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던전의 노예 오크 -------------------------
"부히익!"
돼지멱따는 소리가 울리며 오크 하나가 쓰러진다. 나였고, 내 목소리였다. 나는 배에 강력한 타격을 받고 쓰러졌다.
"......음!"
우리의 부족장, 스톰블레이드는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족장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곧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단하구나, 파오후!"
"이름 부르지 마쇼."
"어찌 신성한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파오후, 너는 이제 어린 오크가 아니다! 나의 형제라고 할 수 있지!"
부족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일으켜세웠다. 나는 뒤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부족장을 '내려다'봤다.
"형제의 육체에 내린 저주만 아니었다면 형제는 우리 부족 최고의 전사가 되었을 거다."
"트랄은?"
"......그 놈은 이제 던전 내 최강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트랄 스톰블래스트.
나의 요람 동기 오크이자, 내 운동법을 함께 했다가 진짜로 오크 수준을 뛰어넘어 강해져버린 존재. 부족장의 말에 따르면 성인식 이후 홀로 부족을 만들어 이끌어도 된다고 할 정도였다.
어쩌면 솔로몬의 눈독에 들어 본인의 던전을 받을 지도 모를만큼, 트랄은 강해져버렸다.
"형제여. 행여나 트랄의 도움으로 포르네우스 님을 상대하려 들지 마시게. 그랬다가는 형제와 트랄 뿐만 아니라, 우리 부족 모두가 몰살당할테니."
"트랄은 그 년 못 이깁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하는 말이야. 한낱 오크가 마족을 쓰러뜨리면 어찌되겠나?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고, 한 20년은 지나야겠지만."
"20년 뒤든 지금이든 말석만 차지해도 다른 마족들이 좋다고 달려들겠죠? 트랄은 노예가 되고 우리는 몰살당하고."
안봐도 비디오다. 트랄이 포르네우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모를까, 다른 군단장들은 고작 오크 따위가 고위 귀족들만 하사받는 던전을 차지하는 것은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아쉽군. 트랄의 진면목을 아무도 모른다는게."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젠가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때를 기다리자고 한 건 부족장 님 아니요."
"오오, 방금 그 표현은 무엇이냐! 형제여, 대단한 표현일세! 우리 부족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도록하지!"
"......부족장."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 성인식까지 이제 사흘 남았는데."
"......방법을 찾아보세."
포르네우스 년이 방문하기까지 앞으로 사흘 남았다.
내 목숨도 사흘 남았다.
나는 성인식을 하기 사흘 전에 부족장을 처음으로 쓰러뜨렸고, 부족장은 언제든지 내가 성인식을 마치자마자 도망칠 수 있는 '명예'를 주었다.
그렇다.
나는 1년 반동안 뱃살을 빼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더욱 근육만 붙어 헤비급 레슬러의 체구가 되었다.
마크 HEN리같은 몸으로.
* * *
"형제여. 도망치세."
이 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트랄과 함께 던전 근처에서 사냥한 맷돼지의 내장을 제거하다 코웃음이 나왔다.
"지랄한다."
"농담이 아닐세. 형제여. 형제는 그런 폭군에게 살해당하기 너무나도 안타까운 존재라네. 당장 이것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트랄은 내가 내장을 제거한 맷돼지 고기를 가리켰다. 암염을 으깨어 처바른 염장 구이는 트랄이 없어서 못먹는 별미였다.
치지직. 고기는 장작불 위에서 직화로 구워지고 있었다. 트랄은 맨손으로 맷돼지의 다리뼈를 집어들며 내게 물었다.
"형제여, 이것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아, 그것은 바베큐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사흘 뒤면 먹지 못하게 되는 요리 방법이지."
포르네우스 년만 생각하면 빡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트랄은 이런 내 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있었고, 우리 둘은 맷돼지 고기를 뜯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 형제여, 도망치세."
"지랄. 도망'치'세? 너 나랑 같이 튀겠다는 거냐, 지금?"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트랄은 각오를 다진 얼굴로 자신의 반신이나 다름없는 해머, 스톰블래스트를 움켜쥐었다. 나는 살점이 다 떨어진 뼈다귀를 트랄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거지같은 말 하지 말고 너는 네 앞길이나 잘 생각해. 오크 사회에서 성인식 안 받고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냐?"
"......전쟁의 신께서 숨을 거두어 가시겠지."
오크에게 성인식은 한 명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내게는 한 구의 시체가 되는 운명의 장이었으나, 트랄은 다르다.
"그래. 너 임마, 너 부족에서 너보고 전쟁의 신이 현현했다고 할 정도로 강해진 놈이다. 응? 그런 놈이 나같은 놈 때문에 모든 명예를 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지겠다면 내가 '아이고 제발 버려주십시오!'하고 기뻐하겠냐?"
"형제라면."
"......시발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네."
막상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면 애걸복걸하지 않을까 싶다. 트랄의 명예고 나발이고 내가 일단 살고봐야하지 않겠는가.
"야. 진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너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냐?"
"형제가 바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포르네우스의 모가지를 따오지."
"......일단 그건 보류. 그럼 다음 질문. 너 도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냐?"
"허."
처음으로 트랄이 나를 비웃었다. 나는 울컥했지만, 트랄은 나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형제여, 그것을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궁금하니까 그렇지."
"...음, 간단하다."
트랄은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씩 웃었다.
"우리는 비록 같은 피를 잇지 않았으나, 나는 형제를 진짜 형제로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넌 아무래도 세계관을 잘못 타고난 것 같은데."
스펙이나 성격이나 대족장 자리 물려받게 생긴 놈이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이 고생이라니. 나는 트랄이 안쓰러워졌지만, 동시에 나도 안쓰러워졌다.
"어디 오크 왕국이라도 세워볼까."
"......힘들지 않겠는가?"
"그냥 해본 소리다. 왕국이라니. 그렇게 힘든 걸 어떻게 하겠어? 일단 내가 살고봐야지."
결국 다시 포르네우스 문제로 돌아갔다. 이 사흘 내로 묘수를 생각해내지 못하면 나는 포르네우스에게 파/오/후가 될 것이다.
"배를 그냥 칼로 잘라버릴까?"
"형제여, 그건 형제가 이미 예전에 시행했다가 실패한 것이 아닌가."
"그랬지. 젠장."
이 놈의 배때기는 뭐가 그리도 단단한지, 내 힘으로는 칼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축 처진 아랫배에 가려 보이지는 않겠지만, 내 배에는 아주 미약한 칼자국이 나있었다. 내가 한 짓이었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내 스스로의 배를 가를 힘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부족 최강의 사내라면 다르지 않을까?
"트랄, 혹시-"
"혹시나 내게 형제의 배를 가르라는 말을 하려거든 하지 말게. 나는 형제에게 위해를 끼치는 짓은 할 수 없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트랄이나 부족장이 전력으로 내 배를 잘라내는 것이지만, 둘은 한사코 내 배를 건드리기를 포기했다. 배를 아끼려다 목이 달아나게 생겼지만, 일단 둘은 포기하지 않았다.
"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누구냐, 응?"
"파오후 쿰처쿠."
"아니, 이름 말고! 그냥 하는 말이다! 어? 내가 겨우 3년밖에 못 살았는데, 그딴 또라이한테 죽어야겠냐? 절대 안 죽지!"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트랄의 질문에 나는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포르네우스가 쉽게 죽이지 못하게 전공을 세우는 거지."
"전공이라고 함은.... 형제여, 설마 대요격에 자원할 생각인가? 무리일세!"
트랄은 깜짝 놀라며 나를 걱정했지만, 내게 남은 수단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무리라도 해야지. 그냥 모험가들을 상대로 소꿉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인류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그 전공으로 목숨을 사는 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영웅이라면 포르네우스도 몸매가 더럽다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부족장은 이미 내 제안을 승낙했다.
"나는 내일 인간들의 침입을 요격하러 나간다. 트랄."
"형제여...."
트랄은 나를 걱정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나도 형제와 전장에 가겠네! 형제를 두고 어찌 홀로 살아남아 성인식을 하겠는가!"
"야. 네가 날뛰면 내가 전공을 못 세워 등신아."
"그, 그래도 도와주는 정도는...."
"지난 번에 멍청한 고블린 무리가 들어왔을 때 어떻게 됐는지 잊었냐? 내가 세 명 써는 동안 너는 열 마리 정도 썰고 있더라? 내일도 그렇게 되면 그럼 다들 누구한테 주목하겠냐?"
트랄은 더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산새가 울리는 조용한 숲속, 우리는 맷돼지를 뜯어먹고 흔적을 치운 다음, 던전으로 돌아갔다.
"형제여."
"왜."
"나는 형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형제의 편을 들겠네."
"말이라도 고맙네."
트랄은 더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나는 그의 말을 더는 듣지 못했다.
"이 늦은 시각에 둘이서 어디를 다녀왔을까? 오호호!"
썅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