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어둠속의 빛
* * *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어긋나지 않는, 즉 본인의 분수에 맞는 사람들과 수없이 긴 인생을 함께하는 법이다.
뭐, 예를 들어 재벌이 다른 재벌가와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고, 왕족이 다른 나라의 왕족과 인연을 맺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가문과 결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항상 예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단지, 그 예외의 경우가 일반적인 경우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일 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아까전부터 지연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가지의 궁금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진 씨의 아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왜냐고?
아까 말했지 않은가.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어긋나지 않는, 즉 본인의 분수에 맞는 사람들과 수없이 긴 인생을 함께하는 법이라고.
23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자친구라는 것을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한 길드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올라가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접해본 나였다.
TV나 각종 미디어에서 착하다고 떠들어대는 연예인부터 시작해서 어렸을 때부터 각종 교육을 받고 자라왔을 거물들의 아들들, 심지어 최전선에 서서 괴물들을 막아내는 헌터들까지.
다들 용모적으로 누가 특출난가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빛이 나던 사람을 고르라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과연 누구일까?
TV와 각종 미디어에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연예인일까? 그게 아니면 거물 정치인의 아들?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의 아들?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최전선에 서서 괴물들을 막아내는 남자 헌터?
모든 사람의 의견이 전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본인의 기준에 따라 그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빛이 나던가를 고르는 것은 자유지만 일반적이라면 분명 저들 중 한 명을 어렵게 고르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기준상 여태까지 봐온 남자들 중 가장 빛이 나던 사람은 연예인도 아닌, 각종 거물들의 아들들도 아닌, 최전선에 서서 괴물들을 무찌르는 남자 헌터도 아닌, 아까까지만 해도 병실 침대에 앉은 채 죽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비관적인 말을 중얼거리던 오유진, 바로 그였다.
' 왜? '
분명 다른 사람이 이런 나의 의견을 듣는다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의문이 가득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저런 말을 내뱉을 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앞서 말한 사람들보다 격도, 격식도, 기품도, 우아함도, 외모도, 재력 등등 수많은 부분에서 뒤처지는 그가 앞서 언급된 쟁쟁한 사람들을 뚫고 선택된 게 이해가 가지 않겠지.
뭐, 인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 동생 경섭이처럼 친분은커녕 어쩌다가 집에서 마주쳐 나와 한 번 어색한 인사를 나눈 게 다인 오유진, 그는 내가 앞서 말한 그들에 비해서 외모와 명예 그리고 재력은 확실하게 뒤처지는 편이다.
아니, 좋게 말해줘서 뒤처지는 편일뿐, 가감 없이 말한다면 한참 떨어지다 못해 겸상도 같이 못 할 그런 수준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태까지 만난 남자들 중 그가 가장 빛이 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남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 다름. 그래, 그 다름 때문이다.
본적이 없다.
내가 봐온 남자들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언제나 탐욕스러운 눈빛을 지었고, 가면 뒤로는 추악함을 감추고 있었고,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항상 노리고 있었으며, 언제나 자신만을 위하면서 동시에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나, 오유진. 그만큼은 달랐다. 빌어먹을 그 환한 미소. 지금은 비록, 그 미소를 잃어버린 것 같지만 그때 음식을 가지러 집에 방문했을 때 어쩌다가 보게 된 환한 그 미소.
여태까지 봐온 남자들이 짓는 미소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있는 미소와 더불어 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마음가짐.
또한,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와서도 자신을 돌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남을 위하려 하는, 착한 걸 넘어서, 바보 같은 걸 넘어서 병신 같아 보이는 그 성격까지.
그렇기에 궁금했다.
과연 이 남자의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여태까지 봐온 수많은 남성들과는 다르게 가면 뒤로 추악함을 감춘 채 거짓의 미소를 짓지 않고 환한 미소를 보여주면서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는 그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필히 그와 똑같이 빛나고 있는 사람 일터.
궁금증과 약간의 부러움, 일말의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파도가 계속해서 몰아치는 그 순간, 울리는 벨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손님을 안으로 들여보내겠다는 직원의 안내 말에 그녀는 임윤지와 하던 시시콜콜한 잡담을 멈추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 있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지금부터 안 좋은 소식을 피해 가족에게 들려줘야 할 전달자의 입장으로서 여태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느라 풀어진 표정을 고쳐잡은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귀신 같은 타이밍에 맞춰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 여성이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자연스레 마주친 눈동자.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지금부터 안 좋은 소식을 피해 가족에게 들려줘야 할 전달자의 입장으로서 여태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느라 풀어진 표정을 고쳐잡은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 뭐야 시발.... "
동시에 튀어나온 나지막한 욕설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 * *
당신의 아는 사람이 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상태다. 상태가 많이 위중해 급히 이송해 수술 집도 후 의식은 찾았으나 상황이 그리 좋지많은 않고 그러니, 얼른 병원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사회활동을 하는 와중에 만약 갑작스레 이런 연락을 받는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몇몇사람들은 처음 연락을 받은 후 당황스러워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들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가 상황을 파악한 뒤 황급히 하던 일을 멈춘채로 병원으로 달려오겠지.
그렇다. 뭐, 완전 아예 왕래가 없는 사이라면 모를까. 어느정도 친분이 있다면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선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여기서, 연락을 받은 사람과 환자의 관계가 가까운 친인척 사이도 아닌,사랑하는 연인의 사이라면 그 반응이 과연 어떨것 같나?
아마 뒤집어지겠지. 사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의 소중한 연인이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쳐 목숨이 위중하다고 하는데 눈깔이 뒤집히지 않을 여자친구, 아내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일단 조심스레 예상해보는 것이지만 아마도 그 순간만큼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빠른 존재는 없을 것이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빛조차도 그순간에서는 그들에게 명함을 내밀지 못하겠지.
아무튼, 이게 일반적인 반응일것이다. 비정상적이지 않고, 지성을 가진, 올바른 생각을 가진 정상인으로서 보일 반응.
하지만, 근데 도대체 어째서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분명 빌어먹게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그와 인생을 함께 보내는 사람으로서 같이 빛나고 있어야 할 이 여자는.
왜 이렇게도 침착한 모습인걸까?
" 하아아아암. "
마치 다른사람의 일인마냥 지루하다는듯이 뱉어내는 하품.
그녀의 남편에게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이다.
또한 금방 자다 깨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까치집을 지은 머리스타일과 온 몸에서 풍겨 나오는 술냄새.
음식물 국물이 묻은 것인지 피가 묻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얼룩이 져 더럽혀진 옷차림과 피가 송골송골 맺혀있는 손등까지.
저 사람이 과연 밤 하늘의 별 보다 밝게 빛나는 그의 아내인건가?
아니, 그 전에 과연 저게 남편의 다친 소식을 들은 아내의 모습이 맞는 걸까?
무언가 이상하다.
" 지연아? "
무언가가 이상하다.
" 윤지연. "
무언가가.....
" 야 윤지연!!! "
천지를 뒤집을만한 가공할 목소리에 상념에 빠져있던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면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얼빠진 목소리를 밖으로 내뱉었다.
" 어......어? "
" 상대방이 인사를 건네는데 사람 무안해지게 인사도 안 받고 혼자 멍때리면서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집중 안해!? "
인사를 건넸다고? 아니, 나는 들은 적이 없는데....
" 아..... "
고개를 숙이자 쓸쓸히 허공에 혼자 떠있는 외로운 오른손. 그것은 명백한 악수의 의미였다.
아, 이런. 단순히 내가 듣지 못했던 건가.
실책이다. 괜히 사람 무안해지게 만들어버렸네.
"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이 많아져버려서 제때 인사를 받지 못했네요. "
"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분 같은것은 하나도 나쁘지 않으니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입을 열자마자 더욱 거세게 풍겨나오는 지독한 술냄새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고쳐잡은 그녀는 아무문제 없다는 듯 다시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 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지연이라고 합니다. 그, 죄송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 선유린이라고 합니다. "
" 아, 네. 뭐랄까. 듣기 좋은 이름이네요. 저,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유린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
" 반말만 아니라면 그 어떤식으로든지 부르던 간에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을 건데 불편하게 저기요라고 부르는 것 보다는 나을테니까요. 대신 저도 지연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지요? "
" 상관 없습니다. 편하게 불러주시지요. "
그렇게 서로의 손을 맞대고 한 짧은 악수 후 잡았던 손을 놓은 그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편한 자세로 자리에 착석했다.
짦은 인사가 끝난 후 이어지는 어색한 정적.
들리는 소리라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와 테이블 위에 준비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는 소리뿐.
세명의 건장한 여성이 앉아있는 공간 속 이어지는 답답한 기류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야기의 포문을 자신이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임윤지는 결국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마침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고선 이야기의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 그럼, 이야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