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폭발
* * *
" ...? "
잘못 들은 건가? 방금 문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데.
' 잘못 들었겠지. 어, 얼른 집에 가자. '
그러나, 있는 힘껏 손잡이를 이리저리 당겨보아도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자동차의 육중한 문. 마치, 거대한 바위를 계란으로 깨뜨리려고 노력하는 느낌이 들었다.
' 뭐야? 이거 왜 이래? '
아무리 내가 또래 남성들과 비교해서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동차 문을 못 열 정도의 약골은 아닌데. 애초에, 자동차 문도 못 여는 사람이면 약골 수준이 아니라 병실에 누워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두절미하고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갸웃 움직인 뒤 다시 한번 호흡을 고르고선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 이리저리 당겨보았지만 그런데도 열릴 생각을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문에 질려버리더니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심을 그려냈다.
' 잠깐만, 설마 차 문이 잠긴 건가? '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그 소리가 설마 차 문에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였나? 어,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인데?
솔직히 아까부터 손잡이를 이리저리 잡아당기자 무언가에 걸려 덜컥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그렇고, 이 정도의 지랄을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기는커녕 미동도 안 하는 걸 보아하니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게 맞아 보이는데.
' 그럼 왜 안 열어 주는 거지? '
내가 낑낑대고 문을 못 열고 있는데 아줌마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선 고개를 돌려보자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아줌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 차 문이 잠긴 걸 본인도 모르는 건가 '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를 하기 마련. 자기도 모르게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다가 실수를 범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은가. 그러한 결론에 다다르자마자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놓은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요청했다.
" 사, 사장님. 여기 차 문이 잠긴 것 같은데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
" 문? "
' 네. 자, 잠겨 있는데 사장님이 아무래도 실수로 잠그신 것 같아서 그러는데.... "
그러자,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오묘한 표정과 함께 야시시한 눈빛을 장착한 그녀가 그 말을 듣고선 호탕하게 웃음을 보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외의 대답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실수로 잠근 게 아니라 내가 일부러 걸어 잠근 거야! 하하! 그것도 모르고 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웃음 참느라고 혼났네. "
" 예? 이, 일부러 잠그셨다고요? "
" 응! "
" 왜, 왜요? "
" 유진 씨를 이대로 집으로 보내주기 싫어서 걸어 잠갔지! 다른 이유가 또 있겠어? "
순간적으로 차 안에 흐르는 적막.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어이가 가출하다 못해 안드로메다로 승천해버린 그의 머릿속 활동이 잠깐동안 정지해버렸다.
' 나를 집으로 보내주기 싫어서 일부러 문을 걸어 잠갔다고? '
이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지?
" 오, 오늘 일정은 다 끝났지 않나요? 원래는 공원을 가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저녁 식사까지만 한다고 하셨고 그래서, 저, 저녁 식사까지 다 끝냈잖아요. 그러면 전부 끝난 게 아닌가요? 지,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잖아요. "
" 음, 원래는 그렇지! 원래 일정대로라면 그런 게 맞는데 이게 사람 마음은 원래 갈대 같다는 말이 있잖아? 유진 씨를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저녁만 먹고 이대로 유진 씨를 얌전히 집으로 보내주기에는 뭔가 아쉽더라고. "
" ......하. "
정말 기가 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천천히 정리해보자면 원래는 일정대로 그리고 약속한 대로 나를 집으로 얌전히 보내주려고 했는데 막상 집 앞에 도착을 해보니까 이대로 나를 얌전히 보내주기에는 무언가 아쉬워져 마음을 바꿔서 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는 말 아니야? 이거 맞지?
그녀의 말속에 숨겨진 진정한 저의를 알아챈 그가 황당함과 짜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혔고 그 탓에 손에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 보내준다고 했잖아. '
당신이 그 입으로 나를 집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했잖아. 오늘은 비가 많이 오니까 저녁 식사만 하고 집으로 얌전히 보내준다며? 그 입으로 직접 말해놓고선 왜 인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는 건데?
이빨로 입술을 세게 짓누르며 터져 나오려고 하는 울분을 겨우 꾹꾹 눌러 담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그를 뒤로한 채 익숙하게 기어봉 앞에 있는 통에서 담배를 꺼낸 그녀는 차량의 창문을 닫아 밀폐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하얀 연기를 입 밖으로 내뿜었다.
" 후. 물론 저녁 먹기 전에 말했듯이 나랑 유진 씨가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엄청나게 많기도 하고 오늘 못 즐긴 만큼 다음에 만나서 더 재밌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도 되기는 한데 계속 생각을 곱씹어보니까 나는 유진 씨랑 함께 보내는 매 순간이 소중한데 그런 시간을 이렇게 저녁만 먹고 단순하게 쫑내기에는 뭔가 내 성에 안 차더라고. "
" ... "
" 그런데, 여기서 쫑을 안 내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좀 애매한 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애초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디 야외를 나돌아다닐 수도 없으니 참 상황이 애매하단 말이지. 그래서, 과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뭘 해야 이 허전하고도 아쉬운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는데 딱 하나 답이 나오더라고! "
" 그게 도대체 뭐길래.... "
그 순간,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꼬리를 귀에 걸듯이 올려버린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한 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올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내밀더니 굉장히 태연한 표정과 반대되는 충격적인 말을 뱉어냈다.
" 우리 유진 씨가 나한테 키스 한번 찐하게 해주면 이 허전하고도 아쉬운 마음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
" ......네? "
허벅지를 더듬는 그녀의 손길에 불쾌감을 느끼기도 전, 상상도 하지 못한 충격적인 말을 들은 그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잔뜩 굳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유진.
" 지, 지금 뭐라고 하신 건지.... "
꺼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재차 반문했지만 안타깝게도 비릿한 웃음을 얼굴 위에 그리고선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의 손길은 그의 예상을 가차 없이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 우리 유진 씨가 나한테 키스 한번 찐하게 해주면 좋을 것 같다니까? 아, 정확하게 말해주자면 여자가 먼저 다가가는 키스가 아니라 남자가 먼저 다가오는! 즉, 우리 유진 씨가 나한테 다가와서 내 입술에 진하게 입맞춤을 해주면 이 아쉽고도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지. "
" .... "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히려 무엇인가가 더욱 추가된 말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란 소리지? 즉, 내가 나서서 내 의지로 당신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해주길 원한다는 거잖아?
" 진심이세요? "
" 응. 당연히 진심이지. "
한 치의 거짓말을 섞지 않은 사람처럼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
" 하..... "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요구와 뻔뻔스러움에 휘몰아치는 분노와 당혹감에 저절로 욕설을 내뱉을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도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기에 다행히 욕설은 마음속으로 삼켜낼 수 있었다.
' 미친 건가? '
정말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아줌마는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적어도 상체 위에 대가리란 걸 달고 다니는 인간이라면, 생각을 하는 동물이라면, 말을 하기 전 뇌에서 필터링 작업을 거치고 말을 내뱉기 마련일 텐데 어떻게 저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지? 내가 정말로 저 말에 수용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오는 답은 당연히 NO지 않은가.
" 사, 사장님. 죄송하지만 그 행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ㄷ..... "
활화산처럼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 밖으로는 평소처럼 예의가 녹아있는 말투가 아닌 명백한 적의가 담겨 있는 날카로운 말투가 젖어있는 존댓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이 상황 자체를 아예 없었던 일로 무마시키려던 찰나, 불쑥 들어와 버린 그녀의 한 마디에 그의 말이 뚝 끊겨버렸다.
"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왜? "
" ... "
"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난 우리 유진 씨가 왜 거절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어깨도 같이 으쓱대는 그녀는 그를 향해 잔뜩 의문을 표출하고 있었다.
" 사장님. 이, 이건 아니에요. 키, 키스는 용납할 수 없어요. "
" 아니, 씨발. 뭐, 여기서 당장 빠구리를 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옷 벗고 차 안에서 엉덩이랑 자지 좀 흔들면서 스트립쇼를 보여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고작 키스일 뿐인데 단어로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거야? "
" 사, 사장님. 이건 어느 부분에서의 문제가 아니에요..... 애초에 그건 선을 넘는 행위고 또, 용납할 수 없는.... "
그때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차고 있던 안전벨트의 버클을 단숨에 풀어제낀 그녀가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그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그가 최대한 뒤로 물러나 보려 했지만, 자동차 안에서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일 수 있겠는가? 자동차라는 특성상 공간이 굉장히 좁았기에 결국 둘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콧바람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가까워져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흉흉한 눈빛을 빛내는 그녀. 그 눈빛을 마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상위 포식자인 것을 알아챈 몸이 움찔움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빠르게 피해냈다.
그러나, 한 손으로 그의 턱을 붙잡고선 강제로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어버린 그녀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욕설을 내뱉었다.
" 씨발, 존나 어이없네. "
" ... "
" 아니, 유진 씨. 여태까지 잘만 물고 빨고 만지고 지랄 염병했으면서 왜 이렇게 모순적이야? 그거 입맞춤 진하게 한 번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이 난리를 부려서 괜히 기분 좋던 사람 한순간에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네. "
남은 한 손에 힘을 준 채 그의 뺨을 툭툭 건드리는 그녀의 손길을 받아내는 그는 묵묵히 그것을 감내했다.
맞는 말이다. 모순적인것도 전부 맞는 말이다.
' 그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여태까지 잘만 물고 빨고 만지고 지랄할 때는 가만히 있던 새끼가 키스에 이렇게 지랄 발광을 떨며 필사적으로 거절하는 게 짜증 날 거야. 괜히 깨끗한 척 고결한 척 하는 게 역겹겠지. '
나도 평소처럼 그냥 단순한 희롱이면 참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게, 가정을 위한 일이고, 아내를 위한 일이고, 나만 조용히 하고 참고 있으면 모든 게 잘 해결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건 그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섹스와 더불어 키스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고? 그게 바로 내가 정해놓은 마지막 선이었으니까.
섹스는 완전하게 내 몸을 내어주는 행위이고, 키스는 내 정신을 완전히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키스를 요구했어도 나는 가차 없이 그 제안을 거절했을 텐데 설상가상 그녀는 한 가지의 조건을 더 붙였지 않았던가?
바로, 내가 움직여 키스를 주도하라는 요구. 즉, 내가 평소와 똑같이 시체처럼 미동도, 반응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그녀의 손길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서서 그녀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해야 한다는 것.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정신을 바치라는 것이 아닌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 ... "
아내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조용히 하고 참으며 모든 걸 다 받아들이며 넘어가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내 정신과 완전한 내 몸 자체를 희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아내에 대한 완전한 배신과 더불어 마지노선을 넘어버리는 행위.
더 이상 울분을 속으로 넘기면서 감내할 수만은 없었다.
더 이상 거짓말로 아내를 속여가는 것도 너무 지쳐버렸고 이 이상 배신을 할 자신도 없었다.
이제 여기서 그만둬야 했다. 이 굴레를, 이 사슬을, 이 악연을 끝내야만 했다.
그래, 해야만 한다.
저번과 똑같이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새겼지만, 그 결심의 내용만큼은 저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사장님. "
두 주먹엔 힘이 들어갔고 긴장감에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포식자를 앞에 둔 피식자로서 몸이 오슬오슬 떨리고 겁이 덜컥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움직인 그가 나지막하게 그녀를 부르더니 곧이어 자신의 뺨을 툭툭 건드리던 그녀의 손을 거세게 쳐버리고서 평소 선한 눈빛과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외쳤다.
" 그만해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