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여대에 입학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50화 (50/79)

〈 50화 〉 오지 않는 톡

* * *

“…….”

“…….”

“누구였죠…?”

“그러게.”

다인 선배는 질을 한 번 꾹 조인 후, 겨우겨우 나를 놓아주었다.

“헥….”

마지막까지 괴롭히다니….

끼익­

선배는 라커 문을 열고 나와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누굴까나.”

“혹시 아까 넘어질 뻔했다던 부원 아닐까요?”

그 부원이 우리가 있는 걸 눈치챘고, 다인 선배를 감싸 주기 위해서 일부러 제일 먼저 나갔다가 이후에 들어와서 구해 주고 갔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천재인가?

탐정의 기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완벽한 추리를 해내다니.

“아니, 걔는 그럴 만큼 눈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같이 오랫동안 배구부 활동도 하고, 자취방에서 술도 마시고 했던 녀석이라 잘 알지.”

“아하….”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단 나로서는 여기에서 다인 선배와 내가 섹스를 했다는 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안했다.

언제 어디서 폭로되어 뒷소문으로 나돌지 알 수가 없으니까.

‘다인 선배는 괜찮은 건가…?’

태연하게 옷을 입고 있는 다인 선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하의만 입은 상태라 복근과 탄력 있는 가슴이 아직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품에 방금까지 안겨 있었다니.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마치 들켜도 전혀 상관 없다는 듯한 저 태도.

그게 아니면….

혹시 다인 선배는 누군지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왠지 직접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저 다인 선배가 괜찮다는 듯 행동하고 있으니, 진짜 괜찮은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 나도 진정하자. 괜히 해결하지도 못할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다인 선배의 저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아, 아니에요.”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어?”

“어, 음….”

“그럼 싫었어?”

“…아뇨.”

“그럼 됐어. 자, 옷 입어. 또 누구 올라.”

다인 선배는 웃으며 내 옷을 꺼내 주었다.

‘또 누구 올라’라는 말에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그리고 혹시나 주변에 누가 있을까 조심조심 경계하며 밖으로 무사히 나왔다.

“하늘아, 오후에 강의 있다고 했었나?”

“아, 네. 하나 있어요.”

“그럼 내가 커피 사줄게, 한 잔 마시고 들어가. 갖고 들어가서 마셔도 되고.”

커피?

그러고 보니 무한리필 집에서 고기 먹고 자판기 믹스 커피를 안 먹고 나온 게 생각났다.

‘아, 고기 먹고 무료 믹스커피는 국룰인데….’

고깃집 가격의 절반은 손해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마셔 줘야지.’

안 그래도 고작 무한리필 집 대접하고 신경이 좀 쓰였었는데, 이런 조그만 거라도 더 사드릴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아예 아이스크림까지 살까?

“커피요? 제가 사야죠! 오늘은 제가 사드리는 날이잖아요.”

나는 마침 대학 내 GU 편의점 간판을 발견하고 총총걸음으로 앞장섰다.

“어? 어디 가, 하늘아?”

그 모습을 본 다인 선배는 당황해서 나를 불렀다.

“네? 그야 당연히 커피 사러죠. GU에서 이번 달에 레릿비 캔커피 원 플러스 원 하거든요.”

“아….”

다인 선배는 급히 달려와 내가 편의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뒷덜미를 잡았다.

“어어, 왜요?”

“하늘아….”

다인 선배는 나를 끌고 가며 반대쪽에 있던 쓰리썸플레이스 간판을 가리켰다.

“내가 말한 커피는 저런 카페에서 파는 커피야….”

“헉.”

말로만 듣던 쓰리썸플레이스.

아니, 물론 길거리 지나다니면서 간판이야 많이 봤지만.

중고생 때는 저런 카페에서 파는 커피 한 잔에 3~4천 원이나 한다는 걸 알고 경악한 뒤 거의 간 적이 없었다.

‘편의점 캔커피가 훨씬 더 달달하고 저렴하고 증정 행사 하면 양도 많은데….’

심지어 가장 싼 기본 커피는 아메리카노라고 엄청 쓰기만 하고 맛없는 커피다.

예전에 딱 한 번, 호기심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마셔 봤는데, 돈 아까워서 억지로 다 마시느라 죽는 줄 알았었다.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커피는 5천 원 언저리니, 학생 때 용돈으로는 꿈도 못 꾸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통장에는 무려 10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이 들어 있다.

말 그대로 일확천금!

학창 시절, 편의점에서 물건 하나마다 속으로 계산해서 담았는데 가격표가 잘못 놓여 있어서 “어, 잠깐만요. 그럼 이거 하나 뺄게요.” 했던 눈물 나는 시절은 이제 안녕.

이제는 대학 선배에게 카페에서 파는 커피를 사드릴 때가 왔다.

“어서오세요, 쓰리썸플레이스입니다.”

다인 선배는 카운터 앞으로 가더니 나에게 물었다.

“난 아아 마실 건데, 너는?”

“어, 저는….”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순간 망설였다.

‘캔커피에 이어 달달한 거 찾으면 너무 애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아메리카노는 맛 없는데….’

내가 고민하는 동안, 나를 보며 실실 웃던 다인 선배는 대뜸 주문을 넣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아이스 캬라멜 마끼아또 하나 주세요.”

어?

“드시고 가시나요?”

“네. 이걸로 해 주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주문을 마친 다인 선배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어. 선배. 제가 계산….”

내가 황급히 카드를 꺼냈지만 다인 선배는 내 손을 탁 잡아 내렸다.

“이건 내가 살게. 조용히 마셔.”

“…….”

나는 선배가 꺼낸 카드를 슬쩍 보았다.

딱 봐도 어른스러운, 세련된 디자인의 신용카드.

반면 내가 꺼낸 카드는 코코아뱅크 체크카드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 잔이 귀엽게 그려져 있는 카드였다.

‘졌다.’

선배는 선배구나.

“…네. 잘 마실게요.”

나는 체념하고 고개를 떨궜다.

선배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그렇지. 선배한테 얻어 먹을 수 있을 때 얻어먹어 놔야 해.”

잠시 후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온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통신병 출신이라, 어디서 전화가 안 돼요, CCTV 안 보여요, 하면 진짜 새벽에 기상해서 고치러 갔거든.”

군필이라는 다인 선배는 어쩌다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헐, 근데 새벽에 깨우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똑같이 일어나야 되잖아요.”

근데 그 이야기가 또 나름 재밌어서, 나는 귀를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가 바뀌기 전에는 나도 신체 검사 받고 현역 판정을 받았기에, 군대에 관한 썰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며 불안함을 달랜 기억이 있었다.

‘불안함이 달래지기는커녕 늘어난 썰도 많았지만….’

게다가 인터넷의 썰이란 게 어느 정도 과장도 되기 마련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 몰입하기도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선배가 풀어 주는 군대 썰은 왠지 몰입도 잘 되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전 세계에서 원더풀 군바리라고 여군 이야기를 다룬 만화가 있었는데, 그게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좀 오래 걸리는 작업이면 오침도 주고 그랬어. 다만 오침 하고 일어나서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똑같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월급도 얼마 안 주면서 너무하네요. 군대 갔다 오신 분들 진짜 다 대단한 거 같아요.”

나는 캬라멜 마끼아또를 한 입 쪼옥 빨았다.

내가 달달한 거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그러고 고개를 들었는데, 다인 선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하늘아….”

다인 선배는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정말 너무 고맙다. 사실 군대 얘기 꺼내면 남자애들은 대부분 관심 없어하고 시큰둥한 티 내기 바쁜데….”

“네? 완전 재밌는데요?”

“그리고 다들 고마워하기는커녕 여자는 당연히 갔다 와야 되는 거 아니냐면서 안 갔다 오면 여자도 아니라고 그러고….”

“아니, 강제로 거의 2년 동안 끌려 갔다 온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죠. 군인분들 덕분에 지금 저희가 발 뻗고 잘 수 있는 건데.”

나는 선배의 말에 살짝 화가 나서 주먹을 쥐었다.

이쪽 세계에서의 나는 군대를 안 가도 되기에, 정말 인생에서 큰 시름 하나를 덜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누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군인을 무시하다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다인 선배는 그런 내 볼살을 살짝 잡고 흔들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 고마워.”

“으어어….”

다인 선배는 한팔로 턱을 괴고 흐뭇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다시 애꿎은 캬라멜 마끼아또만 쪽쪽 빨아먹었다.

“그래서 그 CCTV? 그건 어떻게 고쳐요?”

“아, 그건 말이지. UTP라고 얇은 선이 8가닥 들어 있는 선이 있는데 이게 주초파갈로 색깔이 나뉘어 있어서….”

아까 선배가 꺼냈던 말로 화제를 돌리자 선배는 다시 신나서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전원선이랑 영상선을 따서 연결해주면 신호가 들어간다는 거지.”

“오호…. 신기하다.”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암튼 대단하다는 건 알았다.

다인 선배는 시계를 보더니 마지막으로 빨대를 한 번 쪽 빨고 슬슬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 마셨어? 여기 올려줘.”

“어, 감사합니다.”

선배는 음료를 가져온 선반에 내 것까지 올려서 다시 카운터에 반납해 주었다.

“그럼 오후 강의 잘 들어가고.”

“선배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담에 또 보자.”

그렇게 말하고 다인 선배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는 다인 선배가 안 보일 때까지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작 몇 시간 동안 있었던 많은 일이, 다인 선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다인 선배의 끈적한 키스, 따뜻한 살결, 그리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 미소가 지나가듯 떠올랐다.

‘잠만. 이럴 때가 아닌데.’

생각보다 다인 선배와 오래 이야기해서, 지금 바로 강의실로 출발해야 넉넉히 도착할 것 같았다.

‘내 본분을 잊지 말자.’

늦지 않게 도착해서 열심히 강의를 듣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

난 그러기 위해 여기 왔으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한 뒤, 천천히 강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

보통 이쯤 되면 지아가 점심 잘 먹었냐고, 곧 강의 시간인데 화이팅 하라는 톡이 와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폰을 들어 코코아톡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지아]

[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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