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어둠속의 빛
* * *
" 일단,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아까 전화로 대충 이야기를 들으신 것처럼 유린 씨도 지금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아실 겁니다. 그렇지요? "
뜨거운 커피를 홀짝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유린.
"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뭐,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모든 것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유진이의 상태가 많이 위중하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 그 정도면 전부 기억하고 계신데요 뭘. 흠, 아무튼 간에, 앞서 전화로 설명해 드린 것처럼, 그리고 유린 씨가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심각하다고 하는 게 더욱 진실에 가깝겠죠. "
" 뭐가 문제인 겁니까. 분명,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
이해가 가지 않으니 답을 설명해 보라는 듯이 질문을 늘어놓는 유린의 이야기에 임윤지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고 했으나 곧이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게 그 정도라는 겁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아마,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더라면 유린 씨에게 전해진 소식은 유진 씨의 안부가 아닌 이미 싸늘하게 식은 몸만이 남은 유진 씨의 사망 소식 이었을테지요. "
왜냐면 지연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와 도리를 한참 벗어나,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피해자의 가족에게 해서는 안 될 필터링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상태였으니까.
" .... "
" .... "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서 찾아온 좌중을 압도하는 싸함과 함께 찾아온 침묵의 시간.
유명 여배우가 뜬금없이 기자회견에 소속사와 이야기되지 않은 결혼을 갑작스레 발표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세 명이 앉아 있는 이 넓은 공간에는 정적만이 깔리기 시작했으며 여태까지 이야기를 주도해나가던 임윤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러낼 뿐이었다.
' 야, 이 미친년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정신이야? 빨리 대가리 박고 사과해. 이 개새끼야. '
눈동자를 돌려 선유린의 기분을 확인하면서도 테이블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깥으로 티가 나지 않게 지연의 허벅지를 쿡쿡 찌른 임윤지는 이런 중요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지연을 보고 당장 사과를 할 것을 눈빛으로 전달했지만.
정작, 이 분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임윤지의 눈빛을 보고서도 사과를 할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눈을 세로로 뜨고 손에 커피를 들고선 여전히 머리에 까치집을 진 채로 진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는 선유린을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계속되는 여자들의 눈빛 교환과 함께 흐르는 시간. 뭐, 그래 봐야 기껏 서로를 노려본 채 지나간 시간은 삼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무슨 일이든지 간에 사달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
갑작스레 벌어진 돌발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입술을 이빨로 짓씹어 버린 임윤지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예의를 밥에 말아 먹은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지연을 질책하고 싶었지만 일단 그것보다는 이 작은 불씨가 큰 산불로 번지지 않게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에 그녀는 짜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지연을 흘겨본 후,
아직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그녀를 조금 있다 질책하기로 마음먹고선 혹여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손을 뻗어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키려 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들었던 두 손을 서서히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제, 말이 조금 심했네요. "
" ....? "
" 죄송합니다. 잠깐 정신이 나간 건지 원, 할 말 못 할 말 가려가면서 해야 하는데 순간 머릿속의 핀트가 어긋난 것 같네요. 경솔한 발언을 했던 점 진심을 담아 사과드리겠습니다. 유린 씨. "
원맨쇼 그 자체. 사실상 저항을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일방적인 딜 교 후 유유히 자신의 정글을 먹으러 가는 우디르의 뺨을 위아래로 후려쳐도 될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을 보여주는 그녀.
아까까지만 해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후 일방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지연의 뻔뻔함과 무례함에 임윤지는 헛웃음을 뱉어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선유린 또한 일방적이긴 하지만 무례한 행동에 대한 사과도 받았고 더 이상 일을 키우기가 싫었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대신 행동으로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그제서야 굳어있던 원장실의 분위기가 풀리면서 막혔던 이야기가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 아무튼 간에 유린 씨 말대로 수술은 정말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중간에 한 치의 실수도 벌어지지 않았고 집도가 끝난 후에도 의료진들끼리 서로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며 서로에게 자축을 건넬 정도였으니까요. "
"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죠? "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도출할 수 있었던 결론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뭐,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는 최선의 결과였지만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그리 좋지 않은 결과라는 뜻이죠. "
" 어째서죠? "
" 환자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이유는 그것 하나뿐입니다. "
" 도대체 유진이가 뭐, 어떤 상태였길래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 건지. "
" 자세하게 말씀 해드릴까요? "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을 힘겹게 끄덕이며 듣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뿐.
승낙을 받게 된 임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혀를 한 번 찬 다음 눈을 감은 후 응급실로 이송된 그를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그때 그 상황을 천천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자, 마치 비디오테이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끔찍했던 그때의 상황.
인생의 대부분을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던 그녀로서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끔찍한 상황이었는데 과연 이것을 보호자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될까? 라며 마음속에 생겨난 순간의 동정심이 그녀를 가로막았지만, 대답을 원하고 있는 유린의 굳은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힘겹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전신 찰과상, 타박상, 개방성 골절부터 시작해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전신 골절, 그리고 온몸의 열상과 둔상, 좌상, 파열상과 파상, 안구 손상, 내부 장기 손상, 흉부 외상, 복부 외상, 골반 외상 등등. "
" .... "
" 힐러 인생과 의사 인생을 모조리 합하더라도 본 적 없는 심한 외상과 내상인데 여기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로 시간이 꽤 지났던 것인지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시체가 부패하는 것처럼 부상의 정도 또한 너무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
" .... "
" 더군다나 세균으로 인한 2차 감염 등 균상까지 의심되는 상황. 그야말로 그때 당시의 환자분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게 대단할 정도였죠. 까고 말해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
" .... "
" 모두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습니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고 설령 쓴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뻔히 정해진 거라며 이야기했죠. 솔직히 저 또한 지연이가 환자분을 마지노선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데리고 왔기에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지. 만약 환자분을 병원까지 이송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겨 원래 도착한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
그 순간, 임윤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인지 그녀가 말을 끝 맺히자 마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선유린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하였는데.
" 그렇게까지 심각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네요. "
" .... "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걸 종합해보면 유진이가 응급차를 타고 후송이 된 게 아니라 제 앞에 있는 지연 씨의 차를 타고 병원까지 온 것 같은데. 제 예상이 맞다면 우리 유진이가 응급차를 타고 후송이 된 게 아니라 지연 씨의 차를 타고 병원까지 후송된 게 맞는 겁니까? "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는 말을 덧붙이는 윤지연.
" 유진 씨는 응급차로 이송이 된 게 아니라 제가 직접 병원까지 이송했습니다. "
" .... "
윤지연이 직접 그를 이송했다는 말과 함께 굳어져 가는 선유린의 안면. 하지만, 굳어가는 유린의 안면을 본 것인지, 보고도 모른 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연은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어투로 말을 덧붙이면서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 유진 씨가 처음 발견된 곳은 골목 안쪽. 즉,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집이 밀집해 있는 시내 술집 골목 안입니다. 유린 씨도 마찬가지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회인이라면 한 번쯤 밖에 나가서 음주를 즐기신 적이 있을 터. 그럼, 그 골목이 어떤 곳인지도 대충 아실 텐데요. "
" .... "
" 좁고 복잡하죠. 일단 도로 자체가 협소하고 가게마다 바깥으로 장애물이 나와 있는 게 많아서 경차도 제대로 못 들어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경차보다 훨씬 크기가 큰 구급차가 어떻게 안쪽 깊숙이, 그것도 골목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겠습니까. "
" .... "
" 결국, 유진 씨를 응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하려면 번화가 끝에 차를 세워두고 구급대원들이 도보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것인데 거기서부터 번화가 끝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말 안 해도 아시지요? "
" .... "
"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서 구급대원들이 골목 안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번화가 끝으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려라? 솔직히 까고 말해서 들것에 들어 옮기는 와중에 변을 당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즉, 결론적으로 유진 씨를 응급차에 태우지 않고 제가 직접 병원까지 이송한 이유는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그때 저와 함께 있었던 이들이 판단하기에도 골든 타임과 더불어 시간을 소모하지 않으려면 자체적으로 유진 씨를 후송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
" .... "
" 뭐, 애초에 누가 옮겼냐, 네가 옮겼나 이런 것을 따지는 것부터가 웃긴 사실이긴 한데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는 우리 유린 씨가 제가 유진 씨를 이송했다는 말을 들으시자마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시길래 혹시라도 오해를 하실까 봐 제가 이유를 덧붙여서 설명했습니다. "
" .... "
"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앞서 이유는 다 들으셨으니까 제가 유진 씨를 병원까지 이송했다는 것에 별문제는 없겠지요? "
지연의 멘트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공감성 수치가 극히 낮은 사람이 보아도 기분이 나빠 보인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굳은 표정과 함께 지연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초리는 매섭기 그지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으쓱 거릴 뿐이었다.
금방 이라도 상대를 잡아먹어 버릴 듯한 맹수의 눈빛을 띈 채로 입술을 살짝 짓이기는 그녀.
하지만, 굳어진 표정과는 다르게 떨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것은 분노도 아닌, 짜증도 아닌, 지연의 말에 동의한답시고 지었지만, 본래의 의도는 보이지 않고 그저 먼 괴리감만이 남아있는 부자연스러운 미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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