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여대에 입학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71화 (71/79)

〈 71화 〉 아이스크림

* * *

걸음을 멈추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하던가.

성유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고민했다.

‘이대로 전력질주로 도망칠까?’

아니면 다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방금 내가 인사를 나눈 경비 아저씨가 저 안에 있다.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드르르르륵­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내가 나온 문이 닫혀버렸다.

‘이런.’

이런 고급 빌딩은 보통 나올 땐 마음대로지만 들어갈 땐 아니다.

비밀번호를 치거나 카드키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거든.

“왜, 하늘아. 도망치려고?”

성유진이 씩 웃었다.

구릿빛 피부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성유진은 치아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큰 편이다.

입도 그렇고.

솔직히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짓을 빼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꽤 예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한테 했던 짓을 빼고 볼 수가 있냐고.’

종종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는 한다.

­그 사람은 이것만 빼면 정말 좋은데….

­술만 안 마시면 천사인데….

­씀씀이가 헤픈 것만 빼면 좋은 사람인데….

하지만 그 ‘ㅇㅇ만 빼면’의 ‘ㅇㅇ’가 보통 아주 큰 문제인 경우가 많다.

‘맨 처음, 이 세계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된 녀석.’

거의 여자들밖에 없던 지하철에 낑겨 있을 때, 내 바지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던 녀석.

그 이후로 나를 틈날 때마다 괴롭히고…. 날…. 응?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는 성유진이 나와 직접적인 성관계를 맺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으로 날 희롱한 여자였지만, 그러면서도 날 아직 따먹지 않은 녀석.

‘아직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암튼.’

내가 그런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성유진은 재미있다는 듯 날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 뒤에 나온 말에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 * *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누나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하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는데.

나는 어느새 성유진과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성유진이 일방적으로 내 손을 잡은 거지만.

‘왜 이렇게 부드러워…?’

성유진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내 자지를 만질 때도 이렇게 부드러웠던가?

그런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뭐, 당장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이렇게 벌건 대낮에, 사람 많은 대로변으로 가고 있다. 진짜로 아이스크림만 먹자는 건가?

‘방심하지 말자.’

이러다가 언제 또 골목으로 끌려갈지 모른다.

“어, 저기 봐 봐. 되게 귀엽다.”

“완전 내 스타일인데?”

“번호 따 볼까?”

“옆에 손 잡고 있는 애 있잖아.”

“여자친구인 거 같기도 하고.”

“어색해하는 거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사람 많은 곳을 걷자 지나가는 여자들마다 나를 쳐다봤다.

물론 지금까지 등교를 해 오면서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에는 익숙해지긴 했다.

힐끔힐끔 훔쳐 보는 사람부터, 진짜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인간들을 겪어 왔다.

하지만 여자애와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시선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쭈뼛거리며 성유진 쪽을 흘긋 보자, 성유진은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를 돌려 날 마주보았다.

씨익.

‘이 녀석…. 즐기고 있어…!’

난 뻘쭘해 죽겠는데!

‘편의점이나 빨리 도착했으면….’

다행히 한적한 길목으로 들어서자 저 앞쪽에 바로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

딸랑.

“어스쇼.”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에서 왠지 익숙한 인사가 들려 왔다.

“어?”

시종일관 무표정.

아주 살짝 게슴츠레 떠서 쌍꺼풀이 진하게 드러나는 눈.

화장기는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부드러운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편의점 누나?’

예전, 편의점 뒷골목에서 양아치들에게 따먹혔을 때 나를 발견하고 꼬옥 안아 주었던 그 누나였다.

그때 받았던 따뜻하게 데워진 레릿비 밀크 라떼의 맛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근데 거긴 우리 집 근처였는데?’

왜 여기에도 누나가 있는 거지?

혹시 쌍둥이?

“어. 오랜만이네요. 요즘 편의점 잘 안 오시던데. 시간대가 안 맞나?”

는 아닌 것 같고.

“누나 여기서도 일 하세요?”

그 말에 알바 누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편의점을 좀 여러 군데를 하시거든요. 오늘 갑자기 이 시간대 알바가 사정이 생겼다고 해서, 땜빵 하는 거예요.”

“아하.”

어쩐지.

그럼 집 근처 편의점도 알바 누나 아버지가 하는 곳이었나?

‘그래서 시간도 안 지난 폐기를 막 주시고 그랬구나.’

아버지가 점장이면 두려울 게 없긴 하겠다.

‘알바 누나는 여전히 예쁘시네.’

이 세계가 변하기 전에도 남자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던 누나였으니.

평소엔 무표정이지만, 웃을 때는 더 예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알바 누나의 시선이 내 손을 타고 성유진에게 옮겨 갔다.

“옆엔 누구예요? 여자친구?”

“아, 아뇨. 대학교 동기예요. 얘가 아이스크림 사 준다고 해서….”

“안녕하세요. 하늘이랑 아는 사이신가 봐요.”

성유진은 밝게 웃으며 알바 누나에게 인사했다.

“아, 네. 저희 편의점 단골이라.”

알바 누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하늘아, 넌 뭐 먹을래?”

성유진은 내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코너 쪽으로 끌었다.

“나? 글쎄….”

“내가 살 테니까 비싼 거 먹어도 돼.”

“어, 진짜?”

“상겐다즈만 빼고.”

“앗.”

편의점에서 가장 비싸다는, 가성비 최하 아이스크림 상겐다즈.

“그럼…. 난 이거.”

나는 바닐라맛 나이스콘을 꺼내 들었고.

성유진은 같은 아이스크림 딸기맛을 골랐다.

“나 얼음컵 음료수도 하나 살 건데, 하늘이 너도 마실래?”

“응? 아니, 난 이걸로 괜찮아.”

“그래? 그럼 뭐.”

성유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이스크림과 얼음컵, 그리고 얼음컵에 부어 마시는 청포도 에이드 팩을 계산했다.

그리고 편의점 내 좌석으로 가져와 앉았다.

“바, 반대쪽에 앉으면 안 돼?”

“싫은데.”

내가 4인 테이블의 구석 자리에 앉자, 성유진은 반대편에 앉는 대신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으음! 역시 아이스크림은 딸기맛이지.”

어느새 얼음컵에 음료수를 부어 놓은 성유진은 아이스크림을 까서 베어 물었다.

“바닐라가 근본인데….”

나는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콘 윗부분에 있는 초코칩과 함께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기운이 혀 안에 퍼져 나갔다.

“바닐라가 근본이라니. 딸기맛이 진짠데. 아니면 비교해 볼래?”

성유진은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슬쩍 내밀었다.

“…그, 그럴까.”

딱히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진 않으니.

나는 최대한 성유진의 입이 닿지 않은 곳을 베어 물려고 했다.

슥­

“……?”

내가 베어물려는 순간 성유진이 아이스크림을 뒤로 쓱 뺐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윗부분을 베어물더니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왔다.

“이거 어거.”

성유진이 입을 벌리자 살짝 녹은 딸기맛 아이스크림이 보였다.

“너, 너…!”

나는 기겁을 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어쩐지 가만히 있는다 했어!’

턱.

하지만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유진의 손이 내 뒤통수를 잡았고.

내 얼굴은 그대로 끌려 갔다.

텁.

나와 성유진의 입술이 맞닿았다.

성유진이 얼굴을 살짝 틀자, 우리의 입술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으웁…!”

뭔가를 할 새도 없이 딸기 아이스크림이 혀와 함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차갑고, 달콤하고, 따뜻하고, 끈적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모든 느낌들이 한데 섞여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츄읍­

아이스크림은 입 안에서 서서히 녹아 성유진의 침과 함께 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츄웁.

아이스크림이 거의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성유진은 입을 떼지 않았다.

마치 내 입안에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의 맛을 더 느끼겠다는 듯.

혀가 내 입안을 헤집었다.

쯉­

“흡….”

성유진의 혀가 내 혀를 휘감았다.

그리고 내 혀를 그대로 끌어냈다.

내 혀가 아이스크림 막대라도 되는 것처럼 성유진은 내 혀를 쭉 빨아들였다.

‘그, 그만….’

정신 없는 와중, 서로 한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공중에서 닿았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딸기 아이스크림이 베어물어진 자리를 서로 맞대고 조금씩 녹으며 하나가 되려 했다.

마치 지금의 나와 성유진처럼.

‘이 이상 하면….’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식혀줄 것이 없는 내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빨리는 혀끝의 감각이 점점 민감해지고.

아래쪽에서 서서히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여긴 편의점이야.’

지금이야 다른 손님이 없지만, 이 장면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앗, 알바 누나.’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나는 성유진의 연보랏빛 눈을 마주쳤다.

‘처, 처음부터 눈 뜨고 있었던 건가.’

당황하면서 느끼는 내 표정을 지금까지 관찰했던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곁눈질로 알바 누나 쪽을 바라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알바 누나는 그저 카운터에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규칙적으로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알바 누나의 시선이 잠깐 이쪽으로 향한 듯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성유진에게 그만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으웁….”

성유진은 그제야 내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프후….”

나는 발기된 자지를 감추기 위해 슬쩍 한손을 허벅지 쪽으로 가져갔고.

성유진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방금의 우리처럼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똑 떼서, 한 입 베어물었다.

“어때, 딸기맛이 근본 맞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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