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폭발
* * *
12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
수많은 직원이 왕래하며 활기찬 기운을 뿜어내던 사무실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늦은 밤이 되자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을 해 광활한 평야와도 같은 거대한 사무실 안에는 짙은 어둠과 소름이 돋을 정도의 깊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 속에서 검은 정장을 걸쳐 입고 허리춤에 긴 장도(?)를 찬 백발의 중년 여성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업무의 연장을 모조리 마치고 난 뒤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해 하품을 내뱉으면서도 비틀비틀 걸어가는 여성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포근한 침대에 몸을 맡겨 달콤한 잠에 빠지고 싶다는 욕망을 얼굴에 내비치면서 아까보다 더욱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재촉하던 여성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사무실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쾅ㅡ
누군가가 주먹에 감정을 담아 휘두르는 소리에 이어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찌그러지는 소리까지.
" ...? "
분명 자신밖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사무실 안에서 영문모를 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 세운 여성은 고개를 갸웃 움직이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가며 방금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소리의 진원지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 하. "
긴장감에 기감을 곤두세운 채 허리춤에 맨 장도에 손을 올리고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본 결과, 여성은 어렵지 않게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가 귀신이나 침입자로 인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채고선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려냈다.
장도에 올린 손을 뗀 여성은 곧이어 무언가에 홀린 듯 홀로 어두운 내부를 환히 비추는 사무실 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고,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다다르자마자 입가에 건 미소를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바꾼 채 파티션 위로 얼굴을 쏙 빼 올리면서 능청스럽게 읊조렸다.
" 오늘도 잔업이야? "
파티션 위로 얼굴을 드러낸 뒤 능청스럽게 묻는 중년 여성의 질문에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남은 채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있는 젊은 여성은 중년 여성의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하며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예? "
" 오늘도 잔업이냐고. "
" 아, 예 뭐, 그렇게 됐네요. "
" 흐하하하하! 아니, 내가 알기론 어제도 잔업하고 그저께도 잔업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집에 안 들어가? 그 나이에 가출했어? "
" 저도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마음대로 되지를 않네요. 오늘만큼은 진짜 일찍 갈 줄 알았는데 저번처럼 또 길드장이 따로 부탁한 일들이 양이 꽤 많아서 반강제로 아직까지 귀가를 못 하고 있습니다. "
정성스레 대답해줄 시간이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일을 하느라 바빠서 대답을 해주기 귀찮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녀와 책상 한쪽에 에베레스트산 처럼 높게 쌓여있는 서류 더미들을 번갈아 가며 본 중년의 여성은 측은한 눈빛과 함께 절레절레 혀를 내둘렀다.
" 길드장도 너무하네. 홑몸도 아니고 집에 남편이 있는 사람한테 며칠째 계속 야근이라는 시련을 내려주다니. 이번에는 또 무슨 해괴망측한 이유로 일을 떠맡은 거야? "
" 본인이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있다던가 뭐라던가 하긴 했는데 애초에 귀담아듣지를 않아서 자세히 말해드릴 게 없네요. "
" 씨발,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거랑 네가 야근을 해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야? "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
피식 웃음을 짓는 여성.
" 수고가 많네. 서류 더미 보니까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은데 힘들겠다. "
" 아니요. 뭐, 보기에는 많아 보이는데 실상 엄청나게 간단한 잡무들뿐이라서 대충 한 시간 정도만 빡세게 집중하면 전부 끝날 것 같아요. 아무리 늦어도 새벽 두 시 안까진 들어가겠죠. "
" 고생 많네. 좀 쉬어가면서 해. 아무리 헌터가 일반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체력을 가지고 있어도 계속 무리하면 결국에는 고장 나버린다니까. 젊은 나이에는 뭔 지랄을 해도 크게 체감이 안 되겠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엄청 고생해. "
" 아직은 쌩쌩해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괜히 쉬었다가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질 바에 차라리 빨리 끝내놓고 집에 돌아가서 쉬는 게 낫죠. "
" 그래,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미루지 않고 얼른 끝내자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앞서 말한 쌩쌩해서 괜찮다는 말은 난 절대 동의를 못 하겠는데?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그런 소리는 아마 안 할 걸. "
빨갛게 충혈된 눈, 구부정하게 앞으로 나와 있는 비정상적인 목, 창백한 안색,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고 안쓰럽게만 보일 뿐인데 본인이 쌩쌩해서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중년의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색하게 이어지는 뻘쭘한 침묵의 순간, 머리를 긁으며 무안하다는 기색을 뿜어내는 그녀를 보며 못 당하겠다며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낸 여성은 품속을 주섬주섬 뒤져 에너지 드링크를 책상 위에 살포시 놔둔 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심을 담아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 힘내라. 먼저 간다. "
" 아,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
더 이상 구구절절 온갖 사족을 붙여 이야기를 걸면 괜한 민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위로와 격려의 말도 간결하게 전한 여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감사 인사를 배경음악 삼아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후 출입문을 열고 나가는 백발의 여성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책상 위에 놓고 간 에너지 드링크의 뚜껑을 열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질끈 감는 젊은 여성이자 길드에 들어 온 지 오랜 시간이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입인 D급 헌터 선유린은 욕설을 내뱉었다.
" 아, 씨발. "
에너지 드링크를 꿀꺽꿀꺽 들이마시고 정확한 조준으로 쓰레기통에 던져 집어넣은 후 곧바로 익숙하게 품에서 담뱃갑을 열어젖힌 뒤 주머니에 있는 라이터를 꺼내는 그녀.
실내 흡연이 가능한 장소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차피 사무실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담배를 피우러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도 귀찮았기에 그녀는 입에 담배를 물고선 라이터로 불을 붙여 하얀 연기를 밖으로 뿜어냈다.
아까전, 쉴 시간이 어디 있냐고 말했기에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담배를 피우는 시간만큼은 예외라 칠 수 있는데 이것마저 안 한다면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울화통과 분노, 그리고 짜증으로 급사해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즉, 나에게 있어서 담배를 피우는 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지쳐가는 몸에 약을 투여 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
" 봊나 피곤하네. 아니, 씨발 야근이 무슨 출출할 때마다 시키는 아메리카노 같은 줄 아나. 그 뚱땡이는 나한테 야근을 왜 이렇게 시키는 거야? "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이며 동시에 자신에게 야근을 이렇게나 시키는 뚱뚱한 그녀를 생각하며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험담을 내뱉었다.
" 나한테 무슨 감정 있나? "
가능성이 있는 생각 아닌가? 정당한 이유로 야근을 맡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나한테 야근을 시키다니. 도대체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거랑 내가 야근을 하는 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데?
' 그냥 대놓고 엿 처먹으라는 이야기잖아. '
똥구멍이 헐 때까지 빨아주고 또 빨아줬는데 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지? 하여튼 존나 배은망덕하고 은혜도 모르는 십새끼가 확실한 년이다.
그런 것도 한 두 번 가끔씩 하면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이건 그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출근하며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고 있는데 과연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누가 봐도 아니지 않은가.
" 그리고 씨발, 솔직히 야근을 시킬 거면 몬스터 뺑뺑이 돌리게 게이트로 보내는 게 정상이지. 날 도대체 왜 이 길드 사무실에 처박아두는 지 이해를 못하겠네. 분명 헌터로 고용됐는데 누가 보면 사무직으로 고용된 줄 알겠어. "
더군다나 난 게이트 안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는 헌터로 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야근을 하는 일들은 모조리 잡무에 불과했다.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이 쌓인 서류들을 몇 개 골라 집어 살펴본 다음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 애초에 이것들은 길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들이잖아. 근데 이걸 왜 내가 하고 있는 거냐고. 존나 이해가 안 가네. "
재무표고 보고서고 나발이고 애초에 이것들 모두가 길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는 길드 소속의 헌터로 고용된 입장이지. 길드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직으로 고용된 게 아니었다.
헌터로 고용된 사람으로서 야근이라고 한다면 게이트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 아닌가?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 이유와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 진짜 돈만 아니었으면 엎고도 남았을 텐데. 쯧. "
여러 불만과 함께 짜증과 분노 그리고 피곤함에 절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뚱땡이의 말대로 꼬박꼬박 사무실에 남아서 야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수입 자체가 함부로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기에 꾹 참고하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엎고도 남았을 것이다.
" 봊나 짜증 나. "
원래 계획대로 수행이 됐다면 지금쯤 유진이가 해준 저녁밥을 먹고서 아마 침대에 누워서 마사지 봉사를 받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지금 이 시각이라면 아마, 따먹은 뒤 뒤처리는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고 꿈나라로 떠나있을 시간이겠네.
머릿속으로 만약 오늘 야근을 하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부부관계를 머릿속에 상상하자 성관계를 하지도 않은 백지상태의 처녀처럼 머릿속이 흥분으로 가득 차며 그녀의 하복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유진이 그 새끼가 진짜 떡감이 쩔어주긴 하지. '
자신의 소유물이자 오직 자신만이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뽀얗고 부드러운 그 속살, 그리고 은밀한 부위들, 작은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오는 배덕감과 정복감, 스스로 행하는 봉사 정신과 교태를 부리는 몸짓까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 아, 이러니까 갑자기 존나 꼴리네. 아, 그냥 오늘 집에 들어가서 바로 자지 말고 한 번 따먹을까? '
원래대로라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꿈나라에 빠져 몸의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꼴리는 상태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이런 상태라면 한 번 시원하게 빼줘야 예의지. 참고 속으로 끙끙 앓으면 그게 여자냐? '
다른 사람들이라면 갑자기 성욕이 들끓는 이런 상황에서 창관을 가거나 혹은 출장안마 등 유흥업소에 찾아 불타오르는 성욕을 해소하겠지만 그녀는 굳이 엄한데 비싼 돈을 들여가며 그럴 필요가 없었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면 그런 헐고 잔뜩 닳은 걸레 새끼들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맛있으며 자기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고 부려먹을 수 있는 성처리 기구가 집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니까.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간다고 하면 1시 30분 정도에 도착할 테고, 아무리 늦어도 2시 30분까지는 도착할 터. 그럼 출근을 하러 약 아침 8시 정도에 나가야 하니까 적어도 4~5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건데 그 정도면 한 번은 고사하고 몇십번은 거뜬히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남들이 본다면 늦은 시각인데 집에 들어가면 이미 자고 있지 않겠나. 그럼, 잠자리에 든 사람을 억지로 깨워서 하는 거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잠자리에 들고 있을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애초에 위대한 집안의 가장인 내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침대에 누워서 잠자리에 든다고? 그건 우리 집에서는 사형감으로 취급된다.
더군다나 나는 분명 오늘 오후에 그에게 전화를 해서 밥을 처먹고 얌전히 나를 기다리라고 말을 했었다. 무려 하늘같이 높은 집안의 가장인 내가 직접 전화까지 해서 경고까지 했는데 그걸 깡그리 다 무시하고 행동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자란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기 때문에 유진이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예상하건대 아직까지 소파에 앉아서 내가 들어올 때까지 억지로 잠을 참아가며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멀뚱히 날 기다리고 있겠지.
" 안 봐도 눈에 훤히 보이네. 크큭. 아, 그러면 과연 오늘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잘 맺었다고 소문이 날까? "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강간범처럼 존나 따먹을까? 때리는 것도 좋지. 아무래도 유진이, 그 새끼가 맞을 때 내는 소리가 많이 꼴릿하긴 하니까.
그게 아니면 스스로 움직이라고 하고 나는 편하게 누운 채 구경만 해?
아니지. 코스프레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어차피 차 타고 왔으니까 돌아가면서 옷은 사면 되니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잖아. 산타복이라든지, 돌핀 팬츠라던지 아 맞다! 그래! 교복! 그 새끼 교복 같은 게 있었나? 있다면 그거 입혀놓고도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한데.
차라리, 그냥 앞서 생각한 것들을 오늘 모조리 다 해버릴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체력이야 뭐, 기절하든 말든 그냥 머리채 붙잡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따먹으면 되는 거니까 문제 될 거 없잖아?
" 아 존나 어떻게 해야 하지! "
마지막으로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행복한 고민에 빠진 채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
아까까지만 해도 잡생각 하지 말고 쉬는 시간 없이 빨리 일을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한 번 불이 붙은 생각은 도저히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책상 위에는 두 다리를 올린 채 건방진 자세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몇 분, 몇십분이 지나도 기름에 불이 붙은 것처럼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도록 활활 타오르던 그녀의 생각은 의외로 예상 밖의 상황으로 급히 종결되어버렸는데…….
" 씨발! "
분명 아무도 없을, 선 유린. 그녀 혼자서만 남아있는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지는 생생한 욕설.
" 뭐야. 씨발? "
갑작스레 귓가를 때리는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선 책상 위로 올린 두 다리를 황급히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열리는 사무실의 출입문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인영. 마치, 돼지를 보는 듯한 뚱뚱한 체형과 작은 키, 그리고 자기가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 뒤뚱뒤뚱하는 걸음걸이까지.
" 건방진 것들이 감히 쌍으로 나를 농락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 씨발, 그 새끼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
처음에는 아까 퇴근을 하셨던 그분이 무언가를 놔두고 가서 급히 돌아온 건가 생각했는데 내 시선에 포착되는 인영으로 파악해보건대 그건 절대로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알듯말듯한 비주얼. 불빛이 켜져 있지 않아 얼굴이 그림자로 가려져 있어 제대로 된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궁금증이 들지만, 한편으로 마음속에 생겨나는 불안감에 그녀는 책상 밑에 놔둔 칼을 챙기고 자리에서 벗어나 여전히 씩씩대며 누구에게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는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분을 이기지 못하는 것인지 사무실 복도에 선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는 여성을 향해 점점 다가간 그녀는 혹여나 괴한일 가능성을 대비해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선 마침내 또렷하게 얼굴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데 곧이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여성의 얼굴을 목격하자마자 선유린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선 칼 손잡이에 올린 손을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어? 기, 길드장님. "
움직이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체형 자체가 묘하게 익숙하다고 느낀 그녀는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의 정체가 자신의 고용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뚱땡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긴장을 풀고선 의문을 드러냈다.
"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단순하게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이 뚱땡이 새끼는 한 번 퇴근하면 사무실 근처에 얼씬거리기는커녕 아예 옷자락도 안 보일 정도로 모습을 감추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늦은 시간에 사무실에 들른 걸까?
' 씨발, 안 들리나? 이젠 하다 하다 배고 너무 고파서 귀까지 처먹은 거야? '
못 들을 정도로 작게 말한 것도 아니고 분명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는데 뭔가에 단단히 홀린 건지 내 말에 대꾸하기는 커녕 뚱땡이는 누구한테 뱉어내는지 모를 상스러운 욕설만 자꾸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나저나, 이 새끼 꼴은 또 왜 이래? '
어디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교통사고라도 난 거야? 차에 치여 횡단보도에 뒹군 사람처럼 뭉개진 코와 인중에 눌어붙은 핏자국, 잔뜩 충혈돼 빨갛게 변해버린 눈동자와 산발이 된 머리, 그리고 찢어진 옷자락까지.
' 아니, 나한테 분명 누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 누구 만나러 간다고 했으면서 실상은 만나서 놀고 온 게 아니라 뚜드려 맞고 온 건가? '
그게 아니면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게 같은 생물인 인간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게이트 안에 있는 괴물들을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나?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
" 이 씨발, 그 개 같은 새끼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 마음 같아서는 폭행으로 찔러넣고 싶긴 한데 그랬다가는 나도 괜히 불똥 튈 것 같고.... "
" 저기, 길드장님. "
" 어, 응? "
재차 반복적으로 부르는 유린의 말소리와 인기척을 인제야 느낀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분노에 차 몸을 부르르 떨고, 천 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쁜 숨과 누군가에 대한 욕설을 뱉어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너그럽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막혀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제시된 것처럼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고, 조금 전까지 누군가에 대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던 입 밖으로는 기쁨에 가득 찬 신음이 울려 퍼졌는데 당연하게도 유린은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화를 내다가 자신을 보자마자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갑자기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무섭다는 듯 똥 씹은 표정을 여과 없이 밖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손가락을 경쾌하게 한 번 튕기더니 곧이어 유린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본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단 한마디를 조용히 읊조렸다.
" 빙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