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어둠속의 빛
* * *
중환자실과 함께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보다 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곳인 응급실.
대부분의 응급실이 그렇듯, 응급실이라는 곳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곳이다.
단순 타박상 환자부터 시작해서 구급차를 타고 들어오는 의식이 없는 환자, 살이 찢어져 피를 펑펑 흘리는 사람, 사고로 중상을 입은 사람, 심장이 멈춘 사람 등 당장 생명이 위독한 상태의 환자까지.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가지각색의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때문에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또, 이러한 일들이 하루 이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벌어지는 게 바로 이 응급실이라는 곳의 일상.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상식처럼 통용되는 응급실의 일상에서 벗어나 마치 도사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적막만이 흐르고 있는 응급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유안 병원이라는 대형병원의 응급실이었다.
대형병원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환자라고 해봤자 단순 타박상 환자 몇 명을 제외하면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는 유안 병원의 응급실 모습.
" 으흠. 흠흠. "
" ... "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단순 타박상 환자의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아주는 소리가 다 울려 퍼질 정도로 고요한 응급실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신기함을 받게 만들었다.
뭐, 단순히 생각해본다면 원래 환자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 곳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잔뜩 어색해져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보다 어찌할 줄을 몰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들은 앞선 가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단순히 이러한 상황을 처음 겪어 어색해져 있을 뿐, 딱히 나빠지지는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으로서도 시끄럽지 않고, 적막만이 흐르고 있는 이런 응급실의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응급실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보다 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곳이다. 즉, 이곳에서 죽음의 경계를 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
아무리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직원들이라도 누군가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은 딱히 좋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은 마치 도사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응급실에 찾아온 고요한 적막에 어색해하면서도 내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매일 매일 이랬으면 좋겠네. "
피곤한 것인지 기지개를 피면서 툭 내던진 남자 직원의 한 마디. 정말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 중 그 말에 부정하는 사람들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 다들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좋은 소식이 들리면 나쁜 소식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법칙이지 않은가? 곧이어 그들의 귓가를 날카롭게 때리는 여성과 남성의 절박한 외침에 상념에 잠겨있던 그들의 머릿속이 하나둘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응급실 문을 박차고 한 남성을 안은 채 헐레벌떡 들어오는 한 여성과 눈물을 쏟아내며 그 뒤를 따르는 남성 두 명.
" 씨발! 빨리 아무나 여기 좀 도와줘! 존나 급하다고! 빨리 아무나 달려와! "
피부와 살갗이 찢어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은 뭉개져 있고 팔과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존재하는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피를 철철 쏟아내고 있는 남성을 안은 채 소리치고 있는 그녀.
한눈에 보아도 최소 중상, 혹은 그 이상의 심각한 상황에 여태까지 이상하게 이어져 오던 평화가 순식간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직원 중 안경을 낀 채로 지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던 여자 의사 한 명이 발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환자를 업고 온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 다들 뭐해요! 긴급입니다! 긴급 환자예요! 박 간호사님! 위쪽에도 전부 연락 돌리세요! "
" 네! 알겠습니다! "
" 보호자 분! 환자분 데리고 이쪽으로 오세요! "
아까 감돌던 적막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저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에 맞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그녀가 안내에 따라 비어있는 병상에 그를 살포시 눕혀놓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향해 다가가는 의사와 직원들.
그러나, 위독한 환자를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 늘 하던 것처럼 저마다 손에 장비들을 하나씩 든 채로 병상 가까이 다가간 그들의 표정은 동시에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 이런 씨발. 이게 무슨.... "
멀리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더욱 심각하고 위중한 외상, 간신히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 점점 약해져 가는 호흡과 계속되는 출혈까지. 눈을 잠깐이라도 떼는 순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환자였다.
여태까지 응급실을 전담하면서 이런 위중한 상태의 환자를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아직까지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모습은 처음 목격했기에 저절로 입술을 물어뜯은 의사는 곧바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 급속 안정제와 각성제 가져오세요! 혹시 모르니까 제세동기도 가져오고요! "
" 네 알겠습니다! "
" 외상이랑 내상도 생각 외로 너무 심각합니다! 전담 선생님께 핫라인으로 전부 연락 돌리세요! 여기서 긴급하게 응급 처치만 끝내고 곧바로 수술대 들어가야 합니다! 빨리 움직이세요! "
" 네 알겠습니다! "
" 호흡이랑 맥박 약해지고 있다고! 제세동기랑 급속 안정제, 각성제 빨리 안 가져오고 뭐 해!? 그렇게 굼뜨게 행동했다가 이 환자 목숨 잃으면 책임 질 거야!?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
약물이 들어 있는 커다란 주사기를 주입하는 것과 함께 제세동기를 준비하는 손놀림.
그러나, 의료진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그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들은 저마다 손톱을 물어뜯고 눈물을 훔치면서 발을 동동 굴리며 하늘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 어떻게 해? 저러다가 진짜로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창우야. 유진이 형 진짜로 저러다가 큰일 나면 어떻게 해? "
" 별일 없을 테니까 진정해. 지금 의료진분들이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큰일이 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애초에 너도 유진이 형 잘 알잖아? 저 형이 그렇게 쉽게 떠날 사람처럼 보여? 아, 아니라니까? "
" 저렇게 노력을 하는데 나을 기미는 안 보이고 더 심해지고 있으니까 그러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을 해! "
" 아 씨발! 그냥 좀 닥치고 있으라고! 네가 여기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게 있어!? 괜히 안 좋은 상상하면서 호들갑으로 의료진분들이랑 주위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기나 해! "
" 시, 싫단 말이야! 여기서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누나. 어떻게 좀 해봐! 아까 운전하면서 누나가 잘 아는 곳으로 간다고 했잖아! 그러면 여기가 바로 누나가 말한 거기란 뜻이잖아! 그러면 뭐라도 좀 해봐. 저러다가 유진이 형 큰일 나겠어! "
최대한 진정시키려는 창우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패닉에 빠져 길길이 날뛰면서 윤지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주저앉은 경섭은 눈물을 흘리면서 현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그러한 경섭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짜증을 숨기지 못한 창우는 이런 심각한 상황 속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매간의 불화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빠르게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경섭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예상외로 지연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가라앉은 분위기와 함께 그의 갈구에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제발 진정 좀 하고 있어. "
" 어? "
" 네가 그렇게 조르지 않아도 지금 대책을 내놓으려고 했다고. 그러니, 제발 창우 말처럼 괜히 지랄하지 말고 침착하게 마음 가다듬고 있기나 해. 지금 패닉에 빠지고 심각한 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
" 끅. "
" 성인이면 성인답게 행동해. 한두 살 먹은 어린애처럼 행동하지 말고. 알았어? 창우야. 너도 지금 혼란스럽고 마음 아프겠지만 경섭이 좀 잘 부탁할게.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새끼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부탁할게. "
" 네. 누나. "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동생을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창우에게 맡기고선 몸을 돌려 걸음을 움직인 그녀는 곧이어 무언가를 급하게 가지러 가고 있는 한 간호사의 어깨를 붙잡은 뒤 말을 걸었다.
" 저기요. "
" 네? 보호자 분. 무슨 일이세요? "
" 저 지금 저기서 응급 치료 받고 있는 환자 보호자인데 잠시만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 보호자 분. 혹시나 항의나 불만을 토로하시는 거라면 지금 당장 그만둬주세요. 지금 환자분 급하게 처치하고 있습니다. 워낙 상태가 위중해서 진전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 저희 의료진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부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기서 저희한테 무언가를 항의해도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
혹여나 그녀가 불만을 토로하려는 게 아닐까? 어림짐작한 간호사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는 뜻을 얼굴에 그려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뒤 그녀를 달랬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할 이야기는 의료진들에 대한 불만이나 항의 따위가 아니었다.
" 아니요. 항의나 불만을 토로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이야기니까 잠깐만 시간 내주세요. "
" 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
" 대부분 응급실이 그렇듯 여기 유안 병원의 응급실도 핫라인은 설치되어있는 거로 아는데 다른 게 있다면 여기 응급실의 핫라인은 병원장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지요? "
관계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마치 제집 안방 드나들듯이 태연하게 말하자 간호사는 벙찐 얼굴을 띈 채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으신.... "
" 긴말 안 하겠습니다. 당장 핫라인으로 병원장님 연결해주세요. "
" 아니, 잠깐만요. 보호자 분. 지금 보호자 분이 관계자도 아닌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둘째치고 애초에 병원장님을 연결해달라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
" 그게 왜 말이 안 됩니까. 이 유안 병원 안에서 의술과 함께 이러한 긴급 환자를 제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병원장이라는 사실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애초에 제가 굳이 이곳 유안 병원의 응급실로 달려온 이유는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다름 아닌 병원장님 때문이라고요. "
" 그게 무슨.... "
다른 병원의 응급실도 많지만, 굳이 이곳 유안 병원의 응급실로 그를 데리고 온 이유는 단순히 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었다.
" 진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나 윤지연이에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혹여나 이번 일로 간호사님께 불이익이 발생한다면 베레카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확실한 책임을 져드리겠습니다. "
" 네? 베레카 길드.... 아, 설마 그 윤지연? "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진정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곳 유안 병원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임윤지 라는 병원장 때문.
임윤지. 유안 병원의 병원장. 1세대 헌터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최고의 힐러라고 불렸던 존재.
헌터 생활을 은퇴 후 사비로 병원을 설립. 아낌없는 투자로 순식간에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으로 등극, 현재까지도 많은 환자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진정한 의인이라고 불리는 존재. 그리고, 동시에 빈약한 나의 전화번호부 목록을 채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 그러니, 윤지 언니 지금 당장 여기로 불러주세요. "
인맥의 힘을 사용할 때였다.
* * *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붕 뜬 머리를 뽐내며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헐레벌떡 달려오는 중년의 여성. 그러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런 그녀를 보고 웃음을 보이지도, 조롱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저런 우스꽝스럽고 퀭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성은 이곳 유안 병원의 원장이자,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1세대 헌터였으며 또한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최고의 힐러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 임윤지였으니까.
" 윤지 언니. "
" ... "
한때는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1세대 헌터와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는 헌터의 눈빛 교환이 이루어지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지만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기에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 만남의 해후를 풀 시간도 없이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회포는 나중에 풀자. 지금은 일해야 할 시간이니까. 그렇지? "
" 맞아. 내가 나중에 진하게 한 번 풀코스로 대접할 테니까 지금은 부탁할게.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언니밖에 없어. "
" 알았어. "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지연. 곧이어 옷을 깔끔하게 고쳐 입은 그녀가 오유진이 누워있는 병상으로 다가가자 오유진을 맡고 있는 의료진들과 더불어 직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려 했지만, 곧바로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 지금 상황이 긴급하게 돌아가는데 인사는 무슨 인사야! 다들 환자 살리는 데 집중 안 할 거야!? 더군다나 환자 맡고 있는 의료진이 처치 중에 한눈팔면 어떻게 해!? "
" 죄, 죄송합니다. "
" 됐어. 지금부터 내가 처치할 테니 옆에서 보조하도록 해. 그럼 지금 환자 상태.... 이런 씨발. "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병상 위에 누워있는 그의 상태를 목격한 순간 그녀 또한 저절로 욕설을 뱉어냄과 동시에 인상을 잔뜩 찌푸려냈다.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동시에 게이트 안에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힐러로서도 정말 많은 꼴을 봐왔지만 이러한 심각한 수준의 상처를 입은 사람, 그것도 일반인 남성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
하지만, 베테랑답게 곧바로 정신을 고쳐잡은 그녀는 손바닥에 빛의 구체를 띄워내더니 구체적인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
" 정확하게 환자 상태가 어때? "
" 보시고 있는 것보다 상황 더 심각합니다.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 전부 다 거의 작살난 수준이에요.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게 더욱 신기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외상, 내상을 입은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인지 출혈 또한 심각한 수준이고 맥박이랑 호흡 또한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
" 조치는? "
" 임시방편으로 급속 안정제, 각성제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별다른 소용이 없어서 다른 선생님들 준비 끝내고 수술대 들어가기 전까지 응급처치 계속 실시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
" 나름대로 적절한 조치를 전부 취했군. "
" 예. 할 수 있는 조치는 전부 취하고 있고, 시행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떤 조치를 계속 취하더라도 상태가 좋아지기는커녕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수술대 들어가기 전까지 유지가 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해서.... "
" ... "
사실상 가망이 없다는 의료진의 말에 더욱 절망에 빠져드는 경섭과 입술을 짓물러 뜯는 창우. 그러나 유일하게 윤지연, 그녀만큼은 감정의 동요는커녕 오히려 태연한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젊은 의사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임윤지. 그녀가 누구인가?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1세대 헌터이자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최고의 힐러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거기에 더불어 현대 과학이 접목된 의술까지 익힌 그야말로 사람을 치료하는 데는 도가 튼 여성이 바로 임윤지. 그녀이다.
그렇기에 윤지연은 지금 당장에라도 윤지 언니가 손에 빛의 구체를 두르고선 병상에 누운 채로 점점 떨어져 가는 맥박만을 울리고 있는 그를 순식간에 치료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의 낙관적인 생각은 그리고 오래가지 못하고선 한 줌의 모래처럼 바스러지게 되었다.
" 심폐소생술이랑 응급처치는 여기서 끝낸다. 대신 급속 안정제랑 각성제 최대로 투입하고 수술실로 옮길 준비해. 내가 집도한다. 그리고 핫라인으로 애새끼들한테 전부 다 직통으로 전화 때려서 내려오라고 해. 긴급이다. "
" 네? "
" 귀먹었어? 급속 안정제랑 각성제 최대로 투입할 준비 하고 동시에 수술실로 옮길 준비 마치고 핫라인으로 전부 전화 싹 돌리라고! 뭐가 이렇게 굼뜬 거야! 이딴 식으로 행동할래!? "
" 자, 잠깐만요. 병원장님. 전화는 둘째치고 이미 급속 안정제랑 각성제는 환자에게 충분히 투입했습니다. 이미 한계치라고요. 아무리 건강한 정상인이라도 한계치를 넘어서 투입하는 순간 몸이 망가지는데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환자에게 한계치 이상을 투입했다가는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
" 이대로라면 수술대 들어가기 전까지 유지가 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안정제랑 각성제를 한계치까지 투입해 최대한 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어. "
" 애초에 병원장님은 힐러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지금, 이 순간 능력을 쓰시기만 하더라도 환자는 치유가 될 텐ㄷ..... "
" 안 돼. "
" 네? "
" 안 된다고. 내가 아무리 치유 능력을 쓴 다음 별 지랄 염병을 다 떨어도 이 환자 절대로 치료 안 돼. "
" ..... "
" 이 환자 살릴 수 있는 방법 이것밖에 없어.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돼서 두 손 두 발 다 놓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거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뭐든 시도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이 새끼들아!? "
" .... "
"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행동해. 이 새끼들아! 지금 이렇게 굼뜨고 있을 시간 아니야! "
그녀의 호통에 벙찐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각각 다시 행동에 돌입한 의료진들은 저마다 역할에 맞춰 또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의 총책임자가 된 임윤지, 그녀 또한 심호흡을 가다듬은 뒤 병상에 누운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그를 구원해내기 위해 다른 의료진들이 가져올 급속 안정제와 각성제를 투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곧이어 그녀의 몸을 낚아채는 거친 손길에 그녀의 몸이 자동문처럼 힘없이 뒤로 돌려져 버렸다.
악귀 같은 눈빛을 빛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격양된 감정과 기운을 뽐내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는 윤지연.
" 언니. 치유가 안 된다고?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
" 말 그대로 이 환자한테는 내 능력을 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소리야. "
" 지금 그게 무슨....!? "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아까까지 진정하라고 본인이 주의를 줬던 경섭보다도 흥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지연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들어 올릴 기세를 뿜어대면서 그녀를 향해 잔뜩 거친 말을 쏟아 보냈지만 곧이어 들려온 임윤지, 그녀의 한 마디에 아무런 저항도, 뒷말도 붙이지 못한 채 힘없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저절로 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너라면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부어봤자 그 독에 물이 찰 것 같아? "
" .....설마. "
"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내 능력으로는, 아니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힐러 중 순전히 능력만으로 이 환자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나 믿고 기다리기나 해.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