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폭발
* * *
[싱겁긴, 아무튼 나 오늘도 저녁 늦게 가니까 그렇게 알아두고 있고 알아서 밥 처먹고 얌전히 기다리고나 있어.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혹여나 내가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밖에서 싸돌아다닐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도 말고. 알았어?]
" .... "
[대답 안하냐?]
미안해요.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자꾸만 입에 감도는 그 한마디.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난 필연적으로 아내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과 함께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그의 얼굴.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곧이어 쓴웃음과 함께 그는 태연하게 행동하며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 얌전히 집에서 여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여보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요. "
[잘 알지. 그렇긴 한데 사람 앞 일이란 원래 모르는 법이야. 네가 갑자기 미쳐서 개지랄할지 누가 알아?]
" 아,아니에요..... "
그때였다.
" 유진 씨! "
" ??? "
나를 부르는 큰 목소리에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우며 아내와의 전화에 집중을 하던 정신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자 어느샌가 차 보닛 위에서 몸을 일으킨 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버린 그녀가 커다란 우산을 편 채 내 이름을 부르며 나에게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 저 아줌마 지금 뭐하는 거야? '
마치 동네가 떠나갈 듯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큰 목소리에 혹여나 핸드폰 너머로 아내가 들을 것을 우려한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황급히 손을 내젓고 검지로 입을 가리키며 제발 조용히 해달라며 그녀에게 부탁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인지 아내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이상한 소리의 근원지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소리야?]
" ㄴ, 네? 무슨 소리요? "
[뭘 무슨 소리긴? 네 쪽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은데 모르는 척하고 지랄이야. 아니, 누구 부르는 소리 들리던데? 씨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소리가 뭐 저렇게 큰 거야?]
혹여나 아내가 들어버린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저절로 큰 불안감에 잠기게 되었지만, 하늘이 도운 것인지 다행스럽게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핸드폰 너머로는 제대로 들리지 않고 대충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다행이다. '
순간 심장이 철렁거렸지만, 천운이 따라주어 마음을 놓은 그는 위급한 상황을 잘 넘겼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며 신경 쓸 일이 없다며 혹여나 일이 더 커지지 않게 그녀가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최대한 말을 얼버무리며 상황을 빠르게 무마시켰다.
" 벼, 별로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다른 사람이 자기 친구 부르는 소리니까 큰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
[뭐, 알았어. 아무튼 나 이제 일 다시 들어가 봐야 하거든?]
" 버, 벌써 가시는 거예요? 조금만 더 전화하면 안 될까요? "
아직 아내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이대로 끊어버린다면 여러모로 너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쪽에서 내가 필요한 건지 나 지금 존나 급하게 부르고 있거든. 이거 안 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지금 가야 하니까 봊같은 떼쓸 생각하지 마. 내가 네가 원하는 것에 맞춰야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아무튼, 이제 일 들어가기 전에 다시 말하는 건데 내가 한 말 무조건 명심하고 꼭 지키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 네. 꼭 명심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늘 말하는 거지만 제가 여보 사랑하는 거 알죠? 언제나 저를 위해, 가정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주셔서 고마……. "
뚜뚜ㅡ
얼굴에 드리운 잿빛 색깔과 쓴웃음을 없애고 미소를 지으면서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고마움을 덧붙이려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게 매정하게 끊어지는 전화.
전화가 끊어져 단조로운 배경화면만을 띄우고 있는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씁쓸함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 순간적으로 몽롱하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세차게 소용돌이쳤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음속에 생겨난 감정들을 지워냈다.
'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이야기 하자.... '
성능 좋은 지우개로 지워내듯 깔끔하게 이런저런 상념들을 지워낸 후 남아있는 찌꺼기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애써 무시하며 핸드폰을 집어넣은 그는 곧바로 아내와 전화를 하며 띄고 있었던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거둔 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우산을 든 채 다가오는 그녀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마음 같아서 그는 실실 웃음을 띠고 우산을 든 채 다가오는 그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이런저런 말들을 참지 말고 그냥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자기의 위치와 처지를 그 누구보다도 상세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의는커녕 불만의 시선이나 날카로운 눈빛도 보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속으로 그 말들을 꾸역꾸역 삼켜낼 뿐이었다.
" 안녕하세요. 사장님. "
" 어, 그래. 전화하고 있었나봐?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를 향한 그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호흥한 그녀는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흩날리는 빗물에 옷이 젖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의 몸매를 슬쩍 스캔하더니 마치 상다리가 부러질 듯이 성대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 그것보다 이제 마친 거야?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왔네? "
" ....네. 잠시 남아서 수업자료 정리하느라 남들보단 늦게 나와버렸네요. "
" 남아서 수업자료까지 정리했다고? 역시 유진 씨야. 모범생다워. 에구구, 그나저나 우리 유진 씨도 다른 학생들처럼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으면서 왔나 보네? 꼴이 완전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돼버렸어. 이를 어쩌나. "
당연하게도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언급을 하지도,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녀는 우산을 그녀에게 씌워줌과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가방을 대신 들어준 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잔뜩 젖어 든 그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쓸어내렸다.
" 이대로 있다가는 감기 걸릴 확률이 백퍼센트니까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일단 얼른 차에 가자. 내가 우리 유진 씨 생각해서 따뜻하게 히터도 미리 틀어놓았거든? 가서 몸도 녹이고 옷도 차차 말리면 돼. 어때? 좋지? "
" .....네. 좋아요. 차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사장님. "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우산 아래서 그녀의 에스코트에 따라 도로 한쪽에 주차되어있는 BMW로 다가가는 그들.
마치 연인처럼 손깍지를 낀 채 그와 몸을 밀착한 그녀는 젖은 옷 위로 드러나는 그의 가슴에 일부러 팔을 밀착시킨 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온몸에 전해지는 음란한 촉감에 젖어 들어 흥분에 가득 찬 콧김을 뿜어냈지만, 저항은커녕 그때 결심한 대로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애써 현실을 외면해나갔다.
하지만, 억지로 참아내는 그의 모습에 배덕감을 느낀 그녀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입 밖으로 크게 신음을 내뱉으며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를 여과 없이 바깥으로 드러내며 그를 자극해나갔다.
그렇게 몇십분 같은 몇십초가 지나고 마침내 주차된 차에 도착한 그가 그녀의 에스코트에 따라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탑승했고 곧이어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어낸 그녀가 운전석에 탑승했다.
" 어때? 따뜻하지? "
" 네. 따뜻하고 포근해요. 사장님. "
실상은 향수 냄새와 찌든 담배 냄새가 따뜻한 히터 공기와 섞여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져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님을 만나러 갈 것 같았지만.
" 하하! 유진 씨가 그렇게 말을 해주니까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네. 자,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원래라면 내가 유진 씨를 데리고 어디를 가려고 했냐면……. 어, 음, 유진 씨랑 저번에 갔던 공원 혹시 아직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
" 아..... "
공원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얼마 전 그녀와 단둘이서 함께했던 시간. 떠올리기 싫었던 그때의 그 기억들이 다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자 차 시트에 기대고 있던 그의 두 어깨에 떨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 저번에 그쪽이랑 갔던 공원 기억하냐고?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그 공원을 잊을 수 있겠어. '
얼마 전 그쪽이랑 단둘이서 갔던 그 공원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아직, 내 몸을 더듬던 당신의 손길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데 내가 그곳을 잊어먹을 리가 없잖아?
오늘처럼 학교 앞에서 차를 댄 채 나를 기다리며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며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그 모습.
나를 차에 태운 뒤, 마치, 사형수들이 사형집행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만찬을 대접해주는 것처럼 비싼 음식을 내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던 그 모습.
그리고, 차를 운전해 공원에 도착한 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나를 앉히는 그 모습.
그리고선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이상한 말을 내뱉는 그 모습까지.
편린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그곳에서의 악몽 같은 기억들 때문에 손톱에 살이 파일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은 어느새 빨개졌으며, 목에 힘이 꽤나 많이 들어갔는지 핏대는 단단히 서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이빨로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에 송골송골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 ......네. 기억해요. 사장님. "
" 그래, 기억하지? 원래는 거기보다 시설도 좋고 볼거리도 많은데 유동인구는 적은 곳이 있거든? 거기로 가서 저번처럼 산책도 좀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우리 유진 씨랑 즐거운 놀이도 하려고 했는데 하필 오늘 비가 내려버리네. "
" .... "
" 거기 진짜로 예쁜 곳도 많고 화려한 장식품도 많아서 사진 찍기도 진짜 좋은데 이렇게 된 이상 다음으로 기약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거기 가면 유진 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완전 감탄을 연발할 텐데 못 보여줘서 진짜로 아쉽네. 아무튼, 그래서 공원도 못 가는 마당에 우리 유진 씨를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할까 심히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비가 오니까 실외는 무리고 선택지가 실내밖에 없더라고? "
" 네, 그렇죠.... "
" 그런데 둘이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있는데 그 시간 내에서 도착 한 다음 즐길 수 있는 실내 장소가 너무 제한되는 거야. 인터넷을 뒤져보고 막 주위를 찾아봐도 도저히 유진 씨랑 갈만한 데가 보이질 않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아쉽게도 유진 씨 저녁만 먹여주고 집으로 바로 보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
" 저, 정말이에요? "
우울한 기분 속 마음속을 비추어주는 한 가지 빛줄기와도 같은 소식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저녁만 먹고 바로 집으로 보내줄 수밖에 없다니. 그녀에게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겠지만 나한테는 정말 다시 곱씹어보아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한 소식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은 그녀와 단둘이서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 제발, 비야. 멈추지 말고 앞으로 더욱더 힘차게 내려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으고선 오늘 비가 내릴 수 있도록 하게 해준 자연현상에 그는 고마움을 표하면서 혹여라도 중간에 비가 그치지 않게 기도문을 읊으며 조금만 더 힘을 내라며 자연현상을 강하게 격려했다. 물론 바깥으로는 그도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없어서 아쉬운 것처럼 탄식을 내뱉어주었다.
" 아, 아쉽네요.... "
" 응,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에이씨, 원래라면 우리 유진 씨랑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뭐 어쩌겠어? 애초에 계획 자체가 비가 안 온다는 전제하에 잡은 건데 지금 이렇게 비가 쏟아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계획들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어? 다 폐기처분 해버리거나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지. 오늘은 오랜 시간을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아쉽지만, 솔직히 나랑 유진 씨한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잖아? "
정확히 말하자면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내가 많은 시간이 남아돌 수 있도록 그쪽이 만드는 것일 테지만.
" 그, 그렇죠.... "
" 오늘같이 못 있었던 건 그때 몇 배로 풀어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잖아? "
몇 배로 풀어나가면 된다는 말의 강한 어조가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그것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으며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행복한 상황에 그는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선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 자, 그러면 출발하자. 오늘 저녁도 저번처럼 내가 아주 많이 공들여서 준비한 거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
안전벨트를 매고 차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면서 핸들을 조작하자 그녀의 차가 빗방울을 가르며 유려하게 저녁 식사를 예약한 가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중후한 중세시대의 성문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가게의 문을 열고 나오는 두 남녀.
단정하고 깔끔한 정복 차림의 부지배인이 해주는 배웅을 받으며 문을 뒤로하고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여성은 입에 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뱉어내며 잔뜩 빵빵해진 배를 두드렸다.
" 아이고, 배부르고 맛있게 잘 먹었다. 주방장이 더 좋은 사람으로 바뀐 건가? 저번보다 맛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데. 유진 씨는 어땠어? "
어땠냐고?
" 저도 맛있었어요. "
거짓말이다. 솔직히 맛없었다.
비싼 것도 안다. 하나 같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재료들을 사용한 것도 알고 그 음식들을 만든 주방장의 실력도 가히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싸고, 귀하고 좋은 재료를 쓰고, 주방장의 실력이 세계 최고라도 그 음식을 이 아줌마랑 단둘이서 먹는 것보다는 집에서 아내와 조촐한 반찬과 함께 된장국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는 싱긋 미소지으며 정말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맛있었다며 뒷말을 덧붙였다.
" 그래? 나 혼자 맛있게 먹고 정작 데려온 남자는 맛없었다고 하면 그것만큼 뻘쭘한 것도 없을 텐데 유진 씨가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까 다행이네. 그나저나, 비가 도저히 그칠 생각을 안 하네. "
고개를 돌리자 마치 하늘에서 생활하는 우아한 선녀들 수천 명이 옥황상제에게 혼이 나서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아까보다 더욱 굵어진 모습을 띠고 있는 빗줄기.
그 광경을 본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와도 비가 그치지 않고 더욱더 세게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차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반대로 그는 자꾸만 밖으로 표출되려는 기쁨을 애써 참아보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내 기도를 들어준 거야. '
판타지 소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정령사나 마법사처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한 기도가 먹혀든 걸까?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와도 빗줄기가 약해지거나 그치지 않고 더욱 세졌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기쁨의 포효를 뱉어내고 싶었다.
" 에이씨, 저녁 먹고 나오면 그쳐있을 줄 알았는데 괜한 기대를 해버렸네. 씨, 이 정도면 하늘에 구멍 뚫린 것 마냥 하루종일 비 오겠네. 왜 갑자기 날씨가 이상해지고 지랄인지 원, 쯧. "
" ... "
" 비 그쳐있으면 원래 계획한 대로 유진 씨 데리고 그 공원에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얌전히 집에 데려다줘야겠네. "
" 저, 정말이죠? "
" 그럼, 당연하지. 이대로 유진 씨를 집에 보내는 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나랑 유진 씨가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 그러면 약속한 대로 집까지 태워줄게. 우산 씌워줄 테니까 얼른 가자. "
파라솔같이 넓은 우산을 펴서 자리는 충분히 넉넉하고도 남아돌았지만, 일부러 그와 몸을 밀착한 그녀는 아까 전 학교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에 사이좋은 연인처럼 깍지를 낀 채 주차장까지 에스코트를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투박하고 거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의 손길에 다시 불편해진 그는 늘 그랬듯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참아가며 에스코트에 따라 주차장까지 비를 맞지 않고 걸어갔고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가 안전하게 탑승하자 곧이어 그녀도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안전하게 운전석에 탑승을 완료했다.
" 자, 그러면 바로 출발할게. 혹시 따로 살 물건 같은 건 없지? 그런 거 있으면 중간에 마트나 편의점에서 한 번 멈추려고 하는 데 있다면 지금 말해줘. "
" 고, 괜찮아요. 사장님. "
" 그래? 없는 거 맞지? 나중에 지나쳤는데 후진해주세요, 저기 가주면 안 돼요? 같은 딴소리 하기 없기다. 미리 알아둬. 자, 그러면 출발할 테니까 꽉 잡으시고. "
처음 주차장에 들어왔을 때처럼 부드럽게 주차 공간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차가 창문 밖으로 빛나는 간판 불빛들과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뒤로 한 채 핸들링에 맞춰 유려하게 다시 도로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유진 씨 동네는 너무 으슥해. 난 이런 동네가 아직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야. 저기 어디 아프리카 빈곤 국가에서나 보일법한 동네인데. "
빗줄기는 세차고 쨍쨍하게 빛나던 해는 이미 져버린 지 오래였으며 그 흔한 가로등조차도 그리 많지 않은 동네였기에 차 라이트에 의지한 채 천천히 서행을 하며 골목길을 지나쳐가는 그녀는 창문 밖으로 비치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자아냈다.
" 아니, 진짜라니까? 항상 유진 씨를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느끼는 건데 여긴 괜히 남자가 지나가다가 질 안 좋은 여자 몇명한테 끌려가서 골목길에서 강간당하고 버려질 것 같은 동네처럼 보인다니까? 이딴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거야? "
" 보기 보다는 괘,괜찮아요. 다른 곳보다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하시는 것처럼 치안이 외국처럼 엄청나게 불안하거나 그런 곳은 아니라서... "
"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없는데? 분위기만 보면 당장이라도 저기 으슥한 곳에서 좀비들이 튀어나와 팔을 물어뜯을 것처럼 보이는 거 알아? 유진 씨는 이사하고 싶은 마음 없어? 애초에 사람인 이상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건 본능일 텐데. "
이사하고 싶지 않냐고?
" 아니요. 이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저는 여기에 더 있고 싶은걸요. "
" 왜? "
사심 없이 오로지 궁금증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녀가 묻자 오히려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명쾌하게 답을 내뱉었다.
" 전 장소가 어디가 됐든 간에 아내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단칸방이든 옥탑방이든 어느 곳이든지 큰 상관이 없어요. 이사라는 것도 형편이 돼야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굳이 그런 거로 아내한테 부담을 가중하기 싫기도 하고. 그리고 저는 여기가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라 생각해요. 애초에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저는 집도 없이 찜질방이나 PC방만 전전했는걸요? 이 정도면 저한테는 충분한 곳이에요. 오히려 넘치는 곳이죠. "
그의 대답에 핸들을 잡고 있던 그녀의 입 밖으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면서 현대 시대에서는 더 이상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현부양부의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거짓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진성으로 감탄을 섞어가며 그의 아내라는 위치를 차지 하고 있는 선유린에 대한 부러움을 여과 없이 나타냈다.
" 허, 와. 진짜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유린 씨는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니라 행성 자체를 구한 게 아닐까? 도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이런 참한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원, 아이고 부러워 죽겠네. 그런데 그거 알아? 보면 볼수록 유린 씨한테 유진 씨는 너무 아까운 사람으로 느껴져. 마치, 캐비어가 알탕에 들어간 느낌이랄까? "
" 네? 아,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 오히려 아내에 비해 제가 더 모자란다고 생각하는걸요. "
"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유진 씨 같은 사람이 모자란 사람이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바보 천지겠네? 옆에서 보는 내가 더 안쓰러워지니까 본인을 자꾸 깎아내려고 하진 마. 쯧, 우리 유진 씨 같은 사람은 여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유린 씨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여자답고 경제적 능력도 좋은 여자랑 만나야 하는 법인데. 바로 나 같은 사람처럼 말이야. "
" 아하하.... "
그렇게 진심이 섞인 그녀의 눈빛과 함께 간간이 이어지는 성추행, 그리고 실없는 소리에 그가 대충 반응을 이어간 지 몇 분.
" 아, 거의 다 왔네요. "
어느새 집 앞 가까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그는 마지막으로 내리기 전 혹여나 잃어버린 게 없는지 주머니를 확인했고 그다음 뒷자리에 곤히 보관되어 있던 가방을 챙겨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이제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나 집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확실히 저녁 식사만 하고 집으로 바로 돌아왔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번이나 얼마전 만났을때와 같이 신체적 접촉은 많이 있었기에 얼른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며 비누로 최대한 몸을 빡빡 씻어낼 것이다. 그녀의 손길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씻어내지 않고 그대로 둬버린다?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 그럼 사장님.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도 집 앞까지 데려다주셔서 가, 감사했습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
얼른 집으로 돌아가 옷부터 전부 벗은 다음 화장실로 직행해야겠다고 결심한 그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자동차의 손잡이를 당기는 그 순간.
철컥ㅡ
자동차 문이 잠겨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