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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60화 (60/77)

〈 60화 〉 폭발

* * *

자욱한 연기가 가득한 화장실 속, 창문 바깥으로 내리는 빗소리처럼 세차게 내리는 샤워기의 물을 가만히 맞으면서 거울을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과 함께 다시 한번 힘겹게 칫솔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 !! "

그러나, 칫솔을 입안으로 집어넣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

마치, 입안에서 벌어지는 불꽃 축제 같은 욱신거림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치약이 이빨이 닿기도 전에 다시금 칫솔을 바깥으로 빼내 버렸고 곧이어 세면대에 복부를 기대고선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 역시, 전부 다 터진 게 맞나보네. "

맛있는 음식을 한입에 먹을 때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서 혹여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화장실 조명에 의지해 입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예상한 대로 입안은 터지다 못해 거의 걸레짝이 되어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까처럼 입 밖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힐끔힐끔 보이는 빨간색 색깔부터 시작해서 혀끝에서 알싸하게 금속 맛이 나는 것을 종합해보니 아직까지 입안에 피가 고여있거나 맺혀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 퉤. "

확인을 위해서 침을 뱉어내자 침과 함께 딸려 나오는 빨간 피와 정체 모를 이물질들은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에 그의 미간은 저절로 좁혀졌고 눈썹 또한 씰룩쌜룩 움직이며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 하아. "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뭐,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놀랍거나 충격에 빠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남자 중에서도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내가 여성, 그것도 일반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헌터한테 맞은 것인데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면서 아까 이지아, 그녀와 대화를 할 때는 왜 괜찮은 척, 안 아픈 척을 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녀와 대화를 할 때 괜찮은 척한 이유는 단순히 그녀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미안한 마음에 더 이상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괜히 알렸다가 일이 커져 내가 다친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입에 담기 힘든 끔찍한 광경들이 무조건 펼쳐질 터. 이건, 나를 위한 결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를 도와준 그녀를 위한 결정이기도 한 것이다.

" 그나저나, 이빨 닦아야 하는데.... "

여태껏 입맞춤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래왔고, 무엇보다 아까는 내 입술 안으로 아내가 아닌 외간 여성의,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기 그지없고 추잡스럽기 짝이 없는 그 뚱땡이의 혀가 침투했기에 당장이라도 칫솔로 구석구석 입안을 닦아내 남아있는 흔적들을 한시라도 빨리 지워내고 싶었다.

사실, 고민할 이유가 하등 없는 당연한 행동이다. 아내가 아닌 다른 외간 여성과의 입맞춤, 그것도 혀가 섞였는데 흔적들이 남아있는 입안을 청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 이것은 나 스스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입안 상태가 이래서야 칫솔로 입안을 닦기는커녕 물로 입안을 헹구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 해야 하는데……. 윽! "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잠시 접어두고서 다시, 결연한 표정과 함께 심호흡한 뒤 굳게 마음을 먹은 그가 칫솔을 입안으로 넣어 입안에 남아있는 그 더러운 자식의 흔적을 지워보려고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입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얼마 가지 않고 그는 다시 칫솔을 입 밖으로 빼내 버렸다.

입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을 때마다 온몸에 동반되는 격통. 그리고, 저절로 새하얗게 변하는 눈앞까지.

' 무리야. 이건 정말로 무리야. '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고 웬만하면 나도 아픔을 참아가며 꾸역꾸역해보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 양치를 하는 것은 무리라고 느껴진다.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돼버린 입 안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아직 곳곳에 남아있었고 피 또한 고여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칫솔을 넣고 양치를 감행했다가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류 같은 찌릿함과 따끔함에 정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노릇.

억지로 아픔을 참아가면서 감행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하루 정도는 놔둔 뒤 입안에 있는 큰 상처들이 아물어야 가능할 것 같다. 즉, 다시 말해서 오늘은 억지로라도 양치를 감행할 수는 없다는 게 결론이다.

입안에 남아있는 찝찝한 그 뚱땡이의 흔적과 하루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칫솔을 신경질적으로 세면대 안으로 던져버린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짜증 나, 더러워. '

하루 동안 그 사람의 흔적과 함께해야 한다니.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서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짜증이 솟구쳤지만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 그것이 나를 더욱더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 * *

도저히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창밖으로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똑딱똑딱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새벽 두 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모두가 곤히 잠자리에 들어 있어야 할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의 집은 여전히 창밖으로 밝은 빛을 비추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눈을 세로로 치켜세운 뒤 집안을 비추는 거실 등과 함께 뜬 눈으로 TV를 멍하니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는 유진.

그가 시청하고 있는 TV프로는 유명 남성 MC와 개그맨들이 등장해 토크를 나누는 간단한 예능프로였는데, 소소한 재미와 남자답지 않은 화려한 입담과 과감한 행동 덕분에 한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은 프로였다.

당연하게도 토크쇼이므로 TV 속에 비치는 남자 MC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이어 자지러질 듯이 웃음을 보였는데 정작 그걸 보고 있는 그는 박장대소는커녕 조금의 미소조차 얼굴에 그리지 않고서는 무표정으로 TV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재미없어. "

이 세상에 떨어진 지도 꽤 됐고 그 덕에 웬만한 것들은 이미 적응이 완료된 후인데 어떻게 이 세상의 예능프로들은 아무리 적응하려고 용을 써봐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걸까?

저게 과연 재밌는 걸까? 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아, 물론 나를 제외하고선 대부분 사람들은 전부 다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게 더 흥미가 생길 정도였기에 최악의 감상평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흥미가 생기는 채널을 찾으려고 리모컨을 조작해봐도 나오는 것들은 똑같은 내용만을 반복하는 지루한 뉴스와 시답지도 않은 티비 프로들뿐.

" 안 봐. "

결국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꺼버린 그는 리모컨을 소파 구석으로 던지고선 짜증 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뒤 몸을 뒤로 눕히고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 '

남들이 본다면 이렇게 늦은 시각에 침대에 누워서 곤히 잠에 빠져들지 않고 뭐 하는 거냐고 이야기나 잔소리 등을 할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운명에 놓인 사람이다.

아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침대에 누워서 먼저 잠을 자고 있는다? 그건 우리 집에서 사형감으로 취급된다.

더군다나 아내가 따로 말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전화를 해서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그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잠을 자면 내가 과연 어떻게 될까? 이후에 일들은 안 봐도 비디오이지 않을까?

뭐, 그렇다고 해서 잠이 미칠 듯이 쏟아지는데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난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 덕분에 잠에 빠져들고 싶어도 빠져들 수가 없었다.

" 아파. "

왜냐하면 양치를 시도하기 전, 몸을 씻어내면서 허벅지, 가슴, 엉덩이 등등 나의 은밀한 곳과 예민한 곳을 함부로 쓰다듬고 만지던 그 더러운 뚱땡이의 손길을 확실하게 지워내기 위해 비누로 몸을 세게 문지르다 보니까 팔이랑 다리가 좀 많이 망가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비누로 몸을 세게 문질렀다고 팔이랑 다리가 망가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몇십분간 반복해 계속 자극을 주다 보니까 이미 내 두 팔과 두 다리는 손으로 단순히 문지르기만 해도 피부가 벗겨져 피가 솟구칠 것처럼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나에게 말 못 할 격통을 계속 선사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할 터. 그리고, 애초에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함 또한 내 잠을 방해하고 있는 요소다.

강간당할뻔한 아까 일.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까지 가기 전 나는 구원받았고 동시에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악몽 같던 일은 완전히 종결되었고 이러한 사실들이 아내에게 들키면 안 되기에 아내가 집에 들어오기 전 아무리 괜찮은 척,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힘들고 무서운 감정과 불안함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잔다면 필시 괴로운 악몽을 꾸게 될 터. 회복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때까지는 원활한 숙면을 보장받지 못할 게 뻔해 보인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나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고 자려고 한다면 아내가 집에 들어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침대에 눕기는커녕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집의 정해진 규칙이자 룰.

고요한 적막 속, 집안에 들리는 소리는 쌕쌕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창밖에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 그리고 똑딱똑딱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뿐.

세 가지의 소리가 혼합된 황량한 황야와도 같은 집안 속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두 팔로는 무릎을 감싸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쓸어내렸고 곧이어 눈을 질끈 감아내더니 아내를 생각하면서 아주 쓸쓸하고도 처량한 모습과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읊조렸다.

" 이런 저런 일들이 있다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 같이 있고 싶네요. 빨리 와줘요. "

띠ㅡ 띠ㅡ 띠ㅡ

그 순간, 거짓말같이 현관문에서 들리는 도어락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뜬 그가 화들짝 놀라더니 곧이어 상황을 파악하고선 미어캣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 옷매무새를 주섬주섬 다듬은 후 황급히 현관문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말 환상적인 타이밍이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머릿속으로 아내를 떠올리면서 혼잣말을 할 때 딱 도어락 소리가 들리는 걸 인지하자마자 팔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는데 솔직히 이런 환상적인 타이밍이라니. 좀 놀랍다.

'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네. '

내 예상으로는 새벽 3시는 넘어서 올 줄 알았는데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2시 30분도 되지 않은 굉장히 이른 시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일찍 온 게 불만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늦게 오지 않고 일찍 와줘서 고맙고 반가운 마음이 들 뿐.

현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아내는 그야말로 정말 아름다웠다. 오늘 줄곧 같이 있었던 그 더러운 뚱땡이 새끼와는 당연하게도 비교가 되지 않으며 나를 구원해준 그녀와도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내는 화려한 외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면서도 아름답고 집안을 지탱하는 가장의 모습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지은 뒤 여태 매번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녀를 반겨주려 가까이 다가가던 그는 불현듯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영문모를 위화감에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선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뭐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어두운 낯빛인데 사실, 어둡다기 보다는 화를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인 것 같다. 아무튼, 일터에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던 걸까? 아내는 왜 저런 표정을 짓고선 잔뜩 위험해 보이는 기운을 뿜어대고 있는 거지?

일단 뭐든지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음으로 행동에 조심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인다.

' 정확하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눈치껏 아내의 기분이 굉장히 다운되어있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평소처럼 반갑고 활발하게 맞이하기보다는 예의를 갖추고선 차분하게 맞이해주는 게 올바른 선ㅌ.... '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고선 계산을 마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먼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받아 든 뒤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려고 한 그의 행동은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짝ㅡ

적막한 집안 속 울려 퍼지는 청아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몸이 허공을 박차고 순간적으로 공중에 뜬 후 바닥을 뒹굴었기 때문이니까.

" 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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