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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10화 (10/800)

000101일차 -------------------------

던전물이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던전물 시스템의 세계에 떨어진 비만 오크라니.

"던전 주인으로 활약해야하는 세상에서 노예 전사로 살고 있었으니 시스템 안 나올만도 하네."

조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으면 진작에 탈주했을텐데. 나는 저승사자를 향해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낸 뒤, 시스템의 마커가 가리키는 화살표로 손을 뻗었다.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그 절벽에 우거진 수풀. 나는 그 수풀을 헤치고 덩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에일라야, 보이냐. 이게 우리 새 집이다."

두껍게 우거진 담쟁이 덩굴을 좌우로 찢고 나서야 입구가 열렸고, 나는 혼절 중인 에일라를 데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철퍽.

던전 안에는 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입구에서부터 눈치챘지만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음습한 기운만이 내 코를 찔렀다. 미묘하게 시큼한 냄새. 에일라는 지리지 않았고 나도 지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이 시큼한 냄새는 마물의 것이었다.

콰득!

나는 발치에서 기어오는 슬라임을 짓밟았다.

[슬라임] ★

누가 슬라임 아니랄까봐 고작 별이 하나밖에 없다. 죽인 대상의 정보가 고작 이름과 별밖에 보이지 않는 건 슬펐지만, 그래도 상대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었다.

콰득. 콰득.

슬라임(★☆)과 슬라임(★★)이 터졌다. 점점 가면 갈수록 미묘하게 강해지는게, 나는 이름 옆에 달린 별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세계도 운빨좆망이네, 이거."

나, 파후우 쿰처쿠는 현재는 3성이지만 5성까지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존재였다. 아직까지 그 방법은 모르지만 4성이나 5성으로 진화하면 이 지긋지긋한 뱃살도 빠지지않을까?

"그리고 이건 4성이고."

입구에서 뜯어낸 억센 줄기로 내 등에 묶인 에일라는 무려 별이 네 개나 되는 존재였다. 보통 4성 이상은 상당한 레어이니, 에일라가 성장을 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전투력을 가질 것이다.

"근데 나한테 발렸지."

그야말로 쪽도 못쓰고 발렸다. 나는 슬라임들을 터뜨리며 그 미묘한 힘의 차이를 깨닫고, 마지막 살아남은 슬라임 하나를 손에 들어올렸다.

[슬라임] ★☆☆☆

"1성으로 태어났어도 4성까지 성장할 수 있는 거네. 에일라야, 얘가 나중에 너랑 똑같은 등급이 된다."

슬라임은 내 손에 들려 오도방정을 떨고 있었다. 내가 손만 살짝 쥐면 슬라임은 터질 것이고, 미래에 4성이 되어 동굴의 주인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이 불쌍한 녹색 슬라임은 지금 젤리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고보니 슬라임 맛있었지."

움찔.

슬라임이 행동을 멈췄다. 내 말을 알아듣는게 분명했다. 나는 내가 아까 터트린 슬라임(★★)의 점액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살짝 혀로 맛보았다.

"음...."

길가에서 파는 싸구려 젤리 느낌이지만, 그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나는 비교를 위해 벌벌 떨고 있는 슬라임의 옆에 있는 점액-★☆☆이었던 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웩."

식감은 좋지만 맛이 개판이었다. 나는 혀에 들어온 점액을 침째로 바닥에 뱉었고, 동굴의 벽에 점액을 슥슥 문질렀다.

"이거 혹시...?"

맛과 식감이 무엇에 대응되는지 깨달았다. 나는 꿀렁거리며 도망치려던 슬라임을 잡아 내 눈앞에 들어올렸다.

"키워서 잡아먹어?"

도리도리.

슬라임의 점액이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슬라임의 표피를 살짝 꼬집었다.

뿌직.

슬라임은 아주 약간의 점액질이 빠져나왔음에도 경기를 일으키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않고 슬라임의 점액을 맛봤다.

"음...."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식감은 몹시 좋았다. 조리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우수한 식재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슬라임은 쪄서 먹는게 맛있을까, 아니면 구워서 먹는게 맛있을까."

찜솥이나 프라이팬을 만들면 조금 더 다양하게 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순간, 내 눈앞을 가리는 시스템 안내창이 나타났다.

<복종> [슬라임](★☆☆☆)이 생명을 구걸합니다.

무자비한 포식자에게 뜯어먹힐 바에는 차라리 포식자의 장난감으로라도 생명을 이어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호."

나는 슬라임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슬라임은 미동도 없었고, 내게 일절 반항하지 않았다.

"내 부하가 되겠다고?"

끄덕끄덕.

슬라임 내부의 점액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4성으로 성장할 수 있는 슬라임을 그냥 죽이기는 조금 아쉬웠다.

"그럼 오늘부터 넌 내 부하다."

<영입> [슬라임](★☆☆☆)을 부하로 영입했습니다.

신난다! 슬라임이 부하가 되었다! 나는 슬라임을 한손에 들고 주물거리며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동에는 다른 슬라임들로 바글바글했고, 나는 남아있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2성인데 4성까지 성장가능한 놈이 있지 않을까...?"

나는 부하가 된 슬라임을 주물거리며, 다른 슬라임들을 하나 둘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죽고 나서야 확인이 가능하지만, 눈치 좋은 놈이라면 이 놈처럼 내게 목숨을 구걸하며 부하가 되기를 바라는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는 있겠지."

설마 얘보다 똑똑하고 재능있는 애가 하나도 없겠어. 나는 수십에 이르는 슬라임들을 모조리 밟고 터뜨리며 던전 내부를 청소했다.

없었다.

* * *

약 1시간.

나는 던전 내의 모든 슬라임들을 보이는 족족 터뜨렸고, 그것을 한군데에 모아 쌓아뒀다. 이게 만약 진짜 나의 던전이라고 한다면, 던전의 법칙에 의해 슬라임의 시체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일단 보이는 모든 놈들은 다 터뜨렸는데."

철푸덕.

나는 부하가 된 슬라임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슬라임은 오들오들 떨며 내 눈치를 봤고, 나는 슬라임의 앞에 쪼그려앉아 손가락으로 탱글탱글한 피부를 쿡쿡 찔렀다.

"야. 아무래도 너 죽여야 이 던전 내게 되는 것 같은데?"

<퀘스트> 슬라임 던전 토벌 (69 / 70)

# 전체 토벌 시 던전 지배권 획득

"야, 이거 보이냐? 딱 한 마리 남았는데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다."

동굴을 입구부터 최심부까지 세 바퀴를 돌았는데도 나타나질 않는다. 적어도 2km 정도는 왕복한 것 같은데 한 마리가 없다. 마지막 바퀴는 아주 천천히 걸으며 샅샅히 찾았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시스템 에러겠지? 내가 너를 잡고 던전 주인이 되는 그런 상황이겠지?"

도리도리. 부하가 된 이후 슬라임은 제 몸까지 흔들며 확실히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살아있는 슬라임은 이제 딱 한 마리 뿐이지 않은가.

뚝.

내 어깨에 끈적한 침이 떨어졌다.

"아이씨...."

나는 어깨를 털어냈다. 에일라는 혼절 중이면서도 무슨 침을 이리도 많이 흘리는 걸까. 그러니까 아래에도 물이 많지.

뚜둑, 뚝.

나는 다시 어깨에 떨어지는 침을 닦아냈다. 영 찝찝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리 이세계라도 인간의 침이 이정도로 점성이 강할리는 없다.

"쓰벌."

철퍽!

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천장에는 다른 슬라임들보다 몇 배는 훨씬 더 거대한 슬라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슬라임 드래곤] ★★★

# 보스

# 던전 주인

"슬라임이 무슨 드래곤이야?"

꿈틀, 꿈틀.

내 어깨에 침을 뱉고 간 양아치 슬라임은 심처의 공동으로 들어갔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슬라임을 주워 공동으로 따라 들어갔고, 공동에는 길이가 4m는 훨씬 넘어보이는 거대 슬라임이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저게 너네 대장이냐?"

끄덕끄덕.

슬라임은 고개를 끄덕였고, 슬라임 드래곤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나를 위협했다. 점액이 후두둑 튀어나와 내 몸에 한가득 묻었다.

"에이, 더럽게."

나는 내 몸에 묻은 점액질을 털어냈다. 애초에 맞는 옷이 마땅치않아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게 한계였지만, 그래도 몸과 옷에 더러운 점액질이 묻으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꾸르륵?!

슬라임 드래곤은 당황한듯 내게 점액을 한가득 토해냈다. 나는 전신을 뒤덮은 녹색의 점액질로 샤워했고, 에일라와 슬라임 또한 점액으로 끈적끈적해졌다.

못 참겠다. 굴복이고 뭐고, 일단 죽이고 보자. 마침 슬라임 드래곤은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채 나를 통째로 삼키려 들었다.

"넌 좀 맞자."

나는 주먹을 들어올려 슬라임 드래곤의 아가리를 향해 밀어넣었다. 끈적하고 시큼한 체액이 안에서 묻어나왔지만, 이미 그걸로 샤워를 한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쯔어어억.

나는 슬라임 드래곤의 입안에서 점액질을 뜯어냈다. 슬라임 드래곤은 그제서야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지만, 나는 슬라임 드래곤의 아래턱을 짓밟았다.

"3성이니 맛은 있겠지?"

식량을 확보할 때다.

나는 슬라임 드래곤이 껍질만 남을 때 까지 점액을 전부 뜯어냈고, 던전을 클리어했다.

<제압> 슬라임 던전을 제압하였습니다!

# 새로운 던전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어."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예."

<시스템> 슬라임 던전이 [파후우 쿰처쿠]님의 던전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던전 정보'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 '부하 목록'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시설 구축'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부하 소환'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아니 여기서 가챠가?"

별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구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부하 소환>을 눌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의> 소환 시설이 없습니다.

"아, 이런."

어느 정도 기반을 닦으라는 말이구나. 나는 에일라를 묶은 줄기를 풀어낸 뒤, 일단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일단 먹고 시작하자."

오늘의 미스터리.

슬라임 드래곤에게서 뜯어낸 점액은 신포도 맛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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