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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77화 (77/77)

〈 77화 〉 어둠속의 빛

* * *

어두컴컴한 방안,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유유히 빛나고 있는 침대 위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뒤로하고 왼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한 남자.

옷도 잘 갖춰 입고 푹신하고 따끈한 이불마저 덮고 있는 사람이 마치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 맨몸으로 던져진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눈의 초점도 흐릿하고 무엇보다 도톰한 입술 밖으로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알아듣지도 못할 중얼거림뿐이었으니 완전히 영락없는 미친개가 따로 없었다.

" 아...... 으으 .... "

그렇다.

지금 오유진의 모습은 영락없는 미친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 잊고 있었어. 와, 완전히 잊고 있었어. "

몇 시간 전 병실에 잠시 들른 윤지연이 건넨 한 마디.

' 오늘 병원에 아내분이 방문했었다. '

그 한마디에 자신의 아내, 선유린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는 잊고 있었던, 정확하게 말하자면 잊고, 억지로 지우고 싶었던 사실들을 다시 완전히 인지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머릿속을 덮어버린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인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그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완전한 달이 떠올라 모두가 꿈나라에 있을 시각에도 왼손의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지금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것이다.

" ㅇ, 왜...... 도대체 왜..... "

난 버려졌다.

' 그냥 앞으로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마. 너의 그 더러운 몸뚱아리가 내가 열심히 피땀 흘려서 번 돈으로 산 집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치가 떨리거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만 상상만 해도 감히 소중한 내 집안 바닥을 밟고 들어온 네 그 두 다리를 다 잘라버리고 싶어져. '

' 그러니, 앞으로 영영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마. 잘 알고 있겠지만 당연히 몰래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고. 혹여나, 들어왔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날부로 초상 치르는 거야. 알겠어? '

'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뚱땡이 새끼한테 가서 계속 재워달라고 그래. 네 그 몸뚱아리를 다시 팔아 재낀다고 하면 그 새끼 성격상 숙박은 물론 삼시 세끼 전부 제공해주면서 용돈까지 챙겨줄 테니까. '

' 꺼져 씨발, 더러운 새끼야. '

본래의 상식이 통용되는 세상에서 순식간에 낯선 세계로 떨어진 그때처럼, 이상 따윈 좇지 않으며 자신의 그릇을 파악하고 주제를 파악한 뒤 큰 꿈 따윈 가지지 않기로 결심하고 현실에 순응한 그때처럼, 나는 또다시 버려졌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며, 유일하게 의지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아주 처참하고 잔혹하게.

그렇기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절망했었다.

그렇기에 하늘을 원망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난 정말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줌의 모래와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로써 난 이제 이 끝도 없는 순환에 굴레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나를 직접 찾아온 걸까? 나를 잔혹하고 처참하게 내치고선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나를?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들을 떠올리는 순간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어,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하지? "

통증도,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오른쪽 몸. 그러나, 자꾸만 욱신거리며 누군가가 망치로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는 그저 왼손으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팔을 더욱더 세게 부여잡으며 피가 흘러나올 때까지 이빨로 입술을 세게 깨문 채 안 그래도 숙이고 있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더욱 웅크릴 뿐이었다.

* * *

다음날이 되고.

그가 걱정에 미쳐가며 뜬 눈으로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밤을 새운 순간, 윤지연은 얼굴에 미소를 그린 채 한 여성을 마주 보고 있었으니.

화창한 날씨와 함께 언제나 사람이 복작거리는 병원 내 편의점 앞에서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선유린을 바라보면서 마치 십년지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

" 아이고, 여기서 다 만나게 되네요. 이름이 분명 유린 씨 라고 했었……. 나? "

" .... "

그러나, 정작, 이 둘이 알게 된 지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안면을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에게 친한 척 다가오는 게 불편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연의 인사에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던 선유린은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약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다시 풀고선 어색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 네..... "

" 탄산 좋아하시나 보네요. 저는 탄산보다는 이온 음료를 더 좋아하는 편인ㄷ.... "

지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홱 돌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녀였지만 그 바람과는 다르게 지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중간에 끊기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유린 씨. 식사는 하셨어요? 설마 지금이 점심시간인데 식사도 못 하시고 탄산음료로 때우시는 건 아니죠? 아이, 그런 이유로 음료수 먹고 있는 거라면 너무 슬퍼 보이는데."

" .... "

" 만약에 안 드셨다면 제가 살 테니까 같이 가시죠. 제가 잘 알고 있는 가게가 한 곳 있는데 차 타고 가면 바로 앞이라서 얼마 안 걸리고 또, 거기 칼국수가 바지락이 가득 담겨져 있어서 완전 죽이거든요. 뭐, 칼국수 싫어하신다면 다른 메뉴도 엄청나게 많아서 진짜로 진국인데 혹시 같이 가실 의향 있으신지? "

" 점심 먹고 난 뒤에 소화할 겸 먹는 거니 안 사주셔도 됩니다. 칼국수를 포함한 겉절이 메뉴 같은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걸 먹었거든요. 그리고 애초에 툭 까놓고 말하자면 저희가 식사를 같이할 만큼 그리 친근한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불편해서 어디 그 밥이 넘어가기나 할까요? "

" 에이, 말씀을 뭐 또 그렇게 하시는 건지 원, 꼭 친한 사이여야만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면 갑자기 친해질 수도 있는 것이고요. 제가 워낙, 유린 씨한테 질문할 것도 그렇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주제가 좀 많거든요. "

" 저한테 말입니까? "

" 네. 그쪽한테 말이죠. "

" 기껏 해봐야 어제 안면을 튼 사이에 불과한데 무얼 그리도 묻고 싶은 게 많은지 잘 모르겠네요. "

" 그만큼 제가 잘 모르니까 우리 유린 씨에 대해서 더욱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뜻이죠. "

싱긋 미소를 지으며 더욱더 선유린을 향해 다가가는 윤지연. 그러나, 그녀가 계속해서 들이대는 것이 불편하고 혐오스럽기만 한 그녀는 이내 귀찮고 불편하다는 자신의 마음속 감정을 가리지 않고 말로써 표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는 것이 아닌 장미에 돋힌 가시처럼 잔잔하고 차분한 어투속에 가시를 숨기는 식으로 말이다.

"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죄송하지만 저는 여자보단 남자가 좋은 지극히 정상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성별이 이렇게 들이대는 게 그리 좋게 느껴지지만은 않네요. 솔직히 말해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지연씨가 저한테 궁금한 것도 그렇고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가 많은 것과는 다르게 저는 그런게 거의 없어서 말이죠. "

" .... "

" 안타깝지만 제가 지금 바쁜 몸이라서 더이상 시간을 쓸데없는 곳에다가 허비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그렇고 지연 씨도 그렇고 오늘 하루가 특별하고 좋은 날이 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

다 먹은 음료수를 악력으로 완전히 찌그러트린 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그녀는 상대의 행복을 전혀 바라지 않는 어투로 윤지연을 향해 덕담으로 포장한 작별 인사를 건네며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띄워냈다.

그 후, 매정하게 몸을 돌려버린 그녀는 덕담으로 포장한 자신의 작별 인사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 또한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의미를 바깥으로 표출했고 이내 자신이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이 불편하면서도 혐오스럽고 짜증나는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곧바로 자신의 팔을 잡고 늘어지는 지연의 행동에 얼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제동이 걸려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에이, 어디 가세요? "

" 하..... "

귀 옆을 지나다니면서 사람의 짜증을 유발하는 모기와도 같은 지연의 행동에 움직임이 멈추자마자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곧이어 고개를 뒤로 돌려 단지 가시가 돋친 어투만 사용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표정까지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지연을 향해 약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차갑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 제가 어디로 가는지 그쪽한테 알려줘야 할 이유도 그쪽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요. 좀 놓아주시죠? "

지연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몸에서 약하게 뿜어져 나오는 약한 살기와 함께 어깨를 으쓱거리며 잡고 있는 옷소매를 놓으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땀이 흘러나올 정도로 공포스러웠는데.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약한 살기에 혀를 내두르며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작, 그 살기를 눈앞에서 받아내고 있는 당사자인 지연은 마치 가소롭고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 움직일 뿐이었으니.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시나리오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마음속으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선유린은 잠시 눈가 주위를 파르르 떨면서 입술을 씰룩쌜룩 움직이더니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선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그 기세를 점점 높여가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격돌하는 두 여성의 눈빛과 함께 점점 고조되어가는 긴장감의 열기. 이러다가 큰일이 나는 게 아닐까 슬슬 걱정이 들어가는 시점인 그 순간, 선유린의 살기를 눈앞에서 받아내면서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짓고 있던 지연에게서 나온 말 한마디는 무거워져만 가던 분위기를 전환하기에는 충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 에이, 말 안 해주셔도 알겠네. 어제 검사 때문에 못 만났으니까 유진 씨 만나려고 지금 병실로 올라가려는 거죠? 근데, 이거 어쩌나? 지금 올라가셔도 유진 씨는 못 만나실 거에요. "

지연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마귀같이 일그러진 얼굴과 살기를 뿜어대던 그녀의 기세가 점점 누그러져 가더니 이내 완전히 수그러들어가 그 모습을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추어버렸다. 그 대신, 곧장 선유린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윤지연이 꺼낸 이야기에 대한 의문뿐.

" 그게 무슨 소리죠? 못 만나다니. 왜죠? "

" 지금 담당의랑 간단한 상담과 함께 겸사겸사 여러 진찰을 하고 있어서 어차피 올라가도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셔야 해요. "

어차피 올라가도 바로 만나지 못하고 병실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지연의 말에 병원에 방문했다가 병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어제 일이 떠오른 그녀는 자연스레 눈썹을 씰룩 움직이며 지연을 향해 ' 또? ' 라는 표정을 지어냈다.

" 하아.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뭐,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설마 어제처럼 오늘도 병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아무 소득 없이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

" 에이, 그건 아니니까 마음 놓으셔도 괜찮아요. 거창한 검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담당의랑 간단한 상담과 함께 겸사겸사 여러 진찰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거니 오래 기다리셔봤자 십 분에서 십오분 정도면 충분할 거에요. "

" 십 분에서 십오분이라... "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시간.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그녀는 기다리는 동안 담배나 태우며 부족한 니코틴이나 충전할 속셈으로 흡연 구역으로 걸음을 옮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중요한 건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을 윤지연이 아니었으니.

" 그러고 보니 유린 씨 흡연자셨죠? 이거 잘됐네요. 같이 한대 태우러 가시죠. "

" .....마음대로 하시죠. "

선유린은 짧은 대꾸와 함께 옷소매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를 떨쳐낸 뒤 말없이 몸을 돌려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물론, 당연하게도 뒤에 껌딱지처럼 가까이 달라붙는 사람 하나를 붙이고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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