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1일차 -------------------------
메리는 맛있었다.
이미 누군가 한 입 크게 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뻑뻑하게 조여오는 에일라의 안쪽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를 포근하게 감싸안는 스펀지에 빠진 것 같았다. 인간인 이상 날 수밖에 없는 시큼한 냄새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차피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다 먹었으니 이제 놓아줄 뿐.'
만약 메리가 등급 자체가 높았거나 자질이 출중했다면 내 생각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메리는 고작 1성.
그리고 메리를 살려두는 것보다 라임을 진화시켜 '마물진화'의 매커니즘에 대해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콰득!
나는 라임에게 후처리를 맡겼고, 던전에 남은 인간들의 흔적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목검과 지팡이, 그리고 천쪼가리 뿐이었다.
그들은 이 조잡한 목검으로 슬라임 던전을 노렸을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던전은 슬라임 던전이 아니었다.
...비록 주 병력은 슬라임이지만.
<알림> 라임이 슬라인으로의 진화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 레벨 15 / 15
# 인간을 먹는다 4 / 4
라임은 슬라인으로의 진화 조건을 달성했다. 그 덕분에 내 시스템의 '마물진화'는 아무 문제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물진화> 라임의 진화가 가능합니다.
# 빅슬라임
# 슬라인
"당근 슬라인이지."
나는 슬라인을 선택했고, 시스템의 인도에 따라 라임을 집어들었다. 라임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직감한 듯, 쥐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진화 가자!"
나는 라임을 소환 시설의 가운데에 놓았다. 다행히 진화는 다른 시설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듯 했고, 라임의 몸은 녹색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알림> 앗, 라임의 상태가...?
왠지 B버튼이 있다면 누르면 안 될 것 같처럼 녹색의 빛무리가 반짝거렸다. 라임의 몸은 녹색의 빛으로 감싸였고, 그 형태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마물진화> 라임(★★☆☆)의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 라임의 종족이 갱신되었습니다. '슬라인'.
# 라임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Lv. 15 / 35.
"딱 갱신된 정보만 알려주네. 씁."
나는 라임의 이전 정보에서 뭔가 달라진게 있나 싶어 확인했지만,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슬라인이라는 종족 자체.
<슬라인> 슬라임이 인간이 되기를 동경하여 인간의 형태를 갖춘 모습.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 외형을 정확히 갖추게 된다.
# 다음 진화 : ??? (레벨 달성)
"다른 조건은 없는 건...가? 라임아. 너 뭐 아냐?"
도리도리. 라임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렸을 때 찰흙으로 빚어낸 사람같은 형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게 참 신기했다.
하지만 아직 박을 수 없다.
박는다면 인간 여성의 형태가 되고 난 다음.
나는 라임을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었고, 라임도 그걸 바라고 있으리라. 안 그러면 그냥 라임 쥬스가 될 테니.
"그러니까 무럭무럭 자라라. 응? 내가 부하도 만들어줄게."
끄덕끄덕. 라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나는 우선 나를 위해 일할 부하들을 소환했다.
"라임아, 마석 가져와라. 먹지는 말고."
라임은 뒤뚱거리며 내가 침대 아래에 꿍쳐둔 마석들을 가져왔다. 미리 다섯 개 씩 분류해놓은 덕분에, 슬라임을 확정적으로 소환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35개? 라임아, 나머지 5개도 전부 가져와라."
라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재차 명령을 내려 여분으로 남겨둔 5개까지 모조리 챙겼다.
'소환 시설의 레벨을 올리려면 10번을 소환해야했지.'
아직까지 나는 마물을 하나도 소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8마리의 슬라임을 소환할 최하급 마석 40개, 그리고 퀘스트 같은 것을 통해 얻은 마물 소환서가 2개 있다.
우선 한 마리. 나는 슬라임을 소환했다.
"가챠!"
마물소환진 중앙의 마석이 반짝였다. 목재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보라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 마력은 제단 정중앙으로 모여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진에 녹색의 작은 슬라임이 나타났다. 멀뚱멀뚱 거리던 슬라임은 내 지시에 따라 라임의 앞에 멈췄다.
'시작부터 불안하게 1성이냐.'
심지어 2성으로 진화도 못하는 1성이다. 저 놈의 이름은 앞으로 잭이라고 불러야겠다.
<시설 증축> 던전 내 시설의 등급을 올립니다.
# 증축 대상 : 소환시설 Lv,0
# 증축 결과 : Lv.0 -> Lv.1
# 상승 조건 : 마물 10회 소환 ( 1 / 10)
"거 보기 좋게 알려주는 건 좋은데 좀 더 알려주면 덧나나?"
시스템은 내가 원하는 것만 알려줬다. 가챠 확률이나 이후 진화 루트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감지덕지였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게 참 그랬다.
하지만 한 번 소환을 한 덕분에 소환 횟수가 1 늘었다. 마물의 소환에는 마물 소환서에 의한 소환이나 마석에 의한 소환이나 둘 다 소환으로 취급되었고, 나는 연이어 슬라임을 소환했다.
노리는 것은 7연가챠. 제발 3성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라며,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마물들을 소환했다.
"앗, 방금 시스템 에러가 나서 5성 슬라임이 뜨는 미래가!!"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으아악!!"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전부다 1성밖에 나오지 않고, 심지어 태생이 2성인 놈도 없었다. 그나마 2성으로 성장가능한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내게는 1성짜리 슬라임이 여덟 마리 생겼을 뿐이다.
"......라임 앞으로 모두 집합."
고작 여덟 뿐인 슬라임이지만 전부 혈기가 넘쳤다.
여덟 마리 슬라임들의 앞에 선 라임은 갓 훈련소를 나와 신교대에 배치를 받은 조교처럼 우쭐거렸고, 나는 라임의 왼팔에 덩굴 중기로 엮은 완장을 채웠다.
"라임아. 앞으로 네가 이 놈들 대장이다. 알았지?"
끄덕끄덕. 라임은 덩굴 줄기를 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대 편성> 라임을 분대장으로 임명합니다.
# 분대 편성 조건 : 분대장 레벨 이하, 등급 이하 마물
# 분대 정원 : 0 / 10
"딱 두 마리 모자라네."
라임이 마석을 조금만 덜 처먹었어도 분대를 완전히 편성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기는 해도 그 덕분에 진화를 할 수 있었다고 퉁치자.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분대 편성> 라임을 분대장으로 하는 분대를 편성합니다.
"그럼 라임아. 네게 임무를 맡기마."
나는 동굴의 입구로 나가는 벽을 가리켰다.
"이제 작업하자."
빅슬라임 대신에 슬라임 여덟, 아니 아홉이면 동굴을 충분히 개조할 수 있으리라. 슬라임들은 지렁이처럼 동굴벽을 갉아먹으며 내 던전을 내뜻에 따라 개조하기 시작했다.
라임 새끼, 완장 달았다고 벌써부터 짬 때리더라.
나중에 형태가 조금만 더 갖춰지면 그 건방짐을 뜨거운 방망이로 훈육할 것이다.
* * *
라임 분대의 지능과 작업 효율을 파악한 나는 일자로 된 동굴을 최대한 미로처럼 만들도록 지시했다.
다행히 라임은 식탐은 많아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은지, 내가 바닥에 그린 지도를 금방 파악해 동굴벽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역시 인간쪽으로 진화시기킬 잘했어.'
완장질을하고 짬을 때리는게 너무 인간다워지기는 했지만, 잔머리가 돌아가는 만큼 지성도 어느정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내 악랄한 가챠 운을 다시 테스트 하는 것.
"제발 2성이라도 뜨자...."
내게는 아직 2개의 마물 소환서가 남아있다.
'산술적으로 2성 하나 뜰 때가 됐다.'
1성이 뜰 확률은 35, 30, 20. 합하면 85.
그러니까 남은 두 번을 돌리면 분명 2성은 하나라도 뜰 것이다. 아니, 떠야한다. 아니면 1성이라도 별이 세 개 짜리인 녀석이 떠야했다.
아무리 내가 똥손이라고 하더라도, 10번 가챠를 돌려서 65% 확률 내에서 10번을 논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후우, 후우."
마물 소환에 의한 소환은 처음이다.
륜이나 트랄은 바라지도 않는다. 시스템의 확률은 사실 오기였고, 4성이나 5성도 뜨는 시스템이길 제발!
<소환> 슬라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씨발!"
쒸익, 쒸익. 절로 콧김이 뿜어졌다. 기쁨과 분노가 동시에 몸안을 휘젓는 이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지노선인 건 좋았다. 하지만 왜 슬라임이라는 말인가.
"터가 문제네, 터가."
슬라임 던전이라서 슬라임만 소환되는 저주가 걸린게 틀림없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다음 소환서를 꺼내들었다.
"아, 너는 가서 작업해라. 라임아! 신병 받아라."
분대원이 하나 더 늘었다.
라임은 본능적으로 3성따리를 견제했지만, 저놈은 전 집주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놈이다. 빅슬라임으로 진화시킨 다음, 슬라임 드래곤으로 진화시켜 던전 확장의 주역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남은 마물 소환서.
"또 슬라임 나오겠지."
저주를 퍼붓는다. 저주를 퍼부었으니 이제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아니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까?
"......."
나는 기절한 륜을 어깨에 둘러메고 소환진에 다가섰다. 륜의 손목을 잡고 소환 버튼을 눌렀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안 되네. 씁."
나는 륜의 조막만한 손을 내 손 위에 겹쳤다. 누르는 것은 내 손가락이 되겠지만, 륜의 기운을 잔뜩 빌어 소환하면 뭔가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가챠!"
제발.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물소환서를 찢었다.
우웅, 우웅.
'젠장.'
아까랑 똑같은 이펙트다. 다음에는 에일라의 손을 빌려야겠다.
'어차피 시설 레벨 올리려고 했던 거니까 괜찮-'
우우웅!
보라색 빛이 방금 전보다 훨씬 빛나기 시작했다. 내 시야는 소환진의 정중앙에서 터져나오는 보라색 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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