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1일차 -------------------------
냉정히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없었다.
그래서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펙트가 다르다. ★이 뜨는 경우가 똑같았지만, ★★와 ★★★는 제각각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발 ★★★이 되기를.
겨우 10연차만에 1%의 확률을 뚫고 나타난다면, 나는 그 녀석이 어떤 존재더라도 끝까지 사용해 줄 용의가 있었다.
제발 3성! 3성!
그러나 그런 미래는 내게 없었다.
보라색 연기가 가라앉으며 소환진에 나타난 것은 슬라임도 슬라인도 아닌, 악취를 풀풀 날리는 시체였다.
<소환> 하이 구울(★★☆)이 소환되었습니다.
"3성이 나오기는 했네."
와. 슬라임과 하이 구울까지 3성이 두 개나 나왔다. 일단 별 개수는 3개니까 3성이 두 개구나. 하하하.
"쉬벌."
이왕 4%짜리가 뜰 거면 좀 사람 기분 좋게 1%로 뜨면 안 되나.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는게 아주 수준급이다.
"아니지. 슬라임 분대 꽉 안 채우는 게 어디야. 그렇지?"
크륵?
"못 알아듣냐?"
크르륵?
하이구울은 썩어문드러진 팔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내 명령에는 따르는 지성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이 구울> 구울의 진화체. 구울보다 더 단단하다.
"애초에 구울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무슨...."
갑자기 머리에 번개가 스쳤다. 나는 '마석소환'을 열었고, 갱신된 소환 목록에 쾌재를 불렀다.
<마석소환> 마석을 사용하여 부하를 소환합니다.
# 슬라임 0 / 5 (최하)
# 구울 0 / 10 (최하)
# 하이구울 0 / 10 (하)
# 현재 소환 가능 마물 3종.
"친절하네."
슬라임의 두 배 가까이 최하급 마석이 소모되지만, 아마도 구울의 상위종인 하이 구울을 소환한 덕분에 하위종도 함께 소환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래. 어차피 불친절한 거, 알아가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리고 내게는 알아볼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하이 구울을 놀게 할 수는 없으니, 나는 하이 구울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가각.
슬라임들은 벽의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열심히 일하는 녀석은 내가 마물 소환서로 소환한 슬라임 드래곤(예정)이었다.
비록 그 속도는 더디지만 분명히 벽을 뚫고 있었고, 라임은 줄기 완장을 찬 채 선두에서 가장 열심히 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벽에 고개를 처박고 손을 벽에 붙인 모습은 대견해보이기 까지 했다.
"아주 속이 반짝거릴 정도로 열심히 하는...."
반짝?
"야 이 새끼야!!"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라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라임은 입에 반쯤 갈려진 마석을 문 채 가만히 있었다.
꿀꺽.
라임은 마석을 집어삼켰다.
"흐흐, 그래. 내가 동굴 벽을 파먹으라고 했지, 중간에 나오는 거 뭐 먹지 말라고는 안 했지?"
라임의 행동은 멈췄다. 동시에 다른 슬라임들도 행동을 멈췄다.
"어쭈. 이 놈들 봐라."
슬라임들은 마석을 먹은 덕분인지 죄다 레벨이 조금씩 올라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 자동 레벨업을 하는 놈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빡치기도 했다.
전력의 상승은 반길 일이지만, 한정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자원을 내 관리를 거치지 않고 소모되는 건 사양이다.
"라임아. 너희 분대, 동굴 파먹다가 마석 나오면 그건 네가 모아둬라. 마석이 뭔지 알지? 어떻게 네 안에서 꺼내줄까?"
도리도리.
역시 죽기 싫어서 내게 굴복한 놈 답게 목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챙긴다. 나는 라임의 얼굴을 손으로 비비며 확언했다.
"라임아. 내가 지시한 대로 동굴 뚫으면서, 너는 슬라임들한테 마석 받아서 그거 다 모아놔라. 내 침대 옆에. 알겠냐?"
끄덕끄덕.
라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라임 분대에게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아까 팔 때는 하나도 안 나왔는데.'
왜 하필 마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시점에 마석이 튀어나온 건지. 아니면 저 놈들, 설마 내가 보기도 전에 먼저 먹어치운건가?
으적, 으적.
"...후자인 것 같은데."
한 1분 정도 노려보고 있으니, 한 놈의 입에 마석이 물려있었다. 놈은 몸 밖으로 마석을 뿅 하고 배출했고, 라임은 그걸 주워 제 몸에 보관했다.
"그래, 그렇게만 해라. 돌아왔을 때 양 적으면...."
꾸륵꾸륵
라임은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으며 모범을 보였다.
한 번 경고를 했으니 그래도 요령은 피우지 않으리라. 이번은 내가 벽에서 마석이 나오는 걸 몰랐으니 잠자코 넘어가지만, 만약 다음에 진짜로 요령을 피우는 순간이 있다면....
'그 때는 진짜로 라임 쥬스가 되는 거지.'
라임(★★☆☆)은 라임(★☆☆)이 될 것이다. 말 안 듣는 4성짜리 슬라임 인간보다 말 잘듣고 일 잘하는 3성 슬라임 드래곤이 더 낫다.
어쨌든, 돌아오고 나면 마석이 어느정도는 확보되어 있으리라. 내 운을 생각하면 최하급만 주구장창 나오겠지만, 그래도 던전을 뚫으며 뭔가가 생기는 건 반길만한 일이다.
"가자, 하이 구울아."
케륵.
나는 하이 구울과 함께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나무로 만든 함정은 전부 다 망가져 있었다.
'역할은 잘 했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망가지도록 하여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것. 애초에 내 손으로 그럴싸한 함정을 만들 수는 없으니, 함정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고블린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함정 하면 고블린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물 소환서는 다 써버렸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하이 구울아, 여기 잘 기억해라."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하이 구울을 데리고 조심스레 동굴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하이 구울을 데리고 내가 벌려놓은 벌목장에 도착했다.
"너의 임무는 이거다, 이거."
나는 라임이 밑둥을 갉아먹어 쓰러뜨린 나무들을 가리켰다.
"들어봐."
케륵.
하이 구울은 나무 한 그루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힘이 부족해 팔이 떨어져 나가려 했다.
"그럼 이거 들어봐."
케륵.
하이 구울은 나무 토막을 한 손에 들었다. 마침 시스템에서 인식하던 나무 토막 만큼의 크기였고, 하이 구울은 남는 손으로 나무 토막을 양 허리에 끼웠다.
"너는 지금부터 이 크기의 나무 토막을 던전 입구에다 쌓아라. 여기있는 이 나무 토막들만. 알았지?"
케륵.
나는 일부러 하나하나 지정까지 했고, 하이 구울은 그 정도는 알아먹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정한 나무 토막 대략 스무 개. 나는 내 옆구리에도 두 개를 끼웠고, 하이 구울을 선행시켰다. 하이 구울은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가 한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태생이 2성."
다행히 하이 구울은 나무 토막을 들고 무사히 던전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나무 토막을 던전 입구에 쌓았고, 하이 구울도 나를 따라 나무 토막을 쌓았다.
"너 잘할 수 있지? 믿는다?"
케륵.
하이 구울은 두 손을 흔들어대며 등을 돌렸다. 정확히 목재가 산적되어있는 곳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은 누가봐도 성실한 일꾼이었다.
'똑바로 하면 이름이나 줘야지.'
하이 구울이니까 하서스.
일단 난 아버지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 * *
점심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기는 했지만, 그들은 성인식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은 햇병아리들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항상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었고, 그들의 행동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무도 안 돌아왔어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녜요?"
실종된 청년들의 부모들은 광장 한 자리에 모여 자녀의 안위를 걱정했다. 해가 중천을 지나가도 청년들은 점심을 먹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 애들이 좀 늦게까지 놀 수도 있지! 한창 혈기 왕성할 때 아닌가. 기다려보시게!"
리처드의 아버지, 마을의 촌장은 성질을 부리며 호통을 쳤다.
마을의 대표인 촌장의 위세에 다른 부모들은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자녀의 위험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촌장님. 리처드까지 안 돌아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밥 때만 되면 일을 농땡이 피우다가도 나타나는 아이입니다."
"...에잉, 어디서 돼지 새끼라도 사냥한 모양이지! 마을에 가져와서 나눌 생각은 않고 지들끼리 처먹으려고 하는 게야! 걱정 마시게! 이 땅에 어디 위험한 마물이 있던가? 없어! 그렇지 않나, 메이 할.... 이 아줌마는 어디있어?"
촌장은 메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찾았다. 아들 리처드의 연인이기도 한 메리를 홀로 키운 과부이자 마을의 유일한 마법사인 메이는 광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또 한 밤 내내 연구하거나 그런 거 아닐까요? 지금 자는 시간인데...."
"딸내미가 없어졌는데 쳐자빠지는 어미가 어딨어?! 제정신이야?!"
촌장의 호통에 잭과 카이의 부모는 속으로 험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걸 눈치 챌 만큼 촌장은 눈치가 좋지 못했고, 촌장은 씩씩 거리며 메이의 집을 두드렸다.
쾅쾅쾅!
"아줌마! 뭐해! 자냐?!"
촌장은 엄청 무례할 정도로 문을 두드렸다. 노크라도 한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촌장이 이 정도로 시끄럽게 두드렸는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하음."
자다가 깨어난 듯 비몽사몽인 메이는 옷이 흐트러진 채 촌장을 맞이했다. 누가 메리의 어미 아니랄까봐 흐트러진 옷 사이로 비친 계곡은 몹시 깊었으나, 촌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얘기했다.
"...흠, 그래? 그럼 밤 되기 전에 돌아오겠지. 흐아암, 별 일이야. 난 잘래...."
쿵.
메이는 무사태평했고, 그 모습에 다른 부모들은 자신이 과민 반응을 보이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촌장님. 아무리 그래도...."
"끙, 저녁까지 기다려보세! 그래도 안 나타나면 찾으러 가고. 그 때까지 하던 일 마저 해! 세금 바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촌장의 독촉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불안감을 가지고 일터로 돌아갔다.
해가 산을 넘어가는 그 시간까지, 그들은 불안감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청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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