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75화 (75/77)

〈 75화 〉 어둠속의 빛

* * *

시곗바늘의 초침이 움직이고 중천에 떠 있던 햇님이 어느새 뉘엿뉘엿 질 때쯤 계속해서 이어진 숨 막히는 삼자대면과도 같았던 세 여성의 길었던 대화는 선유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서기 전 아내로서, 보호자로서, 가족으로서 당연히 그를 만날 것을 요구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오늘 저녁 늦게 실행해야 할 검사가 남아있었기에 임윤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덧붙이면서 그녀의 정당한 요구를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매몰차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오늘만큼은 만나는 것이 불가하다는 임윤지의 답변을 받은 그녀는 아쉽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짜증을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걸음을 나선 뒤 지는 해를 배경 삼아,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병원 내 공원을 지나 유유히 길을 나서 자택으로 돌아가는 선유린.

모두가 그렇듯 자신의 삶을 살고 있기에 남을 신경 쓸 겨를 따윈 없고 무엇보다 특출난 구석 없이 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기에 수많은 사람 중 그녀를 쳐다보거나 흘겨보는 사람 따윈 존재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언제나 예외란 존재하는 법인 건가? 이 넓디넓은 병원이라는 공간 속, 매점에서 무언가를 잔뜩 산 것인지 한 손에 검은 봉지를 든 채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녀를 굉장히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 이상해. "

닿으면 손가락이 베일 듯 날카로운 눈빛, 잔뜩 찌푸려진 미간, 꼬나문 담배와 함께 코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연기와 더불어 입 밖으로는 고장이 난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이상하다는 말만 반복을 하며 창문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는 한 여성.

마치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두고 상대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는 감정을 다시금 다듬는 한 명의 무인처럼 온갖 부정적인 감정만을 창밖으로 쏘아 보내는 여성의 모습은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선유린과 악연으로 묶인 사이가 아닐까? 의심하기에 충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쏘아 보내는 여성의 정체는 선유린과 악연으로 묶인 사이도 아닌, 그냥 이상한 사람도 아닌, 방금까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윤지연.

바로 그녀였다.

" .... "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점.

도대체 그녀는 어째서 선유린을 향해 이리도 격양되어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마구마구 드러내는 걸까?

악연으로 엮어있는 것도 아닌 몇 시간 전 처음 얼굴을 맞댄 사이에 불과하고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에 불과한데 그녀는 도대체 어째서? 무슨 이유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아도 쉽게 정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 그 자체. 애초에 건져낼 건덕지 자체도 그렇고 무언가를 엮어낼 연관성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그 이유를 찾아내란 말인가.

하지만, 매우 놀랍게도 그 의문에 대한 정답은 어느 정도의 상식이 갖춰져 있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쉬울 따름이었는데,

바로 불쾌한 골짜기 현상.

무언가 익숙한 단어이지 않은가? 솔직히 세상의 지식과 담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선 다들 인터넷을 몇 번씩 둘러보거나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면서 오다가다 한 번쯤은 듣거나 봤을 법한 단어일 것이다.

즉, 무슨 말인지는 오다가다 들어봤기 때문에 대충은 알고 있지만, 그 단어가 뜻하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일 뿐.

뭐, 윤지연이 선유린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했더니 이 시간이 심리학 시간도 아니고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 뜬구름을 잡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모든 이들이 생각과는 다르게, 이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라는 용어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그녀가 일면식도 없을 몇 시간 전 첫 만남을 나눈 것에 불과한 선유린을 향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인간과 동떨어진 모습일 때는 호감도에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늘기도 하지만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이론.

다시 말해 이질적인 불편함.

즉, 인간은 인간과 어설프게 닮은 대상을 오히려 인간과 닮지 않은 대상보다 혐오하는 것처럼 아직까지 폐부를 떠돌고 있는 담배 연기와도 같이 선유린을 처음 마주 봤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은 채 사라지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과 불쾌함.

바로, 빌어먹을 이 느낌 때문에 그녀는 일면식도 없고 방금 첫 만남을 나눈 것에 불과한 어색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선유린을 향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이상해. "

그렇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타고 오는 또 하나의 의문점.

도대체 그녀는 어떤 이질적인 불편함과 불쾌함을 목격했길래 기괴하게 제작된 로봇이나 매체에서나 나오는 좀비들에게 느낄법한 불쾌한 골짜기 현상을 선유린을 마주하면서 느끼게 된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던 불편함과 불쾌함 등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을 하라고 한다면 몇 날 며칠을 세서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것을 함축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모두 다 같이 한데 싸잡아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선유린은 아니, 그 여자는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 이론처럼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애정하고 있는 아내라는 역할을 어색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 그 여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고. "

" 이상하긴 개뿔. 난 오늘 네가 더 이상해 보인다. 이 미친 또라이 같은 정신병자년아. 아까부터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지 원, "

" ....언니. "

하얀 담배 연기를 다시 한번 코로 내뿜고선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이제는 까만 점이 되어 저 멀리 사라져버린 선유린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지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잘게 깨무는 그 순간, 들려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

지연의 말을 끊고 들어오면서 자리를 떠나 주인 없이 홀로 빛내고 있는 커피잔을 치우는 와중 그녀를 향한 목소리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임윤지의 고운 미성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 지연은 곧이어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격양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언니는 지금 무언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전부 엉망인 상태인데!? "

" 그러니까, 네가 아까전부터 그렇게 말을 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말했잖아. 난 그런 거 하나도 못 느끼겠다고. "

감정의 동요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임윤지의 모습에 환장해버리겠다며 지연이 혀를 내둘렀다.

" .......하, 진짜 미치고 팔짝 뛰어버리겠네. "

"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넌 도대체 아까부터 왜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건데? 야, 솔직히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아까 유린 씨가 방을 나간 그 순간부터 자꾸 유린 씨가 수상하다느니,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

" 그 이유를 아까부터 설명하고 있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허점투성이에다가 수상한 것들 천지라고! 이 씨발,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인 남편이 몸을 심하게 다쳤는데 병원까지 온 아내라는 작자의 몸에서 술 냄새가 그렇게 많이 풍겨져 나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

금방 자다 깨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까치집을 지은 머리 스타일과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술 냄새를 다시 떠오른 걸까?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임윤지는 한숨을 푹 내쉬고선 그녀의 주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냈다.

" ....야, 그건 진짜 아까 처음 들었을 때도 든 생각인데 완전 억지 주장 아니냐? 막말로 그 사람이 교복 입고 돌아다니는 학생도 아니고 바깥일 하는 양반인데 그 전날 접대를 해서 술을 많이 먹었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사람의 일이란 건 복잡한 법이야. 어떻게 얽히고설키고 흘러가는지 모르니 그런 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 "

" 그게 이상한 거라고! 나도 알아. 사회생활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술을 먹을 수밖에 없지! 내가 그걸 뭐라고 비판을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지적을 하는 부분은 그딴 게 아니라 바로 시간이라고. "

" 시간? "

" 자, 그 여자가 언니 말대로 늦게까지 접대를 했다고 치자. 그러면 이것저것 시다바리 노릇도 하고 사람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귀가 시간도 자연스레 늦춰질 수밖에 없을 거야. 일찍 쳐줘 봐야 새벽 두 세시 정도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유진 씨가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시각이 언제지? "

" 새……. 벽이지? "

정확히 말하자면 늦은 새벽이 아니라 이른 새벽 시간.

" 맞아. 이른 새벽 시간이야. 응급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상처의 경과가 조금 지나있었고 추측을 해보자면 유진 씨가 그런 꼴을 당했다는 건 적어도 새벽이 되기 전, 즉 저녁 늦게 변을 당했다고 볼 수 있어. 자, 그러면 여기서 내가 방금 그 여자가 아무리 일찍 들어와 봐야 새벽 몇 시일 것이라고 말했을까? "

" 두세 시라고.... "

" 그래, 맞아. 두 세시라고 했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려봐. 뭔가 앞뒤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들어? "

" ..... "

" 두 세시. 즉, 그 시각은 이미 유진 씨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시각. 그렇다면 그녀가 집으로 귀가했을때는 그가 집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는데 지금부터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자, 언니. 언니가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우연히 새벽 두 세시 정도에 귀가하게 됐는데 분명 반겨주거나 안방에서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럼 언니는 어떻게 행동할 것 같아? "

" 전화를 하거나 수소문을 하거나 걱정을 하겠지....? "

" 그래. 보통은 그럴 거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해가 쨍쨍한 시각도 아니고 깔려있는 것이라곤 침묵과 어둠밖에 없는 늦은 시각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새벽 시간이 지나 해가 떠오르는 시각, 언니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그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앞서 나갈 것도 없이 전화 한두 통만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말이야. "

" .... "

"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까 처음 인사를 나눌 때도 그랬어. 아내로서, 가족으로서, 연인으로서 걱정과 불안이 담겨 있는 말투가 아니라 과연 남편의 다친 소식을 들은 아내의 모습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연하고 절제되어있으며 심지어 귀찮음마저 보였던 그 말투. "

" .... "

"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 여자가 묻는 건 자신의 남편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그 외의 부가적인 정보들뿐이었어. 심지어 남편의 심각한 상태를 들었을 때보다 부가적인 정보들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 훨씬 알아보기 쉬웠었고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고민하던 그 눈빛. 그 빌어먹을 봊같은 눈빛. "

" .... "

" 언니도 기억하고 있지? 내가 환자의 가족을 앞에 두고 하면 안 되는 발언을 했던 아까 전 그 순간을 말이야. "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처럼 중간에 끼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을 졸이며 양측의 눈치만 보고 마음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은 임윤지가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으랴.

비디오 플레이어를 재생하는 것처럼 머릿속의 그 순간이 저절로 재생되기 시작하는 임윤지가 고개를 긍정의 의미로 위아래로 끄덕 움직였다.

" 솔직히 그거 일부로 그런 거야. 까고 말해서 내가 미쳤다고 환자의 가족을 앞에 두고 그런 망언을 일삼겠어? 하지만 그 여자의 경우 여태까지 누적되온 게 있었.... 아이 씨발, 아무튼 그때 분명 언니는 당황하면서도 나를 다그치려고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겠지만, 그 여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었던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어. 그때 내 발언을 들은 그 여자의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 "

" .... "

" 보통이라면 당연하게도 분노와 증오와 혐오감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그 눈동자. 그런데, 빌어먹을 그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와 혐오감이 아니라 마치 점심 메뉴를 고르는 직장인처럼 고민에 가득 차 있었지. 앞서 말한 나의 무례한 발언에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

" .... "

" 이상하잖아. 수상하잖아. 언니. 솔직히 말해서 난 우리가 어디에선가 어긋났고 그로 인해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물을게 언니. 아까까지의 내 이야기를 전부 들어도 여전히 그 여자가 흉내를…. 아니아니 애초에 그 여자, 그 씨발년 말이야. "

" .... "

" 유진 씨 아내가 맞기는 한 거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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