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58화 (58/77)

〈 58화 〉 폭발

* * *

" ...씨발, 겁나게 불편하네. "

상처투성이의 오른손을 붙잡은 채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구릿빛 피부의 여성.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해 하면서 발등에 불이 난 것처럼 손톱을 씹어대는 여성은 불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욕설을 내뱉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뿜어내는 것도 잠시. 곧이어 문을 열고 나오는 유진의 모습을 보자마자 여성은 마치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하고 초조한 기색을 지워버리고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얼굴에 미소를 그려내며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 죄, 죄송해요. 약을 어디에다가 뒀는지 잊어버려서 찾느라 조금 늦어버렸어요. 마, 많이 기다리셨죠? "

헌터인 아내와는 달리 일반인 중에서도 약한 포지션에 있는 나는 평소에도 다칠 때가 많고, 아내의 훈육으로 인해 신체적 상처를 입을 때가 많아서 의약품들을 굉장히 많이 챙겨놓는 편이고 또한 자주 찾는 편.

그런데, 아무래도 근래에 다칠 일도 없었고, 맞은 적도 없다 보니 의약품을 사용한 지 오래돼 놔둔 위치를 까먹어버려서 찾는 데만 오분이라는 시간이 걸려버렸다. 다친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죽을 것 같다.

피난민처럼 양손에 바리바리 약품들을 들고나온 그가 붕대와 연고를 꺼내고선 살며시 그녀의 앞에 앉으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의 표시를 나타냈다.

' 너무 미안하네. '

그러나,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말라는 듯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말에 완곡한 부정을 나타냈다.

" 아유, 기다리기는요. 전혀 그런 거 없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 아, 가, 감사합니다. 상냥하신 분이네요. "

배려 섞인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느낀 그가 연고의 뚜껑을 열면서 옅은 미소를 얼굴에 그려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흔하게 마주칠만한 특색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에 그려진 미소에 불과했지만, 그의 얼굴에 그려진 옅은 미소가 그녀에겐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 걸까?

많은 남성을 만나본 것 같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남성에 대한 면역이 크게 존재하지 않는 건지 그의 미소를 마주한 그녀는 빨간 홍조와 함께 괜한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려 눈동자에 계속해서 담아지는 시선을 최대한 피해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그로서는 그녀가 갑자기 헛기침을 내뱉으며 얼굴을 돌려버린 것에 대해 고개를 갸웃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만 곧이어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뒤 연고를 짜내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오른손에 천천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 ... "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피부의 감촉. 아내와는 약간 느낌이 다른, 마치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는 부모님의 품처럼 포근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들어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약을 발라주면서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외간여성과의 신체적 접촉. 그 아줌마를 포함하면 아내를 제외한 외간 여성과의 신체적 접촉은 이번이 두 번째.

원래 우리 집 안에 있어서,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신체적 접촉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고 당장이라도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친 다음 그녀를 집 밖으로 내쫓아야 하는 게 정석이지만 그러나, 이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은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나와 신체적 접촉을 하는 상대방은 그 아줌마처럼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희롱하던 사람이 아니라, 악의 마수에서 나를 꺼내준 장본인. 즉,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나를 그 악독한 마수에서 꺼내려다 상처를 입었는데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 과연 예의일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성적인 신체적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약을 발라주기 위해 가벼운 접촉을 하는 것이므로 그는 별다른 기색 없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그녀의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발라주었다.

" 큼, 흠, 칼에 찔린 것도 아니고 단순한 타박상이라 이 정도면 침 바르고 한숨 자고 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어서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

" 그러다가 상처가 덧나는 거예요.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는 처치를 하는 게 좋더라고요. "

손등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괜한 부끄러움을 느낀 그녀가 퉁명스럽게 혼자 중얼거렸지만 도리어 돌아오는 그의 핀잔 섞인 잔소리.

그러나, 그의 핀잔 섞인 잔소리에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는 대신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오히려 반대로 그를 향해 진심이 섞인 걱정을 나타냈다.

"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까 그쪽도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계셨잖아요. "

" ... "

" 보니까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크게 다치지도 않은 저를 챙기기보다는 본인의 몸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시는 게……. "

그러나,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옅은 미소가 그려진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걱정에 대한 완곡한 부정을 나타냈다.

" 제 몸은 정상이라서 제가 무어라 따로 생각하고 챙길 게 없는걸요. 무엇을 우려하시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생각하신 것만큼 큰 상처가 난 건 아니고 단순하게 입안이 조금 터진 것뿐이니까 크게 걱정해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또다시 꿈틀거리는 그녀의 미간. 단순하게 입안이 터진 것뿐이라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요즘은 단순하게 입안이 터진 것만으로도 핏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게 유행인 건가?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지 않은가.

" 그러다가 상처가 덧나는 거라고,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는 처치를 하는 게 좋다고 그쪽이 방금 저한테 말해놓고서는 정작 그걸 본인한테는 적용을 안 하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단순하게 입이 터진 것뿐인데 피를 그렇게 쏟아낸다고요? 열 살 짜리 꼬맹이도 거짓말인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허접한 변명에 불과한 거 알고 있어요? 애초에 ㄱ... "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단순한 타박상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근심·걱정을 쏟아내면서 정작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쳤었던 본인에게는 근심·걱정을 쏟기는커녕 왜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핀잔 섞인 잔소리와 함께 근심 걱정을 다시 한번 그에게 쏟아부었지만 곧이어 이어진 그의 한 마디로 인해 열었던 입을 다시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저는 괜찮아요. "

" 하.... "

기계처럼, 정해진 것처럼 아까와 똑같이 괜찮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그의 차단에 무슨 이야기를 해봤자 어차피 정상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그녀는 이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성격상 어색하게 이어지는 침묵이 그 무엇보다도 싫기에 그녀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흐름이 깨지지 않게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나저나, 괜찮으신건가요? "

" 뭐를요? "

" 그 사람. 그렇게 멀쩡하게 보내는 거 말입니다. "

그 순간, 멈춰지는 그의 손길.

"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도 아니고, 좋은 도움을 준 사람도 아니고, 천인공노할 악독한 짓을 저지르려고 한 사람인데. "

폭행이나 협박 따위의 수단으로 강제로 성을 갈취하는 수단인 강간. 실제로 그녀가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오직 활화산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지독한 분노였다.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지니고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남성을 지켜줘야 한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여성으로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남성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그 아줌마를 그녀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아줌마를 직접 심판하려고 했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한 강간범 새끼를 딱 죽기 직전까지만 뚜드려 패서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고쳐주려고 했었고, 실제로도 주먹을 얼굴에 한 방 시원하게 꽂아주기도 했었고 곧이어서 직접 자신이 썩어빠진 파렴치한 범죄자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늘 높이 주먹을 치켜올려 세웠지만, 그 바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은 결국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그녀가 결국 주먹을 마지막까지 휘두르지 못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신 거죠? 왜 저를 말리셨던 겁니까? "

그가 필사적으로 만류했기 때문.

' 하, 하지 마세요! 그,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안 돼요. 머, 멈춰 주세요! 구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 이제 멈춰 주세요! 제, 제발 진정해 주세요... '

경찰도 아닌, 행인도 아닌, 직접적인 범죄의 피해를 본 피해자인 그가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자신을 만류하던 것을 그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째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범죄자를 대신 심판 해준다는데 그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만류를 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하고, 곱씹어 보아도 그가 자신을 만류할만한 이유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런 불미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더라면 남이 대신 심판을 해주는 것을 만류하기는커녕, 스스로 나서서 복수의 칼날을 가슴에 찔러 넣었을 텐데.

" ...그냥, 싫어서 그랬어요. "

그 순간,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녀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고장 난 기계처럼 작동을 멈추고 있던 그가 입 밖으로 꺼낸 단 한마디.

" 예? 싫어서 그랬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당연하게도 추상적인 그의 한마디에 모든 궁금증이 풀릴 리가 없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 움직이면서 천천히 그의 대답에 반문하자 그는 쭈뼛쭈뼛 몸을 움직이면서도 천천히 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 저를 위해서 대신 화를 내주시고 분노를 표출해 주시다가 나중에 안 좋은 일이나, 구설에 휘말리게 될까 봐, 괜히 저를 도와주시다가 나중에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그게 너무 죄송스럽고 미안하고 또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마, 말렸던 거에요. "

" 잠깐,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제가 주먹을 휘둘러서 그 늙은이 새끼를 뚜드려 팬 이후에 고소 건 나발이건 안 좋은 여러 일에 휘말리게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괜히 제가 그쪽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해버리는 거니까 그게 너무 죄송스럽고 미안하고 싫어서 말렸다는 거죠? "

" .....네. "

머릿속으로 가졌던 무한한 궁금증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가 터지다 못해 증발할 것 같은 그의 대답.

착하고 순진한 것을 넘어 심하게 말하자면 백지상태의 도화지 정신을 가진 사람이 말할 법한 이유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 그럼, 설마 그 늙은이 새끼를 따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보내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

" 아, 아니에요. 무, 물론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지만, 경찰에 시, 신고를 따로 안 한 가장 큰 이유는 따, 따로 있는걸요. "

" 무슨 이유 시길래? "

" 그게, 겨, 경찰에 신고를 하면 분명 이런저런 조사를 받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아, 아내가 알아버릴 것 같아서.... "

" 아내 분이 알게 되는 게 뭐가 어때서요? 오히려,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이 알게 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

아내라는 말을 들어도 그녀는 그리 놀라거나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애초에 집안에 들어올 때 거실 벽 중앙에 걸린 결혼사진을 보고 일찍이 그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가 아내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걸 들은 그녀는 그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고 곧이어 입맛을 쩝 다시더니 씁쓸한 마음과 동정의 눈빛을 담아 전부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 물론 그런 안 좋은 일들을 당했다는 것을 아내에게 알리는 게 많이 힘들고 수치스럽겠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내 분께서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앞으로의 조치도 취할 수 있고 아내로서,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그쪽을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 "

" ... "

" 부부잖습니까. 어깨를 기댈 곳이 있는데 왜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는 거예요. 분명 아내 분께서는 그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쪽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줄 겁니다.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

" ... "

" 더군다나 그런 파렴치한 늙은이 새끼들은 사회에 방생시켜놓으면 안 됩니다. 한시라도 빨리 잡아서 사회를 좀먹는 그 기생충 같은 년은 격리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요. 그러니, 괜한 걱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먼저 아내 분께 이야기를 꺼내서 상황을 차근차근히 해결해보는 게.... "

"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된다면 호, 혼날 텐데. 부, 분명 아, 알게 되면 크게 혼날 건데.... "

작게 들리는 그의 중얼거림.

" 예?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

" 아, 아니에요. 그, 그냥 혼잣말한 거에요. 그보다도 조, 조언 감사드려요.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조, 조금 생각에 변화도 왔고. "

마치, 눈앞에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떨리는 목소리와 초점이 없는 눈동자를 띈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행동에 그녀가 가늘게 눈을 뜬 채로 반문을 하자 그는 다급하게 말을 돌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작게 말한 그 중얼거림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선 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굵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 속에도 작게 울려 퍼지는 그의 간절한 외침을 캐치해 그를 마수에서 구해줄 정도로 청각이 뛰어난 존재였고 그렇기에 그녀는 아까 그가 중얼거렸던 말들을 모조리 알아들을 수 있었다.

' 혼이 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녀의 눈이 아까 파렴치한 변태 행각을 벌이고 있던 아줌마를 잡을 때처럼 날카롭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 * *

" 이지아. "

명함에 적혀있는 이름을 천천히 읽어 내린 그는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마귀의 손길에서 구원해준 구릿빛 피부의 여성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양아치 겉모습과는 다르게 무언가 굉장히 모범생 같은 스타일의 이름이 주는 갭 차이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아 올려졌다.

" 예쁜 이름이시네. "

뒷면을 뒤집자 한눈에 띄는 전화번호. 구석 끄트머리에 작게 적혀있었지만 짙은 검은색으로 강조된 검은 색깔의 전화번호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원래라면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면 찢어버리거나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려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런 행동을 취할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 왜, 그런 말을 하신 걸까. '

그가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명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굉장히 단순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어서가 아니라 응급처치를 모두 마치고 그녀가 집 밖으로 나가기 전 명함을 건네주면서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명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할 때가 오게 될 거예요. 그러니, 지갑 속에 꼭 넣고 다니세요. '

받을 수 없다고 거듭 말하던 나의 사양을 무시하고선 문을 열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끝으로 결국에 나는 명함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지 못한 채 지금까지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서 멀뚱멀뚱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명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할 때가 오게 될 거라니. '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자처럼 확신에 차 있는 그녀의 당당한 말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도는 찝찝한 감각. 결국에 그 찝찝한 감각에 굴복한 그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신 주머니 깊숙이 명함을 집어넣어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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