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1일차 -------------------------
엘프가 나타났다!
갈색 단발. 백옥같이 흰 피부. 뾰족한 귀. 그건 판타지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미소녀 엘프였고, 엘프는 순금을 박아넣은 듯한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나의 두뇌가 맹렬히 돌아깄고, 갑자기 튀어나온 엘프의 등장 이유를 추측했다.
어려보이고, 나를 보고도 활을 쏘지 않으며, 겁을 먹은 것 같고, 무엇보다 약해보인다.
그리고 도망치려한다. 아마도 어린 엘프가 혼자 숲을 다니다가 나와 마주친 것일 터.
'잡는다.'
살인멸구까지 각오해야했다. 내가 발을 뻗자마자 엘프는 당황해 발을 헛디뎠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졌다.
"꺄아악!"
제법 귀여운 비명과 함께 나뭇가지에서 미끄러진 엘프는 간신히 다리를 가지에 걸어 떨어지는 걸 모면했다. 치마가 내려간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엘프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해 자리에서 뛰었다. 엘프와의 거리는 걸음으로 치면 삼 십 걸음 정도였지만, 나는 빠르게 그 거리를 뛰어 엘프가 올라가기 전에 지척까지 닿았다.
"...!!"
엘프는 나를 보고 급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일단 나뭇가지 위에 올라 나무 위를 뛰어다니며 도망칠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르다.
"라임아!!"
나는 손에 쥔 라임를 엘프를 향해 집어던졌다. 전력을 다해 던진 라임은 농구공처럼 날아가 엘프의 뒷통수를 강하게 쳤다.
철퍼--억!
"까흑…!"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엘프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나뭇가지에서 떨어졌다. 연갈색의 머리칼 뒤에는 녹색의 부정형 물체가 달라붙어있었고, 라임은 엘프를 잡아먹으려는 듯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라임아, 이거 네가 먹을 거 아니다."
나는 라임을 잡아뜯어 내 어깨에 올렸다. 점액질로 찐득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인 귀는 찔릴 것 처럼 뾰족해보였다.
"히, 히익…!"
엘프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떨었다. 자신의 등을 살포시 짓누르는 내 흙발의 무게에 두려움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라임을 쿡쿡 찌르고 엘프를 가리켰다.
"이거 내가 먹을 거다."
쿵!
나는 그 말과 함께 엘프의 뒷목을 내리쳤다. 엘프는 고개를 떨구며 기절했고, 나는 엘프를 반대쪽 어깨에 들쳐메었다.
'혼자있었을까? 아니야. 분명 무언가가 쫓으러 올 거다.'
흔적을 아무리 지우려 해도 나는 목재를 챙기러 나온 것이었지, 엘프를 납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들켜버리고 말았고, 엘프를 놓치면 무조건 엘프 사냥꾼들이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쉽게 죽어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요행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던전으로 튀자.'
흔적을 지우고 엘프와 목재들을 던전 안으로 들고 숨자. 아직 포로는 여유가 있었고, 설령 무언가가 쳐들어오더라도 부하들을 소환할 수만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제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라, 제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엘프를 먼저 동굴속으로 데려가 덩굴줄기로 칭칭 묶은 뒤, 급한대로 통나무들을 던전으로 들고왔다.
"끄하아!"
전신에 땀이 흥건했다. 이미 바지는 너무 심하게 젖고 악취가 심해서 벗어놓은 지 오래다.
던전 내부는 점액질의 시큼한 냄새와 나와 에일라의 샅내로 가득했지만, 이제 거기에 땀내와 나무향기, 그리도 복숭아처럼 달콤한 향기을 내는 엘프 한 명의 냄새로 차오를 것이다.
'환기 시설을 만들던가 해야지.'
그럴려면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다. 나는 통나무 도막들을 한켠에 놓은 뒤,
<건축> 소환 시설 Lv.0을 건설합니다.
# 목재 17 / 10
# 마석 1 / 1
소환 시설을 만들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어떻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는 걸까? 아니면 뭔가 도우미라도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죽이되는 밥이되든 일단 쌀부터 앉혀야 했다. 나는 될테면 되라는 심정으로 버튼을 눌렀다.
<건축> 소환시설 Lv.0을 건설합니다.
# 소환 시설을 설치할 장소를 정해주세요.
# 지정된 재료를 해당 장소에 모아주세요.
시스템은 친절했다. 내 눈앞에는 홀로그램같은 허상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던전 내부에서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터를 확인했다.
'터고 뭐고 애초에 여기서 뭐 어찌할 방법이 없네.'
환기도 안되는 단칸방 원룸에서 무슨 인테리어란 말인가. 나는 벽 구석에 소환 시설의 위치를 잡았다. 침대 두 개는 붙여야할 법한 공간이 임시로 지정되었고, 나는 통나무 도막 10개를 지정된 모양대로 쌓아올렸다.
'이제 마석.'
던전의 주인을 잡고 나온 물건인 만큼 제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마석을 통나무 도막 위에 올렸고, 곧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건축> 소환 시설 Lv.0을 건설하시겠습니까?
# 소진 재료 : 목재 10, 마석 1
# 경과 시간 : 1시간
# 예상 결과 : 소환 시설 Lv.0, ?????
"사람 불안하게 물음표는 뭐야."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요즘 게임들의 국룰은 처음에 한 번 가챠를 뽑을 수 있도록 재화를 주는 시스템이 아닌가. 시설이 만들어지면 분명 마물을 소환하는 아이템이나 가차권이 생길지 모른다.
'그나저나 1시간이라.'
남은 목재는 7개. 나는 다른 건축 시설이 필요한 재료를 확인했다.
<건축> 침실 Lv.0을 건설합니다.
# 목재 0 / 5
<건축> 포로 감옥 Lv.0을 건설합니다.
# 목재 0 / 10
# 철재 0 / 1
"일단 침실 말고는 아무것도 안 되네."
침실이라고 해봐야 고작 나무로 된 평상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저렇게 매끄러운 평상을 만들만한 공법도 도구도 없었다. 나는 그저 시스템에게 감사했고, 시스템은 목재 다섯을 먹어치우고 침대를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침대 제작까지 걸리는 시간도 30분.
나는 그동안 남은 목재 두 개를 손으로 쪼개어 형태를 다듬어나갔다. 그 어떤 공구도 없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통나무를 쪼갤 힘과 손톱이 있었다.
으저적!
나는 남은 목재 2개를 모조리 사용하여, 머릿속에 던전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물건들을 생산했다.
'침입자를 격퇴할 함정.'
내가 쓰던 철퇴는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앞으로 쓰고자 하는 무기는 여기서 만들 수 없다.
그래도 당분간 임시로라도 사용할 무기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나는 손으로 나무를 쪼개어, 그 나무를 다시 손톱으로 갈며 날카롭게 다듬었다.
침입자의 목에 꽂을 날카로운 비수를.
* * *
륜은 그 어느때보다도 긴장했다. 자신이 의식을 잃었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괴물의 손에 납치되어 동굴에 잡힌 뒤였다.
'동화 속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어떻게…!'
끔찍했다. 뭣보다도 등을 보인 채 옷도 입지 않은 녹색의 괴물이 무서웠다. 엘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것도 그렇고, 멀리서 자신을 공격한 것도 그렇고, 뭣보다도 고간에서 덜렁거리던 그-
'야만적이야!'
어떻게 성기를 대놓고 드러내며 다닐 수 있는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염치라는 것이-
-이거 내가 먹을 거다.
륜의 등골에 한기가 타고 흘렀다.
먹는다.
분명 먹는다고 했다.
륜은 아주 살짝 실눈을 뜨고 동굴 안을 살폈다. 정체불명의 마법진이 두 군데 그려져 있고, 괴물은 한 가운데에서 나무 토막을 손으로 쪼개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기다란 나무 꼬챙이였다. 거기서 륜은 확신했다.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거야!'
어린 시절부터 장로와 어른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숲속에 혼자 돌아다니면 녹색 피부의 괴물들이 잡아간다고 하던 말은 단지 잠을 재우기 위한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괴물은 지금 자신이 깨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꼬챙이를 만들고 있는 이상, 분명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일어났군."
"......!!"
륜은 퍼뜩 눈을 감았다. 기절한 척, 의식을 잃은 척. 괴물이 제발 착각을 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벅, 저벅.
남들보다 더 뛰어난 청력 덕분에 괴물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륜은 괴물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깨달았고, 제발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꿈은 애초에 잡혀온 순간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륜의 몸이 번쩍 허공에 들렸다.
"흠, 이게 그 엘프인가."
괴물의 땀내나는 목소리가 륜의 얼굴을 덥혔다. 륜은 축 늘어진 척 하고 있었지만 인상이 살짝 찌푸려진 것은 생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엘프를 먹어보게 될 줄이야, 크흐흐."
괴물은 입맛까지 다시며 륜을 흔들었다.
"깨있는 거 다 안다. 셋 셀 동안 눈 떠. 하나, 둘-"
"사, 살려주세요…."
결국 꼬리를 먼저 내린 쪽은 륜이었다. 륜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괴물에게 애원했다. 차마 얼굴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자, 잡아먹지 말아주세요…."
"크훕."
괴물은 륜의 머리칼을 자상하게 쓸었다. 그 솥뚜껑만한 손은 륜의 머리를 한 번에 움켜쥘 정도였다.
"안 잡아 먹어."
괴물은 륜의 눈가를 엄지로 훔치며 말했다.
"따먹지."
"......?"
륜.
아직은 어린 엘프.
따먹는 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을 알아듣고 경악했다.
"목을 따서 먹을…흐아아아앙!!"
쪼르르.
륜은 공포에 질려 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