벨이요. 지금은 이렇게 되겠네요."
<일반소환> Lv.2
# ☆ 15%
# ☆☆ 40%
# ☆☆☆ 40%
# ☆☆☆☆ 5%
"이게 당신 소환 시설의 확률입니다."
"뭐야, 내 5성 돌려줘."
"5성 뽑으려면 최소 소환 시설 3레벨까지는 올리세요. 받는 쪽도 그만큼 준비가 되어야 보낼 수 있으니까."
에스투는 다시 시설을 한 번 쭉 훑었다가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쳇, 시간이. 아무튼 급한 불은 껐으니까, 이제 당신 마음대로 던전 키워봐요. 마왕님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으니까."
"마왕이 안다고?"
"아무렴 마왕님의 시스템을 쓰고 있는데 모르실 줄 알았어요? 마왕님이 기대하시니까 제가 투입된 거예요. 다른 애들이었으면 오지도 못했음."
"허."
6성에 255레벨을 투입할 정도로 내가 관심을 받고 있다니.
"그러다 내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나 이미 전적이 있는데?"
"그럼 시스템 지원 끊기는 거죠. 마왕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이유라도 있어요?"
"어. 너."
나는 에스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먹으려면 마왕 잡아야 할 것 같다는 말이지."
"......풋."
에스투는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씰룩이는 게,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내 객기에 기쁜 것 같기도 했다.
"마왕님께서 참 좋아하시겠네요. 자기 시스템으로 성장한 마족이 어느새 무럭무럭 커서 역으로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면."
"그렇지. 흐흐, 마족은 약육강식 아니냐. 강자가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퍼뜩 치고나가야지. 그리고 나중에는...."
나는 손을 뻗었지만, 에스투는 아주 가볍게 내 손길을 피했다.
"너 먹는다. 반드시."
"...기대하게 만드네요. 정말. 좋아요. 아마 마왕님이 들으셨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하셨을 거예요."
에스투는 두 손으로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시간 이제 진짜 얼마 없네요. 좀 더 얘기하고 싶기는 한데, 제가 진짜 바쁜 몸이라. 딱 하나만 대답해줄게요. 뭐 궁금한 거 있어요?"
"하나라...."
머릿속에 궁금한 건 많다. 내 스스로 답을 찾은 것도 있고, 답인 것 같지만 아리송한 것도 있고,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에스투에게 묻고자 하는 건 단 하나.
"너냐?"
"......."
에스투는 그저 검지만 입술에 붙인 채,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세상이 다시 색을 되찾았고,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목이 붙어있어서 다행이다."
매 순간순간 목이 달아날까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나는 입이 바싹 말라왔다.
'아무튼 살았다.'
살았으니 됐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주인님?! 뭐가 나온...?"
"어. 내가 소변을 지릴 뻔 했지."
검은 어둠이 사라진 소환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대신 찢어지기 전의 마물 소환권이 2장 달랑 남아있었다.
2장?
"...서비스가 미묘하게 좋네."
"주인님. 이거 보세요, 이거."
륜이 집어든 마물 소환권에는 붉은 립스틱 자국이 하나 묻어있었다.
"어.... 안쪽이 빛나는 것 같은데요?"
"잠깐만."
나는 조심스럽게 안을 펼쳤고, 그 안에는 무지개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마왕님."
본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마왕에게 감사했다.
찌이익!
잠시 뒤.
보라색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무지개빛의 아우라가 소환 시설에서 피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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