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어둠속의 빛
* * *
" 그렇게 오래 안 걸린다는 거지? "
조용한 침묵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는 화장실 속, 마치 나무 위에 올라간 채로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와도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천진난만한 여성의 목소리.
[내 대가리 속에 저장되어있는 이름이 아닌 걸 보니까 정부 쪽 인사나 법조, 재계의 굵직한 인물도, 연관되어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오래 걸릴 일이 뭐가 있겠어.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정체를 숨기고 활동을 하는 흑색 요원이 아닌 이상....]
" 만에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냥 제외해도 돼. 흑색 요원은 개뿔, 지랄 염병하고 있네. 그년이 흑색 요원이고 나발이고 뭐라도 되는 년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음, 그럼, 리스트 뽑는 건 일도 아니야. 애초에 락이 안 걸려 있잖아. 하루도 안 걸릴 것 같은데]
" 하루도 안 걸려서 리스트를 뽑을 수 있다라. 듣던 중 정말 반가운 말이네. 아무튼, 내가 부탁한 사항들이랑 조사하면서 나오는 건덕지등등 그 사람에 대해서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긁어서 모아 줘야 해. 잘 알고 있지? "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런 걸 모르겠냐. 안 그래도 요즘 시간도 남고, 어차피 몇 번 키보드 두드리면 한 번에 쫙 나올 사람 같으니 발 뻗고 내일 받을 준비나 하고 있어. 최대한 빨리 보내줄게]
" 알았어. 하여간 다짜고짜 전화 받아서 어이없는 내 부탁 들어주느라 고생 많다. 내 주위에 이런 거 잘하는 사람이 유일하게 너밖에 없거든. 이번 일 끝나면 제대로 한 번 시원하게 쏠 테니까 진짜 잘 부탁할게. "
[양옆에 남자들 끼고 비싼 것만 골라 먹을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네. 이렇게 된다면 없던 시간도 빼서 투자해야겠는걸. 오케이, 접수. 최대한 신경 써줄 테니까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
" 그래. "
[이만 끊는다]
그렇게 전화가 끊어지고 이제는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침묵의 공간 속 난잡하지 않고 깔끔한 단색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는 본인의 핸드폰을 쥔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물론 화장실의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그로 인해 거울을 바라보아도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살펴볼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거울을 마주 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단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생각에 잠길 겨를이 필요해 거울을 그 매개체로 썼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 억측이라. "
윤지 언니는 나에게 말했었다.
' 그래서 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뭔데. 그 여자가 착한 아내 흉내라도 내고 있다는 소리야? "
"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난 그것만을 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야. "
' 그럼 뭔데. '
' 난 그 여자가 가면 뒤에 숨어서 음흉한 짓을 저지르는 정치인들처럼 가면을 쓰고 착한 아내를 흉내 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유진 씨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
' ......억측이야. '
과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생각이 억측인 걸까? 아니,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정황이 그 여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빠지지 않고.
언니는 아무리 그래도, 아내라는 사람이 자기 남편을 상처입히는 것도 모자라 병신으로 만든 뒤 저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리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들을 강한 엄마,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해 고문하고 죽이는 범죄자,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물 새끼들을 신의 사자라고 외치며 숭배하는 미친 사이비도 있는 마당인데 자기 남편을 상처입히는 것도 모자라 병신으로 만든 뒤 태연하게 행동하는 그런 미친년 하나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이런 주장에도 윤지 언니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었다.
' 확실히 네 말만을 들었을 때는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긴 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말만을 들었을 때고. 거기다가 내가 봤을 땐 너는 그 여자를 그렇게 좋게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원래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뭐든지 부정적으로 보이는 법이야. '
'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야. 그년이 유진 씨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맞는 것 같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뿐. '
' 지연아. '
' 의심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실례가 되는 일이지. 하지만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그렇기에 확실히 믿으려면 먼저 의심해야 하는 법이고. '
' .... '
' 뭐, 언니가 내 의견에 동조하던, 고개를 젓던 아무 상관 없어. 어차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
' 뭘 하려고? '
' 내 입으로 저 사람이 나쁘다, 이 사람이 나쁘다 지껄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찾고 수집해야지. 그년이 내가 생각한 그 씨발년이 맞다는 확실한 물증들을 말이야. '
상념이 끝나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몸을 돌린 뒤 뚜벅뚜벅 걸어가 화장실 문을 잡아당기자 환한 불빛이 어둠 속에 숨어있던 그녀를 순식간에 감싸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여성의 심금을 자극하는 향기로운 냄새, 그리고 또박또박한 발음과 더불어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의 남성이 전해주는 뉴스,
마지막으로 그녀가 화장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자 고개를 살짝 내밀고선 말을 더듬거리며 그녀를 향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왼손을 살살 흔드는 한 남성까지.
" 마, 많이 급하셨나 봐요. "
그녀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그의 병실이었다.
* * *
" 뉴스 보고 계셨나 보네요. "
" 네. "
" 선거 기간이라서 그런지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게 항상 정치 관련한 소식들밖에 없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집중해서 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유진 씨가 예능이나 음악프로 이런 것들보다는 정치 쪽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
선거 기간이라서 그런지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라곤 재미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인 정치 관련한 소식들뿐인데 유진 씨는 그게 뭐가 재밌다고 저렇게 헤벌쭉 정신을 놓은 채로 보고 있었던 걸까?
나 같은 사람들이야 한 길드의 수장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정, 재계 인사들과 관계를 맺기 싫어도 자연스레 맺을 수밖에 없고 그쪽 세계에 발을 담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와 관련된 소식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일반인이지 않은가.
그것도 지금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선거 기간이 대통령 선거기간도 아니고 끽 해봐야 국회의원 선거일 뿐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성별은 여성이 아닌 남성. 당연히 정치 쪽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의 합리적인 추측이 무색해지게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의 뜻을 표현했다.
" ....아니요. 정치 이런 거 정말 하나도 잘 몰라요. 관심도 없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그냥 적적해서 틀어놓은 거예요. 마침 전원을 켜자마자 나온 게 이거기도 하고, 음악프로나 예능 프로 같은 건 아내랑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재미도 없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틀어놓은 거에요. "
" .....그런가요. 그나저나, 늦은 시각인데 당연히 식사는 하셨죠?
" 아, 네. 배부르게 머, 먹었어요. "
" 맛있게 드셨어요? 언니가 운영하는 이 병원. 인터넷상에서 전국에 존재하는 대형 병원 중 유일하게 밥이 맛있게 나오는 곳이라며 소문이 자자한데 저야 뭐, 병원에 방문해보기만 했지. 음식을 직접 먹어본 적이 없어서 후..... "
" 맛있어요!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병원 밥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 그러나, 의자에 앉아 침대 위에 있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아니, 아직 말도 덜 끝났는데 그렇게 칼 같이 대답하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유진 씨. 그거 알아요? 지금 입으로는 맛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눈빛은 지금 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거. "
" 아..... "
" 어떻게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시는 건지 원, 제가 무슨 여기 병원 영양사도 아니고 저도 엄연히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고객이고 손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또, 어떻게 보면 저희가 내는 의견은 비난이 아니라 피드백인걸요. 다 저희들의 의견이 피와 살이 돼서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병원 밥 솔직하게 말해서 어떤 것 같아요? "
" ..... "
대답 대신 이어지는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기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오케이. 거기까지. 아이, 그러면 인터넷에 나와 있는 글은 전부 다 거짓말이네요. 하긴, 식자재의 양과 종류 그리고 조미료가 다 제한되고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병원 밥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어요. "
" 그, 그렇다고 해서 절대 맛이 없는 건 아니고 다, 단지 조금 싱거워서 제 입맛에만 조금 덜 그랬다는 거지. 그게 또.... "
" 아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식사가 조금 싱거웠다고 말한 것뿐인데 뭘 또 그렇게 수습을 하려고 해요. 알았어요. 알았어. 윤지 언니한테 입도 뻥긋 안 할 테니까 진정하세요. "
약간의 웃음꽃이 피어나는 화목한 분위기 속 임윤지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그제서야 얼굴에 옅은 미소를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동적으로 왼손을 들어 이제는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으며, 움직이지도 감각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오른팔을 쓸어내리는 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법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병실 속, 자신의 모든 신경을 오로지 그에게 쏟아붓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런 찰나의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고 오른팔을 쓸어내리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마치 동화 속 공주님에게 버림받은 왕자님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 그녀는 걱정스러움을 그에게 표출했다.
" 몸은 좀 괜찮아요? "
" 아, 고,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조, 조금 있다가 또 검사도 한다고 했으니..... 아무튼 정말 괜찮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 그래요? "
" 네. 저, 정말 괜찮은걸요. 뭐, 그래봤자 아직 하루도 안 됐긴 하지만 뭔가 조, 조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막 통증이나 이런 것도 없고......어, 그리고 또.... "
여러 이유를 대며 자신이 괜찮다는 걸 열심히 어필하는 그.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아프고, 상처 입었지만 그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그가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걱정을 표출하던 입을 다물고선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화목했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그 어색함을 자신의 손으로 깨부수기 위해 그는 황급히 말의 주제를 돌려냈다.
" 아, 그, 그러고 보니 지연 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
" 묻고 싶은 거요? 아, 네.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
"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그.... 간호사분이 검사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던데. 그래서 경섭이랑 창우도 들어오려고 하다가 못 들어왔거든요. "
" ..... "
어떻게 들어왔냐고?
' 너 설마 유진 씨 병실 들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너, 들어가면 안 돼. 조금 있으면 유진 씨 검사해야 한다니까! '
' 몇 가지만 말하고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정말 시간이 걸려도 검사받기 전에는 나갈 테니까 제발 딴지 좀 걸지 마. 내가 미리 말하는데 막으면 진짜 뚫고 들어갈 거야. 나 한다면 하는 여자인 거 알지? 난 분명히 말했어. '
어, 음, 그러니까 이걸 사실대로 말을 할 수는 없으니.
" 그냥, 유진 씨한테 몇 가지 알려야 하는 것들이랑 또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서 윤지 언니한테 따로 말하고 들어왔죠. 뭐, 그렇게 오래 안 걸리고, 설령 지체된다고 하더라도 검사받기 전까지는 무조건 나간다고 하니까 허락해주던걸요. "
사실, 허락을 해줬다기보다는 허락을 강제 집행했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뭐, 그게 결국 그거 아니겠나.
" 저…. 한테요? "
" 네. 사실, 타이밍이 계속 안 잡혀서 과연 언제쯤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계속 고민했는데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
" 뭐, 뭐길래 그러시는..... "
" 오늘 병원에 유진 씨의 아내분이신 선유린 씨가 방문했었습니다. "
" .......네? "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져 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