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던전의 노예 오크 -------------------------
"형제여, 반란을 일으키세. 내가 형제의 망치가 되겠네."
"일단 킵.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한데 일단 할 수 있는 방법부터 해보자."
아직 하루의 시간이 남아있다. 잠을 자지 않는다면 내게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형제여, 상대는 고귀하기로 소문난 인간 여기사다. 고문에도 입하나 열지않던 자를 어찌 입을 열게 한다는 말인가?"
트랄의 말대로 여기사는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 이 세계 기사 특유의 스펙 덕분인지, 내게는 머리가 깨졌으면서 약한 고블린이나 마족들의 고문은 악착같이 견뎌내는 것이다.
"모르지. 일단 해봐야 알 거 아니냐."
"그렇군. 그렇다면 어찌 입을 열게 할텐가? 과연 그 인간 여기사가 동족을 배반하는 짓을 할까?"
"당연하지. 인간이 다 너같은 줄 아냐."
모든 인간이 트랄같았으면 마왕 솔로몬은 진작에 공략당했을 것이고, 우리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고문 강도가 약해서 그래. 어디 팔 다리 분지르고 나면 아파서 입을 열 거다."
"손톱을 전부 뽑아버렸는데도 눈도 깜짝 안 하더군."
"......."
원시적인 고문방법이라 그런 거다. 나는 영화에서나 봤던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나는 몇몇 인간이 살아남은 감옥을 찾았고, 포르네우스에게 맷돼지 구이를 진상하고 살아남은 트랄은 쫄래쫄래 나를 따라왔다.
"읍."
역한 피냄새가 코를 찌른다. 감옥안에 갇힌 인간 여기사는 전신에 피멍이 든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던전의 입구에서만 하더라도 찬란하게 빛나던 금발은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 엉켜있었다.
"무슨 일이냐."
스켈레톤 간수가 내 앞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에게 포르네우스가 내린 명령을 알렸다.
"쯧, 불쌍한 녀석. 들어가라."
포르네우스가 따로 언질은 내리지 않았어도 나에 대한 소문은 군단 내의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사를 사로잡은 장본인이기도 하니, 내 이름과 성은 제법 널리 알려졌다.
"하루뿐인 명예지만."
"형제여, 희망을 잃지 마시게. 그 명예가 앞으로 있을 형제의 뜨거운 미래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으니. 원래 영웅의 어린 시절은 고단하고 힘들다고 하지 않은가. 자, 우리 한 번 붉은 늑대의 일대기를-"
"시끄럽고, 내가 부탁한 물건이나 꺼내봐."
"여기있네."
트랄은 인간들의 짐에서 찾은 서책 한 권을 내게 건넸다. 종이의 재질은 구질구질했고 안의 내용은 별 시덥잖은 관능소설이었지만, 내게는 종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절그럭.
나는 여기사에게 다가갔다. 이름도 모를 그녀는 벽에 X자로 구속되어 있었고, 고개는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갑옷은 이미 진작에 벗겨져, 죄수들이나 입는 갈색 거적데기를 두르고 있었다.
"열쇠."
"여기있다."
나는 간수에게서 열쇠를 받아 입마개를 풀었다. 산발이 된 앞머리 사이로 흉흉한 푸른 눈빛이 비쳤고, 여기사는 고개를 비틀며 내 목덜미를 물었다.
나는 입마개를 내 허리춤에 끼운 뒤, 여기사의 턱을 들어올렸다.
"역시 깨어있었군."
"크으윽!!"
여기사는 이를 세워 내 목을 씹어 뜯으려했다. 하지만 내 피부가 워낙 질기기도 했고, 고문에 의해 힘이 다한 여기사의 반격은 그저 작은 앙탈에 불과했다.
"이름이 뭐지?"
"퉤!"
여기사는 내 얼굴에 피와 가래가 섞인 침을 뱉었다.
부웅-!
트랄이 여기사의 얼굴 옆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워낙에 빠른 탓에 나도 놀랐지만, 여기사는 볼을 스친 트랄의 주먹에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트랄."
"형제여. 인간 따위가 어찌 이런 모욕을...!"
트랄은 내가 침을 맞았다는 것에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것마냥 분노했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여기사는 트랄의 주먹에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
찌르르.
누런 액체가 여기사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트랄의 주먹질 한 방에 지려버린 것이다. 시큼한 찌른내가 피냄새와 함께 코를 찔렀다.
"쯧. 이름은?"
"......."
"형제가 묻지 않았나, 인간. 이름을 말하라."
트랄이 주먹을 들어올리며 협박했다. 여기사는 나와 트랄의 눈치를 보며 피로 마른 입술을 떼어냈다.
"에, 에일라."
"형제여, 이 인간의 이름은 에 에일라인 것 같다."
"'에일라'다."
트랄의 오해를 내가 정정했고, 여기사-에일라는 내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그럼 슬슬 정보를 알아내보도록 할까. 에일라, 너는 어디에서 온 기사지?"
"...말할 것 같으냐?"
에일라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오줌을 지렸음에도 트랄의 주먹은 여전히 무서운지, 내게 침을 뱉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 뿐이었다.
"...죽여라."
"......."
설마 여기서 이 대사를 듣게 될 줄이야. 나는 머리가 띵해졌고, 트랄은 격분했다.
"인간! 패배했다면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해라!"
"닥쳐라. 내가 비록 패배했을 지언정...."
에일라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마음만은 꺾이지 않는다!"
"여기사는 완고하기로 소문났다더니, 역시 그런건가."
나는 코웃음이 나왔지만 트랄은 그런 내 웃음에 답답해하며 가슴을 쳤다.
"형제여! 형제가 이 여자에게서 정보를 얻지 못하면 형제는 죽는 목숨이다!"
"너는 나를 도와주려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냐? 그걸 얘 앞에서 말하면 어떻게 해?"
나는 트랄에게 핀잔을 줬고, 트랄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뒷걸음질 쳤다.
"혀, 형제여.... 오해다. 나, 나는 절대로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흥, 잘 됐구나. 내가 입 닥치고 있으면 이 돼지는 죽은 목숨이라는 거지?"
에일라는 트랄을 향해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씩 들어올렸다.
"좋네. 저승길 동무로 오크 한 마리라도 끌고가다니. 이제 여한이 없어. 죽여라."
"......!"
트랄은 손을 벌벌 떨더니, 갑자기 감옥에서 도망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고, 에일라는 나를 향해 빈정거렸다.
"어쩌나? 내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을 거다. 후후."
"말투는 일부러 강한 척 하는 것 같은데."
흠칫. 벽에 구속된 에일라의 손이 움찔거렸다. 나는 책을 찢어 물에 적신 뒤, 에일라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음, 이런 얼굴이군. 예뻐."
"이, 이런 미친."
오크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당황스러운 건지 에일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나, 나는 기사다! 오크 따위에게 예쁘다고 들어봐야 기쁠 것 같나! 어림없는 소리!"
"얼굴도 반반하고 몸도 좋군.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아주 잘 낳겠어."
나는 거적데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들어올렸다. 배에는 채찍 자국이 가득했고 곳곳에 멍이 들어있었지만, 단련한 복근 위에 봉긋하게 자리잡은 가슴은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네 이놈! 내게 수치를 줄 셈이냐!"
"그럼? 그만두면 정보라도 내놓을 거냐?"
에일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나는 에일라의 몸에 묻은 피를 물을 적신 종이로 다 닦아낸 뒤, 손목과 발목에 있는 족쇄를 풀었다.
절그럭.
열쇠로 손목이 풀리자마자, 에일라는 망설이지 않고 내 목을 움켜쥐었다. 아주 미미한 마력까지 실어 내 목을 졸랐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어, 어떻게...?!"
"잊었냐? 내가 너를 기절시켰던 걸. 겨우 그 정도의 힘으로 나를 죽일 수는 없다."
"이, 이런 바보같은...! 성체도 아닌 오크가 어떻게...!"
에일라는 내 강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3년 동안 열심히 트레이닝을 반복한 결과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나보다 트랄이 더 강해져서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 트레이닝의 결과를 다르게 보여줄 때가 왔다. 나는 에일라의 구속을 전부 해제한 뒤, 에일라의 배를 오른쪽 어깨 위에 놓고 번쩍 들어올렸다.
"자, 잠깐?!"
에일라는 내 어깨에 들려 몸을 아둥바둥 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손으로 휘감아 감옥을 빠져나왔다.
"무슨 일이냐."
"포르네우스 님에게 허락을 받았다. 감옥은 이 인간에게서 정보를 캐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야."
"그런가.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 던전을 도망칠 수는 없을테니."
스켈레톤은 별다른 생각없었다. 나는 스켈레톤에게 인사한 뒤, 에일라를 데리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에일라의 저항은 점차 잦아들었다.
"......."
"......."
나와 에일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에일라를 들고 던전 내에 몰래 마련해 둔 비밀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점점 입구에 가까이 갈 수록, 에일라는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
"어린 오크여, 그건?"
입구를 지키던 가고일이 나를 경계했고, 나는 스켈레톤 간수에게 했던 설명을 반복하고 뒷말을 덧붙였다.
"인간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문을."
"음.... 좋겠지. 어차피 이 근방은 모두 우리의 영역이니. 그대는 우리 대신 던전을 지킨 수호자. 경의를 표하지."
가고일 간수는 아무 의심없이 문을 열어줬고, 나는 에일라를 데리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에일라의 몸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나는 트랄과 둘이서 숲속 사냥을 다니며 만들었던 통나무 움막에 들어왔다.
털썩.
나는 침대 위에 에일라를 내려놓았다. 에일라는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도지...? 이런 다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아니,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허리에 끼워넣었던 입마개를 꺼내 에일라의 입을 막았다.
"읍?!"
에일라는 반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동물의 털가죽이 깔린 간이 침대 위에 에일라를 눕힌 뒤, 에일라의 위에 올라탔다.
"어차피 너한테서 정보 알아가봤자 쓸모없는 정보라면서 나를 죽일 것 같거든. 갈 때 가더라도 한 번은 하고 가야하지 않겠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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