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여대에 입학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45화 (45/79)

〈 45화 〉 신지아

* * *

신지아는 오늘 아침,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도 하늘이가 다른 여자들한테 이상한 짓을 당하지 않게 지켜줘야지.’

그러고 보면 참 신기했다.

개강 날, 지하철에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헥헥대며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처음에는 하늘이 문란하고 이상한 남자애인 줄 알았다.

아무리 성추행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쿠퍼액을 흘리며 얼굴을 붉히고 흥분해 있는 게 아닌가.

저 정도면 아무리 상대방이 먼저 했어도 성추행이라고 신고도 못 할 수준이었다.

얼굴은 요즘 젊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이상형에 가까우면서, 몸매도 적당히 좋아 보였긴 하지만….

마음이 곧고 성실한 신지아에게는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남자…였을 터.

‘다만 단순히 문란한 남자애라기에는 그 이후 반응이 이상했지.’

단순히 흥분해 있는 게 아니라, 좀 곤란해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일으켜 세우고 말을 들어 보니, 자신도 당황스러웠다고 하며 심지어 한국여대 신입생이라는 게 아닌가.

그것도 같은 과에 같은 첫 수업.

어찌저찌 지하철 옆자리에 나란히 앉고 나니, 신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떨쳐냈다.

‘아냐, 난 외모만 보고 남자를 좋아하고 야한 짓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여자들과는 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지아는 최대한 과 동기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과 하늘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답변해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괜찮은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문란한 남자애도 아니고, 학창 시절에도 딴 짓 안 하고 열심히 남중남고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점점 인간적으로도 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 자체가 그냥 귀여워….’

학교에서도 다른 여자들이 다가와 번호를 달라고 하거나 할 때도 부끄러워하는 게, 도저히 꾸며낸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그냥 하늘이는 다른 남자들에 비해 좀 성적으로 몸이 민감하다거나 한 게 아닐까.’

그동안 남중 남고에 있었다면 자신이 그런 체질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성과 접촉을 할 기회조차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여대에도 덥썩 들어온 거고.’

여자들이 얼마나 성욕이 많고, 사람의 마음 따위와는 상관없이 남자라면 한 번 자빠뜨려 보려는 더러운 여자가 많은데.

속이 시커먼 그런 여자들이 득시글대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면 하늘이도 아마 여길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아가 할 일은 이제 명확했다.

‘하늘이를 지켜주는 것.’

일단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많은 틈을 타서 성추행을 하려는 못된 여자들로부터 지켜준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어떻게든 한 번 따먹어 보려고 별 감언이설을 해댈 여자들로부터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중심을 잡아준다.

‘물론 하늘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고, 그 여자와 야한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괜찮지만….’

지아가 볼 때 하늘이는 아직 그런 판단력을 가지기에는 여자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늘이에겐 지아가 필요했다.

지하철 역에서 만나는 방법도 있었지만, 지아는 오늘 아침 유독 빨리 눈이 떠졌기에 지하철 역을 지나쳐 하늘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나 뭐하는 거지? 하늘이네 집을 내가 아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하늘이네 집 방향으로 걷고 있으면 뭐 하늘이가 딱 문에서 나오기라도 할 줄….

벌컥­

‘진짜 나오네.’

하지만 하늘은 평소와 달리 집앞에 도착해 있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근처 전봇대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지? 아. 지하철에서 여자들이랑 맞닥뜨리기가 싫은 거구나!’

그래서 자신의 용돈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택시를 이용하기로 한 거고.

그런 거라면 바람직하다.

“택시! 여기요!”

지아는 바로 자신도 택시를 잡아 타고 학교로 출발했다.

“저 앞 차 따라가 주세요.”

하늘이 여유 있게 화장실을 들렀다 가는 동안, 지아는 잠시 하늘이가 화장실에서 또 성추행을 당하지는 않는지 지켜봐주었다.

‘오케이, 안전.’

그렇게 안전을 확인하고 먼저 강의실로 올라와 자리까지 잡아 두었다.

‘좋았어. 완벽해.’

위치 선정도 딱 둘이 앉고 하늘이가 지아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아,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존재는 기본적인 욕구를….

‘이거 끝나고 밥이나 먹자고 할까.’

강의 중에 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와 둘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과제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더 친해진 다음에는….

그런 망상을 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헉, 나 지금 뭔 생각을….’

지아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이 옆에 앉아 있으면 자꾸 엄한 생각이 든다.

킁킁.

‘오늘도 좋은 냄새 나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흔들고 자신을 꾸짖는다.

‘어휴, 신지아. 자제 좀 하자. 제발!’

하늘이의 몸에 눈이 먼 여자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간 거야?

‘그래도 밥은 같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강의 끝나고 하늘이가 돌아다니면 또 여자애들이 치근덕댈 텐데.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난 그런 여자애들이랑은 다르니까.’

하늘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니까.

‘난 하늘이에게 있어 특별한 친구니까….’

우웅­

그리고 그때 하늘의 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코톡 왔나?’

남의 코톡을 맘대로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서 훔쳐보진 않았지만, 눈이 자꾸 돌아가서 흘긋 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아의 눈은 상대방의 프사에 고정되었다.

‘여자?’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딱 봐도 여자 프사였다.

‘여자?’

‘여자?’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방금까지 자제하자고 했던 자기암시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빨간 글씨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늘이에게 개수작을 부리는 여자가 있다면 막아야 해.

하늘이는 안 돼.

하늘이 건드리지 마.

지아는 하늘이가 답장을 보내고 덮어 놓은 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늘아, 누구야?”

* *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지아는 그럴 애가 아니니까.

“어, 응. 배구부 선배.”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배구부?”

지아 눈이 조금… 이상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살짝 초점이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으응.”

“하늘이 너 배구 했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가끔 경기 보는 정도였는데 체육관에 우연히 갔다가….”

우연히 갔다가 라커룸에서 다인 선배랑….

…그때 일은 잠시 접어두자. 여기서 서버리면 답도 없다.

“갔다가?”

“그냥 알게 된 거지 뭐.”

“그냥?”

“어어, 그리고 그 저번 주에 나 도서관에서 여자애들한테 맞고 있을 때 구해준 선배야.”

그 말에 지아의 눈이 커지며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그 일에 대해 잠깐 설명해 주자 지아는 조금 풀이 죽은 듯했다.

“그런 일이…. 미안해. 내가 지켜줬어야 했는데.”

“아냐, 아냐. 괜찮아. 네가 항상 날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항상 보도록 노력할게.”

“아니,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점점 이상해지는 대화를 살짝 전환했다.

“아, 아무튼 이 선배가 날 구해줘서 내가 밥 사드린다고 했었거든. 오늘 점심에 먹자고 하셔서 알겠다고 한 거야.”

“그런 거였구나…. 은혜는 갚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지아는 다행히 납득한 모양이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부터는 과제 하나씩 나갈 거니까 이번 주까지는 놀아라.

“그럼 나 점심 먹으러 가 볼게. 오늘 자리 맡아줘서 고마웠어 지아야!”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뚫고 점심을 먹으러 떠났다.

[하늘 : 선배, 저는 끝났어요. 어디에서 기다릴까요?]

[다인 : 어, 나도 끝났어. 자연관 쪽에서 만날래?]

[하늘 : 거기가 어디죠…?]

[다인 : 코코아맵 찍어 줄게. 일로 와]

[하늘 : 넵]

학교가 넓기는 또 엄청 넓어서 무슨 관, 무슨 관 해서 아직 모르는 건물이 꽤 많다.

선배가 찍어 준 위치로 가자 다인 선배가 폰을 보며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와, 진짜 핏 지린다….’

몸에 달라붙는 얇은 트레이닝복 차림을 하고 벽에 살짝 기대 있는 다인 선배의 몸매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키도 크고, 다리가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어 비율도 좋고, 달라붙는 트레이닝복임에도 꽤 커 보이는 가슴까지.

‘실제로 봤을 때는 더 컸지….’

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도 쭉쭉 뻗어 있었고, 손등에 불거져 나온 핏줄까지 섹시했다.

‘어? 저거….’

다만 폰을 쥐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목에 뭔가가 감겨 있었다.

“어, 하늘이 왔구나. 가자.”

다인 선배는 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선배, 손목에 그거 뭐예요?”

“아, 이거. 저번에 그 양아치들이랑 싸울 때 삐끗했어. 한 년이 무식하게 두꺼운 책으로 내리찍더라고. 별거 아냐. 신경 안 써도 돼.”

그러고 보니 한 명이 책으로 기습을 시도하다가 막히고 나가떨어졌었던 것 같은데.

워낙 스무스하고 멋지게 막아내서 대단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픈 걸 참고 계셨던 거구나.

‘날 위해서 다쳐 가면서까지….’

게다가 내가 걱정할까 봐 다친 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물어보니까 별거 아니라고 안심시키기까지….

감동의 연속이었다.

“신경 안 써도 된다뇨. 저 지켜주시다가 그렇게 된 건데…. 선배 배구부 연습도 해야 되잖아요.”

“조금 쉬면서 체력 보충하면 되지.”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래도….”

“왜, 신경 쓰이면 뭐. 연습 못하는 동안 뭐 해주기라도 하게?”

다인 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었다.

나는 그 표정에 살짝 움찔했다.

“그, 제가 뭐 할 수 있는 거라면….”

“푸흡. 귀엽네. 자,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오늘 아침 안 먹어서 좀 배고파.”

“그래요, 어서 가요.”

다인 선배는 기다리는 동안 어디로 갈지 정했다면서 앞장섰고, 나는 옆에서 따라 걸었다.

“음?”

그렇게 길을 가던 다인 선배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어디론가 시선을 보냈다.

“어, 왜요?”

나도 같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 보였다.

다인 선배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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