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계획대로
* * *
‘이 목소리는…?’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양아치 3인방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일단 감사했다.
가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다시 꼴린다며 내 위에 올라탔다가는 10초 안에 다시 기절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라 차분하게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다만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이 사람이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슬쩍 눈을 떴다.
“다행이다. 잠시 손님 없어서 바람 쐬러 나왔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서 와 봤더니….”
쭈그려 앉아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편의점 알바 누나였다.
“괜찮아요…?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데.”
“네, 네에….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알바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알바 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워….’
알바 누나의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심지어 지금 알바 누나가 쓰다듬고 있는 부분은 박현서에게 뺨을 맞았던 부분이라, 위로를 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이… 따뜻해져….’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알바 누나는 내 뺨과 머리를 조금 더 쓰다듬고는 날 부축해서 일으켜세워 주었다.
“감사합니다….”
“걸을 수 있겠어요?”
“아마도요….”
“안 되겠다, 이리 붙어요.”
알바 누나는 내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 부축을 하고 천천히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이거 너무 붙은 거 아니야…?’
부축한다며 한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당기는데, 너무 밀착한 나머지 겨드랑이 쪽에 가슴이 닿는 게 느껴졌다.
“저….”
“네?”
“너무 붙은 거 아닌….”
“이렇게 잡아야 힘을 아끼죠.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니, 신경쓰지 말라고 해도….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게 몸에 씰룩씰룩 닿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편의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앞까지만 버티면….
나는 속으로 염불을 외며 알바 누나와 함께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저….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바 누나의 목에 둘렀던 팔을 빼려 했다.
“흐음…. 별로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잠깐만 들어와 봐요.”
하지만 알바 누나는 놔줄 생각이 없는지 날 데리고 그대로 편의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좀 쉬다 가요. 어, 잠시 손님.”
누나는 창고 쪽을 가리키며 들어가 있으라는 손짓을 한 뒤 잠시 계산하러 카운터로 갔다.
‘여긴….’
아까 알바 누나가 나에게 도시락을 꺼내 주러 들어갔던 곳.
아마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창고겠지.
‘잠깐…. 설마.’
나는 순간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나도 학습이란 걸 한다.
세계가 바뀌고 나서 여자와 이렇게 단 둘이 남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이제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갈까?’
잠깐 알바 누나가 날 놓아준 상황.
갑자기 뛰어 도망가면 그래도 편의점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어쨌든 아까부터 나한테 잘해줬던 사람이기도 하고….’
메뉴 추천도 해주고 도시락도 공짜로 주고, 양아치 3인방에게 강간당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지레짐작해서 의심하는 게… 맞나?’
배은망덕.
여기서 도망가는 건 알바 누나가 나에게 베푼 친절을 잊고 배신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 이 세계에도 충분히 믿을 만한 여자는 많을 거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지아였다.
신지아.
첫날부터 성유진에게 희롱당한 나를 일으켜세워 주고 학교에 대해서 순수하게 대화를 나눴던 친구.
학교 안에서도 나를 음란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아만큼은 날 순수한 친구로서 대해줬다.
알바 누나도 분명 그런 믿을 수 있는 종류의 여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잠자코 창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편의점에서 일을 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안쪽의 풍경은 생소했다.
‘편의점 내부는 이렇게 생겼구나.’
한쪽은 음료수 등을 보관하는 냉장고로 통하는 듯했고, 한쪽은 과자나 라면 같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인 것 같았다.
중간에는 관리자 컴퓨터 같은 게 있었는데, 모니터 하나에는 매출 현황 같은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고 또다른 모니터는 다른 기기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꺼져 있었다.
‘아, 혹시 CCTV인가?’
문득 박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위에 있던 CCTV는 편의점 거라고.
아무래도 편의점도 24시간 운영하는데다가 이런저런 사건 사고도 있으니까 내외부에 CCTV를 여러 대 설치해 놓을 거다.
‘그걸 감시하는 곳이 여기인 건가.’
하지만 지금은 모니터가 꺼져 있는 걸 보니, 역시 자주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편의점에서 혼자 일하는데 CCTV 화면 같은 걸 보고 있지는 않겠지.’
아마 도난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켜서 기록을 확인해 보는 정도로 쓰이는 것 같았다.
‘만약 아까 알바 누나가 이걸 켜서 봐줬다면 바로 신고해 줬겠지만….’
평소에도 물건 채우거나 카운터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알바 누나가 그때 CCTV를 보고 있었을 확률은 1%도 채 되지 않으리라.
‘누나 탓이 아니야.’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꽤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안 그래도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의자에 앉았다.
“후우…. 좀 살 것 같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몸이 추욱 늘어졌다.
[오전 06:37]
“오래도 당했네….”
휴대폰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쉬다가 학교나 가야겠다.”
이른 시간이지만 아마 도서관은 열려 있을 테니 가서 책이라도 읽고 있을 요량이었다.
알바 누나는 편히 쉬다 가라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눌러 앉아 있는 것도 민폐고….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창고 문이 마침 열렸다.
“좋아, 말 안 해도 앉아서 잘 쉬고 있네요.”
알바 누나는 들어오면서 한손은 뒷짐을 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지…?’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전해졌다.
‘역시 아까 도망갈 걸 그랬나? 나 여기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런 생각도 잠시.
“아.”
알바 누나가 뒷짐 진 손에서 꺼낸 건 캔커피였다.
“받아요.”
[레릿비 밀크라떼]
익숙한 푸른 캔커피였다.
“따뜻하다….”
온장고에서 방금 꺼내 온 듯, 캔커피는 굉장히 따뜻했다.
“이럴 때 뜨끈한 커피만한 게 없죠. 천천히 마시고 가요.”
“감사합니다.”
나는 감동 받은 얼굴로 알바 누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알바 누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웃으니까 더 예쁘시네.’
평소에 워낙 무표정에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어서 가려져 있었던 미모가 미소에 확 드러났다.
“…감사합니다. 저, 이제 학교 가 볼게요.”
“괜찮겠어요?”
“네,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언제든지 와요.”
“또 올게요.”
“빈 캔 이리 줘요.”
“앗, 감사합니다.”
어쩜 이리 따뜻한 사람이란 말인가.
알바 누나는 빈 캔을 잠깐 옆에다 놓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힘내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성적인 목적이 전혀 없는 포옹.
이런 포옹을 받아본 게 얼마만인가.
안겨 있어서 알바 누나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분명 온화하고 예쁜 표정일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얌전히 알바 누나에게 안겼다.
* * *
이현주는 하늘을 꼭 안은 채로 씩 웃었다.
‘계획대로.’
이현주의 게슴츠레한 눈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
지금 이현주의 표정은 유명 일본 만화 ‘야스 노트’에 나오는 아가미 라이토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로써 그녀의 ‘백마 탄 공주님’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위기에 빠진 도중에 나타나서 구해 준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는지도 몰랐다.
누가 봐도 지금 하늘의 반응은 확실히 호감이 있는 상태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나도 이제 출근하는 손님들 몰려올 시간이라.”
“네, 감사합니다.”
하늘은 꾸벅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종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그리고 이현주는 하늘이 떠나자마자 CCTV 화면을 켜고, 녹화된 영상을 USB에 다운로드받기 시작했다.
* * *
캔커피 하나 마셨다고 이렇게 몸이 가벼워진 건가.
아니면 그냥 몸이 회복력이 빠른 건가.
그것도 아니면… 누나의 따뜻한 친절 덕인가?
“후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역에 도착했다.
여전히 출근 시간대라 사람은 많았지만, 오늘은 왠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당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운이 좋게도 내가 탄 칸에는 사람이 비교적 적었고, 심지어 옆에는 웬일인지 경찰도 같이 타고 있었다.
경찰 역시 키가 훤칠하고 몸이 탄탄해 보이는 여경이었는데,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는 게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웠다.
옆에서 내 몸을 한 번 더듬으려는 손길이 있었지만, 여경의 시선이 이쪽으로 오려고 하자 금세 다시 사라졌다.
“쳇….”
혀를 차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무사히 역에서 내린 나는 이제 휘파람을 불며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 기세라면 더 이상 오늘은 두려울 게 없었다.
‘나 왜 이렇게 들떴지?’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일까.
분명 양아치 3인방에게 당한 건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뒤에 넘치는 힐링을 받아버렸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도서관 복도를 걸어갔다.
“야, 그래서 그 새끼가….”
“킥킥.”
복도 맞은편에서는 키 큰 여자 세 명이 저들끼리 낄낄대며 이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존나 웃기네…. 응?”
그녀들 중 하나가 문득 나를 발견한 듯 고개를 까딱했다.
나머지도 날 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느낌이 싸했지만 뭐 별일 있겠어 싶어 그대로 가던 나는 갑자기 당한 어깨빵에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퍼억
“어이구, 조심하셨어야지.”
나는 얼탱이가 없어서 나에게 어깨빵을 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머지 두 명은 넘어진 날 보며 킥킥대고 있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일부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오늘 있었던 좋은 일들과 운이 겹쳐서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분한 마음에 그녀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일부러 그랬으면서….”
그 말을 들은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머지 두 명의 표정도 비슷했다.
뭔가에 진심으로 놀란 듯한 얼굴.
어깨빵을 친 여자는 눈썹을 모으며 외쳤다.
“남자가… 말대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