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조별과제
* * *
“?!”
그 손길은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전에 내 목을 스윽 매만지고 떠났다.
“어, 유진아. 왔구나!”
이예진이 성유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유진이었구나….’
어떻게 목 한 번 쓸어만지는데도 저렇게 야릇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걸까.
‘일단 옆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내 옆자리엔 이미 이예진이 앉아 있었고, 뒷자리에는 다른 조 조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정연이 먼저 이예진 앞자리에 앉았으므로, 빈 자리는 내 앞자리뿐.
덜그럭.
성유진은 순순히 내 앞자리에 앉았다.
‘휴.’
이젠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성유진이 만약 내 뒷자리에 앉았으면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뭔 짓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차라리 한 번 시원하게 뭔갈 하고, 그 다음부턴 안 한다는 보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면 강의 듣는 내내 뒤에서 언제 무슨 짓을 할까 긴장해 있느라 진이 다 빠지게 될 거다.
성유진이 내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 이상, 적어도 이 강의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어제 자료실에 올린 파일 다들 프린트해서 가져왔을 거라고 믿고….
어?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었나?
나는 황급히 가져온 가방을 뒤졌다.
혹시나 과거의 내가 그 말을 기억하고 프린트를 뽑아서 가방에 넣어 놓지 않았을까?
‘응,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가방 안에는 민서 누나가 소매넣기해 준 점심햇살 한 병, 그리고 첫주에 뽑아 놓고 그냥 방치해 둔 강의계획서들뿐.
“하늘아, 혹시 프린트 안 가져왔어?”
내가 당황하고 있자 옆에서 이예진이 속삭였다.
“어, 응. 그런 것 같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어쩔 수 없지 뭐. 오늘은 그럼 내 거 같이 보자.”
“엇, 고마워!”
“고맙긴.”
이예진은 그렇게 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쌍꺼풀이 잘 어울리는 예쁜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아니, 얘 자꾸 심쿵하게 왜 이래.’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는데다 눈웃음까지.
너무 사기 스킬 연발하는 거 아냐?
‘아냐, 속지 말자. 하늘아. 하또속이 될 순 없잖아.’
나는 곧바로 지아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가장 건전하게 잘해줬던 지아가 어떻게 얀으로 진화했는지 곱씹었다.
‘어차피 얘도 겉으로는 이렇게 웃으면서 접근한 다음에 날 어떻게 해 보려는 거겠지.’
뻔했다.
지금 나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저 눈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흔들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들 게 뻔했다.
지금도 날 보면서 밑에는 젖어 있을 수도 있….
‘아냐, 지금 내가 무슨 돼먹지 못한 생각을….’
최근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 보니 아무래도 인간불신이 생기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한 애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하는 건 그만두자.’
하마터면 흑화할 뻔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래, 하늘아? 어디 안 좋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괜찮다면 다행이구. 자, 이거 같이 보자.”
강의가 시작되자, 이예진은 자신과 내 자리의 가운데쯤에 큼지막한 태블릿을 내려놓고 프린트 PDF 파일을 열었다.
“이 부분은 시험에 반드시 출제할 테니 따로 표시해 두도록. 두 번 말 안 한다.”
“네에.”
“네.”
이예진은 태블릿 전용 펜으로 교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별표를 다섯 개 쳤다.
그리고 ‘시험에 나옴’이라고 예쁜 손글씨로 적어 두었다.
‘글씨 잘 쓰네. 저게 태블릿 펜으로도 저렇게 되는구나. 신기하다.’
전자기기를 이용하기보다는 아날로그식으로 공부해 왔던 내 입장에서는 저런 최첨단 필기가 신기해 보였다.
저렇게 파일 위에 바로 필기를 하고 저장해서 가지고 다니겠지.
강의가 한두 개도 아니고, 저렇게 해서 태블릿 하나에 모든 강의의 프린트 내용과 필기까지 저장해서 들고 다니며 볼 수 있다면 정말 편하긴 할 것 같았다.
“저, 예진아.”
“응?”
“그거 얼마야?”
“아, 이거? 제이패드 14 프로 울트라 맥스 플래티넘인데, 220만 원 정도?”
“이, 이백이십?”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성능, 이 정도 액정, 펜 트래킹 기술까지 따라올 제품이 지금까진 없거든. 전자기기는 이왕 살 거면 가장 좋은 걸로 사야 후회 안 하고 쓰더라구.”
“그, 그렇긴 하지….”
그걸 살 돈이 있어야 후회를 하든 뭘 하든 하지…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딱 봐도 유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마 이예진에게는 이게 ‘당연한’ 거겠지.
“좀 붙을래? 같이 보려면.”
“어, 응.”
이예진은 가운데에 태블릿을 놓은 채로 의자만 약간 이쪽으로 당겨 앉았다.
나도 일단 강의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프린트 내용을 잘 보기 위해 이예진 쪽으로 의자를 당겼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딱 붙어서 같이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팔이 닿는데….’
태블릿이 가운데에 있고, 그걸 최대한 정면으로 보려다 보니 얼굴도 살짝씩 가까워졌다.
‘좋은 냄새 난다….’
옷에서, 그리고 목에서, 머리카락에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퍼져나와 코를 자극했다.
순간 멍하니 그 냄새에 취해 있는데, 앞쪽에서 성유진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휙
이쪽을 바라보는 성유진.
‘아차.’
눈이라도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바보같이 그 연보랏빛 눈을 바라보고 말았다.
마침 나와 이예진은 의자까지 옮겨서 몸을 딱 붙이고 있었고, 얼굴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상태.
만약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만 딱 우연히 본다면 연인으로 충분히 오해를 할 수도 있는 포지션이었다.
꿀꺽.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피하는 것도 이상한데.’
여기서 눈을 피해버리면 뭔가 켕기는 짓을 한 것 같잖아.
성유진은 흔들리는 내 눈빛을 몇 초 간 더 응시하더니, 씨익 웃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휴우….’
뭐야. 대체 왜 뒤돌아본 거야.
자, 다음 페이지 위에 보면 이런 말이 써 있는데….
그때 혼란스러워하는 내 오른쪽 귓가에 이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아. 무슨 생각 해?”
돌아보니 이예진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좋은 살냄새가 났다.
“어, 응? 아, 아무것도 아냐.”
“그래? 흐음. 방금 교수님이 여기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하늘이 너도 잘 봐둬. 아, 그리고 이거 파일 이따가 너 톡으로도 보내 줄게. 필기한 거 아깝잖아.”
“고, 고마워.”
착하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던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냐, 속지 마. 하늘아. 이러다가 부잣집에 갑자기 납치감금약물조교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이건 너무 나갔다. 지금 당장은 착해 보이니 일단 당분간은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 발정기라 페로몬인가 뭔가 몸에서 나오고 있을 텐데 얘는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닌가 보네? 그럼 성욕도 다른 민감한 여자들보다 적은 편이 아닐까? 믿어볼까? 그러고 보니 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믿느냐 마느냐 고민하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거 아닌가? 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돼!’
머릿속에서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서로 싸우고 있고, 옆에서는 이예진이 딱 붙어서 좋은 향기를 뿜고 있고.
‘이런 냄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뿌려대면….’
지금까지 최대한 비슷한 생각조차 안 하려고 노력했는데, 슬슬 아랫도리에서 반응이 오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다행히 아침에 민서 누나가 한 발 추가로 빼 준 덕에 풀발기까진 가지 않았지만, 결국 나머지 강의 내용은 거의 듣지도 못한 채 강의는 끝나고 말았다.
“조별 과제 기한 넉넉하다고 농땡이 피우면 너네 반드시 후회하니까 미리미리 해라, 알겠지?”
“네에!”
“넹.”
과제? 과제가 벌써?
마인드 컨트롤 한다고 과제 관련 이야기도 제대로 못 들었는데.
나는 재빨리 뭔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이예진의 손을 눈으로 좇았다.
‘아하, 경제 관련 주제로 조별 발표 하는구나.’
아까 필기한 내용을 톡으로 보내 준다고 했었으니, 지금 메모한 것들도 같이 보내주겠지.
‘일단 오전은 무사히 넘겼어.’
시간표가 개망해버린 바람에, 오늘 오전 이후 오후 강의까지는 우주공강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오히려 좋아.’
안 그래도 발기 제어를 계속해서 하고 있던 참.
자꾸만 이예진과 붙어 있었던 것, 내게 귓속말을 해서 돌아봤을 때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던 얼굴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오후 강의 전에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져야 될 거 같은데.’
학교에서 자위를 한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 발 빼고 나면 일정 시간 동안은 잡생각을 안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좋아.
이제 자연스럽게 조원들과 헤어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으슥한 곳으로 가면 된다.
완벽한 계획을 세운 내가 일어나려는 순간.
“얘들아, 잠깐만.”
이예진이 우리 조원들을 불렀다.
“교수님 말씀처럼 이거 질질 끌면 나중에 다른 과목 과제랑 겹칠 수도 있고, 여러모로 힘들 것 같은데 우리 시간 될 때 빨리 끝내는 거 어때?”
정말 모범스럽고 조장—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조장이 될 상이니까—다운 제안이었다.
‘아니, 난 싫은데….’
나 발정기만 지나고 하면 안 되겠니?
“난 좋아. 이 뒤로 우주공강이라 지금 딱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성유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귀찮은 건 빨리 끝내는 게 낫긴 하지.”
문정연도 거들었다.
이예진은 두 명의 빠른 동의에 활짝 웃었다.
“좋아! 나도 다다음 주쯤부터는 바빠질 것 같아서 지금 하는 게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하늘아, 넌 어때? 이 뒤에 일정 같은 거 있어?”
세 명의 시선이 한번에 내게 꽂혔다.
‘하필이면 나머지 둘도 시간이 되네….’
성유진이나 문정연 둘 중에 한 명만 애매해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묻어가려고 했는데.
‘발정기라 자위해야 하니까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다른 변명거리도 생각해내지 못할 것은 없겠지만, 쥬지컨트롤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 그럼 오늘 최소 반 정도는 끝내는 걸로. 그리고 다음 주까지 마무리하는 걸 목표로 해보자!”
“…뭐, 하는 건 좋다고 치고. 어디서 할 건데?”
문정연은 여전히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이예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집, 학교에서 엄청 가깝거든. 다 같이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