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1일차 -------------------------
슬라임 드래곤은 맛있었다.
비록 보관 문제로 인해 두고두고 먹지는 못하더라도, 이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제법 맛있게 먹은 식사였다. 어린 오크 시절부터 마물을 먹기 시작했으니, 슬라임 점액 정도는 그냥 곤약 젤리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남은 슬라임 드래곤의 사체를 이대로 버릴 것인가.
나는 실험을 위해 슬라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먹어라."
도리도리.
부하 슬라임은 포식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 던전의 주인은 이제 나다.
"먹지 않으면 내가 너를 먹겠다."
도리도리.
슬라임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나에게 반기를 드는 걸 포기했다. 슬라임은 꿀렁굴렁기어가 슬라임 드래곤의 꼬리에 닿았다.
으적, 으저적.
슬라임은 던전의 보스였던 슬라임 드래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래곤이라기 보다는 지렁이같은 외형이었지만, 일단 시스템은 드래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 저 드래곤은 과연 레어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인가.
나는 던전의 정보를 꺼냈다.
# # #
<쿰처쿠의 던전>
등급 : E급
위험도 : 0
정원 : 2 / 21
포로 : 1 / 3
옛 슬라임 던전. 던전 전체가 더럽다.
# # #
끝?
끝인가? 나는 기가차서 다른 내용이 더 있는가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의 던전이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오크와 슬라임의 던전이라는 것.
아마도 포르네우스의 던전이면 등급도 화려하고 위험도도 높았을테지만, 이곳은 쿰처쿠-나의 던전이다. 이제부터 하나 둘 씩 늘려나가면 되니 긍정적으로 마음을 가지자.
세력을 불려, 포르네우스의 뺨따구를 치는 그 날을 위해.
적어도 이 던전에는 3성짜리 오크 한 마리와 잠재력은 충만한 슬라임 한 마리, 그리고 아직도 혼절 중인 '포로'가 있지 않은가.
<에일라> 40시간 째 혼절 중.
"얘 탈수 오겠는데?"
나는 슬라임 드래곤의 점액을 한움큼 집어 에일라의 입에 밀어넣었다. 한껏 쥐어짠 덕분에 점성은 그리 끈적하지 않았고, 에일라는 그걸 기절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살아는 있는데 깨우는 방법을 모르겠단 말이야.'
충격이 커서 그런지 이틀 가까이 기절 중이다. 나는 혹시나 에일라가 깨어나 날뛰지 않게끔, 입구에서 가져온 덩쿨 식물의 줄기로 에일라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에일라는 줄기에 의해 미라가 되었다.
"어줍잖게 손목과 발목만 묶었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르지. 그렇지 않냐, 라임아."
슬라임은 뭔 돼지가 꿀꿀거리냐는양 드래곤을 쳐먹고 있었다. 어느새 꼬리는 다 잡아먹고, 슬슬 다리로 추정되는 부위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돼지 새끼.
'혹시나 모르니까 여기는 열어두자.'
나는 에일라의 하체를 감은 줄기를 뜯어낸 뒤, 정강이부터 발목까지만 줄기로 칭칭 휘감았다. 덕분에 다리는 살짝 벌려지기도 했고, 내 손이 허벅지 사이로 유감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써야하는 순간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에일라는 소중한 포로다. 일단 사용처 한 군데는 확실하니, 죽지 않도록 잘 키워야했다. 혹시나 생각이 바뀌면 내 부하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제 제일 급한건....'
# # #
<시설구축> 자재를 확보하여 던전 내의 시설을 건설합니다.
# 침실 Lv.0
# 소환 시설 Lv.0
# 포로 감옥 Lv.0
# # #
"정말 딱 필요한 시설만 있네, 시바."
뭔가 잠겨있는 거라도 보이면 어떤게 있을까 상상이라도 하는데, 아예 딱 세 개만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저 세 시설이 던전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포르네우스 던전 3년은 튜토리얼이었던 셈 치자.'
비록 내가 그 던전의 보스가 아니라 졸병이자 노예 전사였지만,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마냥 시스템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 년의 운영을 따라하는 건 거지같지만 어쩔 수 없다.'
보고 배운게 포르네우스의 던전이니, 당분간 포르네우스의 던전을 답습하는 수밖에. 다행히 포르네우스 년은 사람 보는 눈깔이 썩었지만, 30위의 던전을 운영할 정도로 운영 능력 하나만큼은 우수했다.
일단 노동력이 필요하다. 소환 시설을 만들자.
# # #
<건축> 소환 시설 Lv.0을 건설합니다.
# 목재 0 / 10
# 마석 0 / 1
# # #
"마석?"
목재는 그렇다치고 마석은 어디서 구하란 말인가. 마석은 몬스터를 잡으면 그 심장에 있는 보석이 아닌가. 그럼 내가 내 심장을 뜯어내라는 건가?
어디 마석을 구할 곳이-
으적, 으적.
"야 이 돼지같은 슬라임 새끼야아아!"
나는 슬라임을 움켜쥐고 슬라임 드래곤에게서 떼어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슬라임은 딱 마석이 놓여있는 직전까지 드래곤의 사체를 처먹고 있었고, 악착같이 드래곤의 시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철푸덕!
나는 긴 씨름 끝에 슬라임을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먹이에 눈이 돌아간 슬라임은 바닥에 흩뿌려진 점액질을 청소하고 있었고, 나는 슬라임 드래곤의 심장으로 추정되는 부분에서 아주 작은 마석을 뽑아냈다.
"일단 하나 확보."
크기를 보아하니 중급 정도의 마석인데, 그렇다면 3성이 곧 중급이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딱 맞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나는 그 중에서도 중급 중의 75레벨 오크였다. 중급이라도 상급-4성짜리 25레벨 인간 여기사보다는 강하니 마음의 위안이 생겼다.
"목재는...."
아이콘은 꼭 통나무처럼 생겼는데 이걸로는 안 될까싶어, 나는 에일라의 엉덩이를 휘감았던 줄기를 한군데에 모았다.
목재 0 / 10
마석 1 / 1
"벌목할 시간이네. 야, 라임아, 다 처먹었냐?"
도리도리. 슬라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그 크기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1.5배는 더 커진 것 같았고, 점액질의 색도 점점 짙어졌다.
"흐흐흐. 네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구나."
슬라임이 부하인 이상, 내게는 아주 좋은 확인 방법이 있다. 부하 열람.
# # #
<부하 열람> 쿰처쿠의 던전 내 부하 1 / 20
# 이름없는 슬라임 ★☆☆☆ Lv. 7 / 15
# # #
"라임아? 너 이름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
나는 슬라임을 들어올려 물었다. 슬라임은 고개를 도리질치며 자신에게 부여받은 이름을 완강히 거부했다.
"라임이 싫냐? 그럼 길라임으로 해줘?"
도리도리.
나와 슬라임의 길고 긴 싸움끝에, 결국 슬라임은 <라임>이 되었다.
<라임> ★☆☆☆ Lv. 7 / 15
고작 1성에 레벨은 내 1/10에 불과한 7 정도지만, 라임은 내게 있어 여러가지 실험을 하게 해줄 좋은 부하가 될 것이다.
주물럭.
나는 라임을 양손에 쥐고 조물딱거렸다. 비록 몸은 차가웠지만 만지는 촉감만큼은 에일라의 가슴과 비슷했다. 슬라임에다가 박는 놈들이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그건 나중에 실험해보고, 지금은 목재나 구하러 가야겠지? 그렇지?"
나는 라임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홀로 남겨진 이 동굴에서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를 만난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비록 말은 나 혼자 지껄이고 있지만.
"그럼 목재는...."
나는 에일라의 하반신에서 뜯어난 덩쿨의 줄기를 한 곳으로 모았다. 딱 10가닥인데 꼼수가 통하지 않을까?
목재 0 / 10
마석 1 / 1
역시 불가능했다. 아이콘이 통나무 토막 모양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무를 벌채해서 그루 째 들고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럼 라임아, 가자. 네가 도끼 역할을 대신 해야겠다."
슬라임이 섬유질 분해도 가능해야할텐데. 나는 라임을 조물딱거리며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조디악 왕국 비르고 남작령에는 엘프의 숲이 존재한다.
마법과 정령술에 능숙한 숲의 종족들은 본디 숲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제 영토에서 평화를 추구했지만, 마왕군과 인류 연합의 본격적인 대결이 심화되면서 전쟁이 휘말리게된다.
엘프는 인류의 편을 들었다.
이유는 다른게 아니고, 마왕군이 엘프들의 마을을 습격했기 때문.
선공을 맞은 엘프들은 마왕군의 반대편에 섰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인류 연합의 편에 서지도 않았다.
-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지킬 뿐이다.
엘프의 고위 장로들은 엘프들이 화를 입는 걸 바라지 않았고, 인류 연합은 엘프들의 참전을 바라며 매일같이 특사를 파견했다.
이에 숲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고, 그에 순수하고 어린 엘프들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 숲에 오는 인간들은 착해보이던데 도와주면 안 돼요?
그들은 아직 인간과 전쟁의 추악함을 알지 못했다. 그저 '안된다'는 말만 반복하는 장로들의 말에 싫증만 낼 뿐.
"하여튼 장로님들은 이해가 안 돼. 그치?"
연갈색 머리칼의 작은 엘프, 륜이 바람의 정령과 손장난을 치며 장로의 뒷담화를 했다. 그들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숲을 거닐었고, 거칠고 흉흉한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실프...!"
륜은 조막만한 활을 잡았다. 차기 사냥꾼으로 손꼽히는 유망주로 소문난 륜은 어린 엘프임에도 활과 정령을 다루는 실력이 출중했다.
스윽, 스윽.
무언가가 숲을 훼손하고 있다. 륜은 나뭇가지를 뛰어다니며 무언가에 접근했다.
푸후으, 푸흐.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갔다. 그리고 나무가 넘어진 곳에는 녹색의 괴물이 알몸으로 육수를 뻘뻘 흘리며 나무를 토막내고 있었다.
" "
아직 어린 륜은, 녹색의 괴물의 뱃살 아래에 덜렁거리는 무언가를 보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콰득.
륜은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았고, 괴물은 륜을 눈치챘다.
쿠흐흡.
괴물은 륜을 보고 분명히 웃고있었다.
============================ 작품 후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