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어둠속의 빛
* * *
뜨거운 만남의 재회를 뒤로하고서 제일 먼저 그를 반겨준 것은 의료진들의 진료와 검사의 향연이었다.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안 좋은 상황들에 대비하기 위해 이어진 검사의 향연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모두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지만, 결과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전부 정상으로 판명. 호재였다.
의료진, 보호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결과에 주먹을 쥔 채로 하늘 높이 팔을 뻗어 올리면서 기뻐하던 순간, 유일하게 미소짓지 못하던 이가 한 명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료를 받은 당사자. 오유진이었다.
* * *
누군가가 말했지. 인간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아우라, 즉 기운이라는 신기한 이형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품과 위엄이 젖어있는 기운을 바깥으로 마구 뿜어대고 있는 한 여성.
그 여성은 철제의자에 앉아 화려하고 거대한 병실 안 무(無)의 표정을 얼굴에 그려내고 있는 한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기서 일반적인 관점이라면 단순히 병문안을 온 환자와 문병인의 관계라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진, 생명을 살리는 존귀한 존재를 증명하는 하얀 가운과 가슴팍에 달려있는 임윤지라는 이름 석 자는 그녀와 그의 사이가 단순한 환자와 문병인의 사이가 아닌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러 온 의사와 그것을 맞이하는 환자의 사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서류를 넘기며 침대에 앉아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를 살짝 흘겨보는 그녀.
다른 의료진들은 물론이고 윤지연과 그의 동생들 또한 잠시 자리를 비운 병실 안 단둘이 남아있는 이 공간은 침묵 속,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네.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
솔직히 눈앞의 환자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들었던 감정은 기쁘다라는 단순한 감정보다는 신기함과 놀라움이 먼저 떠올랐었다.
수술을 같이 진행했던 다른 의료진들조차도 하나같이 모아 하던 말이 최소 그가 깨어나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린다고 했었고 나 또한 그를 치료했었던 의사였기에 그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게 예상하고 있었는데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정신을 차리다니. 어찌 의사로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을 대놓고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기에 그녀는 신기하다는 감정을 마음 한구석에 얌전히 묻어두고선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어냈다.
" 흠. "
그 후, 거대한 병실 안 이어지는 침묵 속, 손에 들고 있는 차트와 여러 가지 서류,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 바라보면서 이내 얼굴에 옅은 미소를 그려내는 그녀는 현재 그의 상황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뭐, 여태까지의 소식은 대충 의료진들에게 들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깨어나신 점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
" ... "
" 안정제와 진정제 등 여러 약품의 투여량이 정상치를 초과했기 때문에 최소 정신을 차려 깨어나시는데 며칠이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단 하루도 걸리지 않고서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직원의 말을 듣고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정말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
" ... "
" 맥박은 물론이고 저희가 혹여나 우려했던 사항들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방금 검사한 결과로 놓고 봤을 때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초에 일찍 깨어나셨다는 것 자체가 곧 몸의 회복이 저희 의료진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빠르다는 뜻일 테지요. "
" ... "
" 뭐, 함부로 하는 제 예상이긴 한데 앞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아마도 퇴원하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부가적으로 할 검사들이나 진료들이 남아있어서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하신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정상적인 모습으로 병원 밖을 나가실 수 있을 테고요. 여러모로 마음은 놓고 계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
환자로서 누구나 미소를 지을법한 소식과 더불어 희망적인 말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솔직하게 말해서 금방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환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녀는 곧이어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고선 희망적인 소식에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외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 그녀가 하나 간과한 것은 눈앞에 앉아있는 그가 단순한 환자가 아닌 깊숙한 속사정으로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를 가진 환자였다는 점.
침대 위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는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기는커녕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둬 조금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음과 동시에 백옥같은 피부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왼팔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팔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 아... "
그러자, 짧은 단말마와 함께 얼굴에 그려내고 있던 미소를 순식간에 지운 채 고개를 아래로 떨궈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똑바로 마주 본 채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 .....많이 혼란스러우시겠죠.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
생각해보아라. 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잘만 움직이고 기능하던 몸의 장치들이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마치 전원이 꺼져버린 기계들처럼 기능하기는커녕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니. 나 따위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괜찮아요.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는데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걸요. "
그러나, 그녀의 사과에 오히려 괜찮다는 대답을 들려주는 유진. 하지만, 말속 깊숙이 숨어있는 울먹임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았던 걸까? 살짝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입술을 이빨로 물어뜯은 그녀는 눈을 잠시 질끈 감아냈다.
" 저, 서, 선생님. "
" ....네? "
" 제 몸이.....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건가요? "
마음 같아서는 가능성은 무한대로 존재하고 그러니 큰 걱정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한낱 바램일 뿐.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 혹여나 해서 몇 번을 검토하고 다른 의료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 정말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죄송스럽지만 안타깝게도 환자분의 몸이 예전과 같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 판단됩니다. "
" 그 정도로 제 몸이 심각했던 건가요.... "
" ....제가 거기까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충 어느 정도의 선에서는 말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 설명하려면 조금 깊게 파고들어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환자분이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해서. 그냥 조금 심각했다고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ㄴ.... "
" 괜찮아요. 그냥, 알려주세요. "
" .....네? "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재차 반문했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냈다.
" 저, 죄송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환자분을 위해서 이야기를 드리지 않는 겁니다. 들어서 좋을법한 이야기면 저희가 먼저 말을 꺼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인 건 환자분께서도 잘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
"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냥 알려주세요. "
" ... "
의료진이 아무리 여러 가지 경우를 고려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환자 본인, 당사자가 강력하게 원한다고 한다면 언제까지고 막을 수는 없는 법.
결국, 결과는 정해졌고 본인의 입으로 당사자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야 할 상황이 된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처음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내려와 환자분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이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였습니다. "
" 그 정도……. 였나요. "
" 네. 안면과 두개골의 함몰은 굉장히 심각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팔과 다리의 골절은 물론이고 군데군데 살갗을 뚫고 온몸의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의료진들의 응급 진료 결과 몸을 구성하는 구성기관을 포함한 내장 또한 상당 부분 손상되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출혈도 심각하다고 판단되었죠. "
" ... "
" 아마, 다른 병원들이라면 환자분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의료진들도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이건 아무리 손을 써봐도 가망이 없을 것 같다, 인간의 범주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을 정도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환자분을 치료하게 된 이유는 저의 결정이면서도 동시에 지연이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
" ... "
" 거두절미하고 저희가 자체적으로 환자분이 늦게 정신을 차릴 거라고 예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자칫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여러 약물을 포함한 마약성 약물도 초과해 투여를 해서 그렇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
" ... "
" 뭐,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수술은 굉장히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하늘의 기적은 실존했던 건지 저희가 우려하던 사항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고 정말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죠. 물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함몰된 안면과 두개골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는 복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버렸죠. "
" ... "
" 수술을 진행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왼쪽보다 오른쪽 몸의 손상이 더욱 심각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게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라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더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사후처리를 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
오른쪽 눈은 이미 이물질과 상처가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오른쪽 팔과 다리는 신경은 물론이고 뼈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려서 아예 손조차도 쓸 수 없었다.
그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거라곤 더욱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산산이 조각난 뼛조각을 처리하며 사후처리를 대신해 주는 것뿐.
" 당연하게도 뼈는 저희가 조치를 해놓았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서히 붙어가며 회복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른쪽 팔은 물론이고 오른쪽 다리는 여러 신경과 그 근간을 이루는 조직들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려서 의료진들끼리 상의를 내려본 결과 회복 불가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
" 회복 불가.... "
" 뼈라면 모를까 그런 조직들은 단순하게 늘어났거나 파열됐으면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기 때문에 방법이……. 예.... "
" ... "
" 유감이지만 아직까지 의술이 그 파괴된 조직들을 회복시킬 정도로 발전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치료를 할 방법도 전무합니다. 즉, 환자분은 앞으로……. "
" 뭐, 그 뒤에 말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무슨 말씀을 하실지 예상이 가네요. 그, 그만해주세요. "
" ... "
" 손톱으로 팔을 세게 짓눌러도 아픔은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요. "
손톱이 파고들어 송골송골 빨간 피가 맺히는 오른팔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바깥으로 뱉어내는 유진.
" 이제야, 조금씩 현실이 자각됨과 동시에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아, 내가 정말로 이런 꼴이 되어버렸구나 라고 말이죠. "
더 이상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은 힘든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말을 얼버무린 그는 슬픔과 절망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는 눈빛과 함께 그는 억지로 태연한 척을 바깥으로 보이면서 올라가지 않은 입꼬리를 위로 올려냈다.
하지만 어찌 사실을 숨길 수 있겠는가. 그것이 숨긴다고 숨겨질 만한 사실인가? 누구나 절망할 만한 사실을 접하고선 울거나 분노하기는커녕 억지로 태연한 척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며 스스로를 쓸어내리는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서 침묵을 유지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간적으로 용의자를 추궁하는 형사처럼 순식간에 눈빛을 날카롭게 세운 채 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 저, 죄송하지만 환자분. 갑작스럽고 정말 죄송한 말이고 자칫 잘못하면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꼭 하나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
" ...네? "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에 살짝 경계심을 내보이는 유진. 그러나, 그의 날 선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녀는 흡연실에서 윤지연, 그녀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 처음, 환자분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지연이, 걔도 자신은 그저 유진 씨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을 뿐. 정확하게 그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꼴이 됐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
" 네.... "
" 그런데, 제가 아까 말했지요? 보통 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나, 고속으로 달려오는 덤프트럭에 치였을 때 환자분처럼 몸이 뭉개지고 터져버린다고. 하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환자분은 차는커녕 면허증도 없다고 들었으며, 또한 발견된 곳은 애초에 자동차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새벽 시간 술집 골목이었다고 하던데. "
" ... "
"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원인 때문에 환자분이 그런 상태가 된 것인지 알고 싶은데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
그녀의 물음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 채 눈동자를 굴려 가며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여주는 유진의 모습에 그녀는 단순히 그가 그때 당시의 두려움으로 인해 저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고선 회유적인 말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순한 사고라면 저희가 처리를 도와줄 것이고 범죄라면 저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붙어 환자분을 도와줄 테니까요. "
" ... "
" 어느 경우든 간에 환자분께서 이야기만 해주신다면 전혀 손ㅎ... "
" 아니요. "
그러나, 그녀의 회유 섞인 말은 얼마 가지 못하고 불쑥 들어온 그의 말에 매정하게 끊기고 말았다.
" 사고도 범죄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서 도,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 ....사고도 범죄도 아니라.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
사고도 범죄도 아니라니. 그런 경우가 아닌데 몸이 저 정도로 박살이 날 수가 있을까? 아리송한 기분을 뒤로하고선 물음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이내 이어진 그의 대답에 자연스레 바깥으로 나오려던 욕설을 겨우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 단지 넘어진 것뿐이에요. 그것밖에 없어요.... "
* * *
임윤지라는 명찰을 달고서는 누가 보아도 의사라고 짐작할 수 있던 여성분이 나간 뒤 홀로 남은 병실 안 침대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던 그가 뱉어낸 단 한마디의 감상평.
" 정말, 맑다. "
하늘의 선녀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때와는 다르게 때 묻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밝게 빛나는 지금 이 하늘은 정말 빌어먹게도 좋아 보였다. 또한,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얼굴에는 희망과 행복이 가득 찬 채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 나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사람들처럼 밖으로 나가 공원에 앉아 바깥바람 잘 쐴 수 있는데. '
하지만, 역시나 이런 몸으론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무리겠지. 붕대로 칭칭 감긴 자신의 오른팔과 아무리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 다리를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얼굴에 그려내는 유진.
그 후 붕대를 감은, 아직 낫지 않은 상처 위를 재차 왼손으로 쓸어내려 보지만 고통은커녕 조금의 따끔함도, 어색함도, 아무런 느낌이 전해지질 않았다. 마치, 백화점에 서 있는 마네킹을 만지는 느낌이랄까.
분명 내 몸인데, 내 신체의 일부인데 내 몸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을 맴도는 감정은 분노와 절망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후회일 뿐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일까? 도대체 그가 무슨 이유에서, 어떤 후회를 가지는 걸까?
지나가 버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떨어지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후회일까? 그는 도대체 어떤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속 시원한 대답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답은 무엇일까? 정말로 지나가 버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를 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떨어지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후회일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일에 대한 후회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셋 중 그의 머릿속 안에 들어 있는 정답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있는 후회는 과거에 대한 후회도 아닌, 자신의 처지에 대한 후회도 아닌 생명에 대한 후회일 뿐.
"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
그렇다면 더 이상 이 지옥 같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버림받은 머저리 같은 삶을 이런 우스꽝스러운 몸을 한 채 살아가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
" 씨발, 뭐가 좋은데. "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 그가 머릿속에 가득하던 상념을 잠시 없애고선 고개를 뒤로 돌리자 모습을 보인 여성은 얼굴을 마귀같이 잔뜩 일그러뜨린 채 두 손에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 뭐가 좋냐고. "
딱 한 번 마주쳤던 얼굴. 그러나, 첫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해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던 얼굴. 그리고 희미한 기억 속 나와 함께해줬던 것으로 기억나는 그 얼굴.
윤지연. 그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