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폭발
* * *
잠시 이어지는 침묵 속,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자기 자신을 창남으로 지칭하는 발언에 핏대를 세우며 반항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정상 일터.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여 그녀의 말에 부정을 하기는커녕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고선 눈동자를 떨고 있었는데, 그것을 목격한 그녀는 하얀 담배 연기를 뱉어내면서 얼굴 위에 썩은 미소를 그려내더니 곧이어 깊게 타들어 간 담뱃재를 그의 얼굴 위에 털어냈다.
" 눈깔 떠는 거 보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짐작하는 것 같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거 맞으니까 그러니 잔대가리 굴릴 생각 하지 마.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괜히 어설픈 변명 지껄이면서 모면하려고 하면 칼로 입을 찢어버릴 거니까. "
" ... "
얼굴 위에 떨어지는 담뱃재를 아무 말 없이 받아내는 그를 뒤로하고 살 떨리는 경고와 함께 그의 뺨을 툭툭 건드리는 그녀는 잠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자고로 남자는 조신해야 하며 순결을 지키고 지조를 지키며 다른 여자와는 접촉은커녕 눈길도 줘서는 안 되고 오직 지어미만을 모시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런데 만약 네가 내 말을 어기고선 이상한 짓거리를 한다면 난 널 찢어서 죽여버릴 거라고 경고했던 거 말이야. 분명 기억할 거야. 아무래도 내가 귀에 딱지가 눌러앉을 정도로 심심할 때마다 말했으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거야. "
" ... "
" 뭐, 너도 알다시피 네가 다른 여자들이랑 붙어먹는다면 찢어서 죽여버릴 거라고 경고를 했던 게 그냥 빈말로 한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실제로 난 네가 하늘 같은 지어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뒤로하고 다른 여자한테 달려가는 순간 사지를 찢어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어. 내가 또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
" ... "
" 그런데 막상 그게 실제로 딱 다가오니까 신기하게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지더라? 아, 정말로 거짓말 하나도 안 섞고 아까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막 분노에 차올라서 당장 너를 찢어서 죽여버리겠다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공허함과 허탈감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 와, 이거는 진짜 말로 설명을 해주고 싶은데 딱히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까 원, "
아까전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헛웃음을 내뱉은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그 허탈한 감정을 그에게 더욱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냥 넘겨버리기로 하고서는 허공에다 손을 한 번 휘저었다.
" 아무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있었던 일들이랑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충 마무리하고 일을 끝내고선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오면서 왜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느껴졌을까? 정말 골똘히 생각을 해봤거든.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답이 금방 나왔는데 이유가 뭔지 알아? "
" ... "
" 내가 너를 꽤 신뢰하고 있었다는 거야. "
그를 똑바로 마주보는 선유린.
" 물론, 지랄 염병을 떨 때도 있었고, 실수해서 나한테 뒤지게 처맞으면서 욕까지 얻어 처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너는 웬만한 남자들이랑은 다르게 내가 앞서 말했던 것들을 잘 지켜주면서 알아서 착착 행동해줬잖아?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아! 얘는 다른 남자들이랑 약간 다르구나, 잔 실수가 있고 아직까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그래도 꽤 믿을 만한 새끼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너를 신뢰하게 된 거지. "
" ... "
" 그래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 순간, 은연중에 너에게 가지고 있던 신뢰가 산산조각 나게 돼버렸고, 그로 인해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허탈감을 먼저 느껴버린 거지. "
피로 젖어, 마치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축축이 젖어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는 아까 전 그를 무참히 폭행할 때의 광기 어린 눈동자 대신 조금은 슬프고, 쓸쓸한 눈동자를 띈 채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그런데 유진아. 내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노보다는 허탈감을 먼저 느꼈다고 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깨달았다고 했잖아? 그러면, 곧바로 그 뒤를 이어서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감정은 과연 뭘까? "
그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쓸쓸함이 감돌던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광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녀는 어느새 필터 끝까지 닳아 없어진, 그러나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담배를 꼬나 쥐고서는 몸을 틀어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채 너덜너덜해져 걸레짝이 되어버린 그의 볼에 꽁초를 맞대고선 사정없이 지져버리기 시작했다.
" !!!!!!!!! "
불씨가 살아있는 꽁초가 걸레짝이 되어버린 그의 볼에 닿자마자 살갗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살갗이 타들어 가는 역겨운 냄새를 풍겨냈지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오히려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 그의 볼에 대고 있는 꽁초를 더욱 사정없이 비벼댔다.
당연하게도 온몸에 전해지는 격통에 활어처럼 몸을 버둥버둥 움직이면서 다시 한번 그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안타깝게도 입안에 잔뜩 고여있는 핏물과 살점들 때문에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그 후, 불씨가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의 볼에 꽁초를 비벼댄 그녀는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바닥에 쓰러져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다시금 그를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 바로 지독한 분노야. 이 씨발 개 버러지 같은 창남 새끼야. "
짝ㅡ
" 씨발, 내가 단순하게 손만 잡았으면 이러지도 않지. 뭐? 스스로 먼저 다가가서 입을 맞추고, 옷을 벗고, 몸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고, 몸까지 섞어도 된다고 했다고? 이런 씨발 개 버러지 같은 창남 새끼를 봤나!? "
허탈한 감정 뒤에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감정은 다름 아닌 지독한 분노. 이 세상을 화염으로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거대한 분노였다.
" TV 속에 나오는 연예인도 아니고, 등급이 높은 헌터도 아니고, 대학교 같은 과 여자 새끼들도 아니고, 하다못해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한테 판 것도 아니고 씨발,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혐오하고 봊같아 하는 그 뚱땡이 새끼한테 몸을 팔아치워!? "
짝ㅡ
청아한 소리와 함께 이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곤죽이 되어가는 얼굴과 계속된 타격으로 제힘을 잃은 뒤, 마치 수박을 먹다 씨를 뱉어내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피로 물든 새하얀 이빨들.
" 야, 까고 말해서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너는 그런 더러운 새끼한테 몸을 팔아 재끼고 싶냐? 내가 남자였으면 그 새끼 얼굴을 딱 보자마자 잔뜩 세워져 있던 발기 자지도 저절로 죽어버릴 것 같은데 너는 아니었나 보지? 왜? 그 뚱뚱한 살집이 아주 매력적이었나 봐? 그 거대한 살집에 자지라도 파묻고 싶었어!? "
짝ㅡ
"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새끼야! 구해주고 키워줬던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딴 식으로 날 배신을 해!? 넌 내 소유물이야! 소유물 주제에 감히 주인을 농락해!? 이 씨발, 사지를 전부 찢어도 시원찮을 버러지 같은 창남 새끼가! "
절규와도 같은 외침 후, 선유린은 힘에 부치는 것인지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 손바닥을 하늘 위로 치켜세워 그의 뺨을 후려칠 것이라는 뻔한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더 이상 손을 휘두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놓아버리면서 그를 바닥으로 고꾸라뜨린 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내가 그래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이 분노가 풀릴 수 있을까? 너를 어떻게 조져야 할까? 정말 생각을 많이 해봤거든. 솔직히 마음 같아선 그 뚱땡이한테 몸뚱아리를 팔아치운 네 사지를 다 찢어서 젓갈로 담가버린 다음 어디에 전시하든지 땅에 뿌리든지 하고 싶은데 참 법이란 게 조금 그렇잖아...? "
" ... "
" 법이란 것만 없었으면 젓갈을 담그든 팔다리만 잘라서 집에 방치해두든 했을텐데 솔직히 너도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조금 쉽고 단순하게 접근하기로 했어. "
그 후, 곤죽이 되어버린 그를 뒤로하고선 몸을 뒤로 돌려 현관문 쪽으로 다가간 후 신발장 문을 열어젖힌 그녀가 꺼낸 물건은 다름이 아니라 형광등 빛에 비쳐 평소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자태를 뿜어내는 알루미늄 야구 배트였다.
"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 죽이려고. 이렇게 하지 않은 이상은 내 분노가 도저히 풀릴 것 같지가 않을 것 같아. "
야구 배트를 질질 끌어온 후 신발을 신은 채 그의 머리를 발로 밟은 그녀가 야구 배트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익살스러운 웃음을 보이자 공허함만을 표출하던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시,싫어. '
단순히 옆구리를 찌르는 것 만으로도 격통이 찾아오데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걸 맞는다고? 그래, 차라리 한 두번 맞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아내의 성격상 한 두번 휘두르고 끝낼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다.
죽는다. 이건 진짜로 죽는다.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아도 두 번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몸을 지배해나갔다.
" 아, 아...... 사, 살려 주세..... "
누군가가 말했지.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오면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고. 당장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위기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그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자신의 얼굴을 밟고 있는 그녀의 신발을 힘겹게 두 손으로 잡고선 더듬거리면서 애원의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 야, 뭘 이 정도 가지고 살려달라고 지랄병이야. 처음에는 칼로 난도질할까 생각했는데 그럼 백방 죽을 게 뻔하니까 내가 일부러 낮춰준 거라니까? 얘가 뭣도 모르는 주제에 내 깊은 배려는 파악하지도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상황을 판단하려고 드네? 솔직하게 말해서 남편이라는 새끼가 몸이나 팔고 다녔는데 이렇게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는 아내가 세상에 어디 있냐? "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발을 잡고 있는 두 손을 야구 배트로 사정없이 찌르며 치워버린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도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고 곧이어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칠 준비를 하듯이 그의 머리통을 야구공처럼 눈여겨보면서 야구 배트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 자, 그러면 어디 한 번 집행해보실까? 야, 긴장 풀어. 인마! 내가 설마 너를 죽이기야 하겠냐? 물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래도 다 자업자득인 거 알지? 네가 초래한 결과니까 어른으로서, 성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
이제 집행의 때가 온 것인지, 그녀가 허공에다 배트를 휘두르자 인간의 위험본능을 자극하는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워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신발에 얼굴이 짓밟힌 채로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
' 어째서 나는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
어째서 나는 아내에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나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러한 의문이 공포로 가득한 그의 머릿속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키스를 허락하고, 옷을 벗고, 몸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고, 몸까지 섞어도 된다고 했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 나는 그런 허락 따위 내린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녀를 유혹했다고? 꿈속에서도 벌어질 수 없는 허황된 소리였다.
나는 스스로 그녀에게 몸을 판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내의 미래와 집안의 미래를 저당 잡힌 채 그녀에게 강제로 착취당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어느정도의 몸을 허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아내를 지키기 위해, 집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손길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 사람의 손길이 내 몸을 훑을 때마다 기쁨은커녕 조금의 미소조차 지은 적이 없었다.
" 아, 아니……. 야. "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는 속사정. 그러나, 왜곡되어있는 진실만을 믿고 있는 아내를 일깨워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어떻게든 입을 떼보려 노력하는 그였지만, 이미 힘을 다해 무너져버린 몸의 밸런스는 단순하게 입을 떼는 것 조차도 힘겨워하고 있었고 또한, 그의 말을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 또한 한몫을 하고 있었으니 모든 것이 그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었다.
" 입 안 벌리는 게 좋을 거야. 혹시나 그러다가 잘못돼서 혀 깨물어버리면 여러 가지로 귀찮게 되거든. 물론 일차적으로는 네가 제일 아플 테니 알아서 처신해라? "
" 아니라고요...... 판 게 아니야...... "
" 어이구? 그러세요? 판 게 아니라고요? 그나저나, 뭘 판 게 아니야? 네가 장사꾼이냐? 아니지! 하긴, 주인한테 허락도 안 맡고 자기 마음대로 몸이나 팔아 재끼니까 장사꾼이 틀린 말은 아니겠네. 조금 고급지고 전문적인 단어로 말하자면 창남이고. 아무튼, 시끄럽고 많이 아플 테니까 아가리 닫고 있어라. "
" 내 의지로 판 게 아니라고....... 내 의지로 판 게 아니……. 야. 제발 내 말을 들어줘....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
쿵ㅡ
방망이를 휘두를 때 회전축으로 쓰이는 광배근과 상체와 하체를 이어주는 동시에 순간적인 힘을 내는 엉덩이 주위 근육, 무릎을 구부릴 때 쓰이는 비복근과 몸을 지탱하는 근육인 전경골근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근육이 조여지고 움직이고 두드러지면서 동시에 바람을 찢어버리는 파공음과 함께 서서히 눈앞으로 다가오는 선명한 야구 배트의 모습.
' 어째서 아내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
어쩌면 짧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본다면 길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인 2년 동안 부부의 관계로 한 집에서 같이 지낸 나보다 그 뚱땡이가 더 믿음직스러운 걸까? 그런 걸까? 글쎄, 이젠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