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49화 (49/77)

〈 49화 〉 폭발

* * *

" 흠. "

메뉴판을 손에 든 채 고민을 거듭하는 여성. 마치, 일생일대의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신중을 기하며 그녀는 잔뜩 시간을 끌었지만, 테이블 옆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남성은 일말의 짜증도 내비치지 않은 채 싱긋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 음, 아.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고민이네. 아이씨, 나는 다른 곳에서는 안 그러는데 유독 여기만 오면 항상 결정장애가 오는 것 같다니까?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

온갖 육류 사진이 잔뜩 붙어있는 메뉴판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그녀는 잔뜩 고인 침을 꿀떡 삼키면서 끙끙 앓아대며 고민의 신음을 입 밖으로 내뱉더니 곧바로 고개를 갸웃 움직이면서 테이블 옆에 꼿꼿이 서 있는 남성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내비쳤다.

" 아이고, 이거 결정장애가 와버려서 주문도 안 하고 있는 여자가 괜히 잘생긴 직원분을 혼자 너무 오랫동안 잡아두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어떡하지. "

"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고르셔도 괜찮습니다. 종업원으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

하지만 남성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사무적인 웃음을 보여주며 고개를 숙였다. 종업원의 정석적인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감을 표현한 그녀는 이내 결심을 한 것인지 메뉴판을 덮고서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서 있는 남자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 하하, 직원분이 정말 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나네. 그래도 바쁜 사람 계속 붙잡고 있기에는 미안하니까 그냥, 고민은 여기서 끝내고 바로 주문해버릴 테니 잘 들어줘요. "

" 네, 알겠습니다. "

" 여기서 분명 남자들한테 인기 좋은 것들이 있을 텐데 난 오랜만에 왔기도 하고 그런 방면은 잘 모르니까 아무래도 직원인 그쪽이 추천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

" 음, 사실 남녀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저희 가게의 메뉴를 좋아하시긴 하는데 손님분의 이야기대로 남성분들한테 인기가 좋은 것들을 꼽자고 한다면 대체로 안창살, 안심, 그리고 토시살과 부챗살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

"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더 고민할 필요 없겠네. 굳이 여기서 더 생각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냥 아까 그쪽이 말한 그 부위들로 각각 오십만씩만 내와 주면 될 것 같은데. "

쇠망치로 뒤통수를 후린 것처럼 파격적인 그녀의 말에 잠시 사고능력이 정지된 직원은 프로답게 행동하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얼빠진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주문을 재차 다시 한번 확인했다.

" 그, 재차 물어서 죄송합니다만 소, 손님 말씀대로라면 안창살 오십만 원어치, 안심 오십만 원어치, 그리고 토시살 오십만 원어치, 부챗살 오십만 원어치. 도합 이백만 원어치를 말씀하시는 건데 이, 이게 맞으신지.... "

" 하하! 잘못 주문 한 거 아니니까 그대로 주문표에 적어서 주방으로 보내면 돼요. 어차피 오십만 원어치라고 해봐도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애초에 내가 헌터라서 음식 남길 걱정 안 해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혹시나 가격 걱정 하는 것 같아서 이야기하는데 나 길드장이야. "

직원의 팔뚝을 툭툭 두드리는 그녀.

" 아, 알겠습니다. 그대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곧바로 주문한 고기와 함께 어울리는 밑반찬을 깔아드릴 테니 잠시만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

직원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얼빠진 얼굴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뒤 프로답게 정신을 차린 후 고개를 숙이고선 밑반찬을 준비하러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런 직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만족한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미리 깔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냄과 동시에 익숙하게 수저를 통에서 꺼내놓았다.

" 흠, 이 가게는 진짜 오랜만에 왔지만 여긴 항상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인테리어가 진짜 진국이라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 유진 씨. "

주위를 둘러보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양팔을 옆으로 활짝 피면서 그에게 감상평을 요구했다.

" 이, 인테리어요? "

" 응! 인테리어! 이 인테리어가 진짜 괜찮지 않아? 이게, 아무래도 여자가 보는 시선이랑 남자가 보는 시선이랑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우리 유진 씨의 의견은 어떤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 인테리어가 진짜 진국이라고 생각하거든. "

" 어, 그러니까... "

주위를 둘러보자 금색과 여러 색깔들의 조화가 한데 어우러지고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 그리고 TV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장식품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과연 이곳이 일반적인 고깃집이 맞는 걸까? 착각이 들 정도.

앞에 깔려있는 테이블의 재질도 일반적인 재질이 아니었다. 반딱반딱 광이 나고 촉감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것도 포함해서 판단하건대 분명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신기한 물질로 이루어진 게 확실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식당에 불과한 곳인데 과연 이곳이 한국이 아니고 중동의 부자가 소유한 빌딩의 내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경외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 저,정말 화려한 것 같아요. "

" 그래? 그 소리는 마음에 든다는 거지? 우리 유진 씨가 좋아해서 다행이네. 데려온 보람이 있어! "

" 아, 네..... "

그녀의 말에 대충 대답을 해주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제집처럼 행동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오유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테이블 밑에서 갈 곳을 잃은 두 손으로 자신의 옷을 마구 긁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 결국 와버렸어.... '

내 거짓말이 들키고 난 후로 결국에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 상황까지 오게 되버렸다.자신이 개인적으로 그어놓은 금기와 선을 넘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선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너무나도 싫었다. 상식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안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치스럽게도, 분하게도 주위에 다른 사람도 없이 오직 이 아줌마와 단둘이서 저녁을 먹으러 온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반항도 해봤다. 그렇게 거세게 반항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온갖 변명과 핑계를 대며 최대한 상황을 무마시키고 피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내가 아내와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핑계를 댄 게 거짓말이라고 완전히 들통나버린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겠는가?

거짓말이 들통나버린 상황에서 주도권은 아줌마에게로 넘어갔으며,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오묘한 표정과 눈빛을 마주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띄며 그녀가 말하는 부탁과 제안 그리고 이끌림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 집에 가고 싶어. '

기분이 나쁘다. 아니, 이걸 단순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하는 것은 모자라다. 불쾌하다. 혐오감이 든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가방을 멘 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집으로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이후에 돌아올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답은 당연히 NO지 않은가. 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신도, 능력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그러한 복잡한 사정이 끊임없이 내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 유진 씨. "

그때였다.

" ㄴ, 네?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면서 상념에서 빠져나와 황급이 고개를 들어올리는 오유진.

잠깐 동안 흐르는 침묵. 곧이어 턱을 괸 채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독심술사라도 되는 것인지 괜히 테이블 위에 잔뜩 구겨져 있는 휴짓조각들을 만지면서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말을 태연히 꺼냈다.

" 설마 하는 마음에 묻는 건데 지금 이 자리가 싫거나 그런 건 아니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가 막 샘솟아 오르는 게 확연히 눈에 보이고 있는데 그렇게도 나랑 같이 저녁밥을 먹는 게 싫은 거야? 아이씨, 만약 그런 거라면 나 진짜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

" 아, 아니에요. 싫다니요! 오히려 저를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서 더욱 감사하고 좋은걸요. 그, 그런 생각 하고 있지 않으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사장님! "

독심술사라도 되는 걸까? 아주 정확하게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바로 저것이었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 말에 강한 부정을 보였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는 열심히 나불대던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 그런데 거짓말은 왜 한 거야? "

" ……. "

" 아니, 생각을 해봐. 나랑 같이 저녁밥을 먹는 게 전혀 기분나쁘지 않고 좋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까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약간 앞뒤가 안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돼잖아. 안 그래? 유진 씨. "

" 아, 그, 그러니까 그게..... "

" 유진 씨. "

뭐라고 변명을 해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 가며 그녀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 멘트를 생각하는 도중,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나의 사고기능 또한 정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괜히 어쭙잖은 변명으로 상황을 어설프게 수습하려고 했다가는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선 다시 한번 눈을 감으며 침묵을 지켰다.

" 유진 씨. 잘못은 할 수 있어. 유진 씨도 아까전에 나한테 잘못했는데 솔직히 사람이 살아가면서 잘못 한 번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내가 진짜로 전 재산을 다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야. "

" ... "

" 그런데 그게 절대로 두 번이 돼서는 안돼. 한 번은 실수가 될 수 있지만 그게 두 번이 넘어가는 순간 그건 실수가 아니라 죄가 돼버리는 거야. 그것도 아주 용납할 수 없는 대역죄가 돼버리지. 아까 유진 씨가 거짓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반대로 생각해봐! "

" ... "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그녀는 마치 연설가처럼 열띤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 좋은 일자리도 찾아줘! 돈도 줘!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 안정시켜줘! 좋은 인맥이 되어줘! 친절하게 대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때론 유린 씨처럼 애정도 주고 무한한 사랑도 준 다음 대가로 요구하는 게 고작 저녁 한 끼 같이 먹으며 이야기하자는 건데 막상 그 사람한테서 돌아오는 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라고 생각을 해 봐! 유진 씨라면 안 섭섭하겠어? 엄청 섭섭하고 화가 날 것 같지 않아? "

투박하고 거친 그녀의 손이 어깨를 쓸어내리자 그는 마음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울분을 억지로 삼켜냈다.

' 당신이라서 그랬던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니까 그랬던 거라고! 나를 희롱하고 협박하는 당신이 아니라 만약 경섭 씨나 창우 씨였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면서 거절을 할 이유도 없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는 거냐고..... '

당장이라도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외치고 싶었지만, 현실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마음속 생각과는 다르게 마치 죄를 뉘우치는 범죄자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에게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 사, 사장님 말씀이 다 맞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그러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 한번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면..... "

" 아이, 됐어!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봐주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아직, 유진 씨는 한 번의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 두 번의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잖아? "

" 아……. 가, 감사합니다. "

" 그런데 두 번 이상 하는 순간 완전히 아웃돼버리는 건 알지? "

" ..... "

" 난 부처가 아니야. 가만히 당해주는 호구 새끼는 더더욱 아니라고. 솔직히, 한 번 용서해주면 됐지. 내가 굳이 선심 써가며 두 번 세 번 용서해줄 이유는 없잖아? "

" 그, 그렇죠. "

" 그런 의미에서 이미 한 번 적립이 됐고 나머지 한 번이 생기지 않기 위해선 우리 유진 씨가 엄청나게 노력해야 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는 뭔지 자세히 말을 안 해줘도 유진 씨는 똑똑하니까 대충 눈치는 챌 수 있잖아? 응? 안 그래? "

그때였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를 향해 쇄도하는 그녀의 두 손. 거친 숨을 내뱉고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곧이어 그녀의 투박하고 거친 그녀의 손이 그의 신체에 얹어졌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그녀의 손길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두 어깨를 들썩거렸다.

왜냐하면, 그녀의 손길이 예전이랑 다르게 단순히 쓸어내리고 만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부부가 성행위를 나누기 전 몸을 예열하기 위해 나누는 애무 행위처럼 한층 더 끈적하고 깊으며 은밀한 곳을 더듬는 손길이었기 때문이었다.

" 자, 잠깐만요. 사장님, 이게 무슨... "

두 어깨를 들썩임과 동시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틀면서 황급히 그가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그녀의 한마디에 그는 저항 의지를 잃어버리고선 버둥거림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유진 씨. 한 번 적립 됐다니까? "

" 네? "

" 두 번 이상 잘못을 범하는 순간 완전히 아웃돼버리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유진 씨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하다고 내가 말했잖아. 우리 유진 씨는 똑똑하니까 대충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줬는데 벌써 까먹은 거야? "

" .... "

" 여기서 멈춰버리면 또 적립되는 거고,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론 두 번이 돼버리는 거잖아? 그럼,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나도 자세히 모르는데 괜찮겠어? "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저 말의 의미가 협박을 담고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아챌 수 있겠지. 그 또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늪에 빠진 것이었다. 그것도 한 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발버둥 쳐봤자 더욱 깊이 빠져드는 깊은 늪에 빠진 것이었다. 아까전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그 거짓말 때문에.......

' 이게 무슨..... '

그 말의 의미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알아채자마자 그는 충격과 공포에 빠져버렸고 그러자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몸부림또한 멈추게 되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입가에 긴 호선을 그려내고선, 곧바로 그의 몸에 대고 있던 손을 뗀 다음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좋아! 역시, 우리 유진 씨가 대학생이라서 그런지 상황 파악이 빠르다니까!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사회생활 정말 잘할 거야! 현대 사회에 가장 부합하는 인간상이라니까? "

" ..... "

그는 쉽사리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혼란스러워 하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 자, 그러면 이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버리자! 괜히 좋은 일도 아닌데 끝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트러블이 생길 게 분명하니까 앞으로 이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고 이제 즐기도록 하자고! 맛있는 저녁 먹으러 왔는데 그 목적에 충실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유진 씨? "

" .... "

" 대답해야지? 어른이 묻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거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유진 씨? "

" 네..... 마, 맞아요. 사장님. "

" 좋아! 자, 그러면 이제 다시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으로 돌아가자고! 마침, 딱 타이밍 좋게 음식도 나오고 있으니까 먹으면서 시작하자! "

억지로 대답을 쥐어 짜내는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박수를 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외쳤다.

그러자, 빨갛고 적절한 지방이 분배되어있으며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티가 나는 고기들과 화려하고 예쁘게 장식되어있는 밑반찬들이 가득 담겨있는 카트들이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이어져 우리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곧바로 테이블 위로 깔리는 휘황찬란한 음식들의 향연과 고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들.

음식의 향연이 끝나고선 줄줄이 들어온 카트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갔으며 그 이후로는 직원이 손수 구워주려고 하는 것인지 저 멀리서 여자 직원 여럿이 가위와 집게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필요 없다는 표시를 보낸 후 본인이 직접 가위와 집게를 꺼내 고기를 한 점씩 달궈진 불판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치이익ㅡ

먹음직스러운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 그 모습에 그녀는 입맛을 츄릅 다시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반대로 그는 불판 위에서 잘 익어가는 탐스러운 고기를 보고도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 ... "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인간인 이상, 사람인 이상 맛있고 화려한 음식을 보면 작은 감정이라도 드는 게 인간의 본능이었지만 마음속에 있는 혼란스러운 감정과 실의 그리고 공포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나의 식욕을 단단히 막아서고 있었다.

" 음, 역시 맛있어. 유명하고 고급스러운 맛집이란 곳은 전부 다 가봤는데 난 고기 자체로 따졌을 때는 여기보다 좋은 곳은 진짜 못 찾겠더라고. "

그러거나 말거나 벌써 고기를 전부 다 구워서 다시 불판 위에 새 고기를 올린 뒤 다 구운 노릇노릇한 고기를 여러 야채와 함께 소스를 찍어 한입에 집어 삼켜버리는 그녀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씹으며 젓가락도 들지 않은 그를 향해 얼른 음식을 먹으라고 권유했다.

" 안 먹고 뭐 해? "

햄스터처럼 양쪽 볼에 음식을 빵빵하게 저장한 그녀가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은 다음 소스를 찍어 그의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 엄청 맛있어 보이지 않아? 유진 씨는 이런 고급스러운 것들을 별로 먹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고기들 진짜 질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둬. 안 그래도 없는 형편인데 이런 거 먹을 기회가 오면 단단히 잡고 한 몫 당겨야 할 거 아니야? 자, 내가 한 점 손수 먹여줄 테니까 얼른 입 벌려! "

" .....아, 제, 제가 먹을게요. 사장님. 굳이 이러시지 않으셔도... "

" 아이참, 사람 성의를 이렇게 무시할 거야? 어른이 주면 괜히 튕기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입 꾹 다물고 받는 게 예의인 거야. 아이고, 난 모르겠다! 우리 유진 씨가 얼른 안 먹으면 젓가락이 무거워서 오른팔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은데 이거 어떡해야 할까!? "

" .....머, 먹을게요. "

일부러 유난을 부리며 협박에 의미를 둔 티가 풀풀 풍기는 그녀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받아먹은 그가 눈치를 보면서 꼭꼭 씹은 다음 고기를 목 뒤로 꿀떡 삼키자 마치 편식하지 않고 여러 반찬을 골고루 먹는 아이를 칭찬하는 부모님처럼 그녀가 박수를 치면서 아이를 다루듯이 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 어이구! 잘 먹네! 내가 하나 더 떠먹여 줄까? "

" 아, 아니에요. 제가 먹을게요. "

" 그래? 그럼, 알았어. 체하지 않게 아까처럼 꼭꼭 씹어서 삼키고, 그리고 아직 남은 고기는 많으니까 양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알겠어? 유진 씨. "

" 아, 네…. 마, 많이 먹을게요. 사장님. 자, 잘 먹겠습니다. 와!....."

아무런 감정도 영혼도 없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불편한 식사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스퍼트를 올리는 그녀.

뚱뚱한 몸매는 날 때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한 손으로는 소고기를 입안에 허겁지겁 집어넣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집게를 들고서 고기를 빠르게 불판 위에 올리는 탁월한 멀티태스킹 능력을 뽐내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빠르게 흡입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아내 때문에 웬만한 대식가들을 보고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군다나 그녀를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오유진이 그녀가 음식을 제대로 먹는 모습을 보고선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는 곧바로 젓가락을 들고선 오직 자신만이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작은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음식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사실, 입맛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는 본인이 젓가락으로 집어 먹고 있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제대로 구분도 못 하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는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소고기를 억지로 입안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물려도 집어넣었고, 배가 불러도 억지로 참아가면서 음식을 계속해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미 한계치를 넘어버린 뱃속에 자꾸 무언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굉장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먹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혼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놓은 채 가만히 있다고 생각해보아라.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게 뭐가 잘못인 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저 아줌마도 그렇게 생각할까? 적어도 내가 판단하건대 저 아줌마는 일반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않고 아마, 무언가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그렇기에 나는 속도가 늦춰지는 한이 있더라도 젓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똑딱ㅡ 똑딱ㅡ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음식들은 어느새 많이 줄어있었고 몇 날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고 빠르게 음식을 먹어 치우던 그녀의 속도도 한풀 꺾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애초에 그 많은 양의 고기를 씹지도 않고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는데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 아이고, 이제야 좀 배가 차네. 사실 내가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 이 가게는 워낙 맛있어서 평소보다 음식이 더 잘 들어가더라고. 가만히 보면 진짜 신기한 가게라니까? "

" 그,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음식이 평소보다 더 잘 들어가는 것 같아요.... "

" 그렇지?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이 가게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터가 좋아서 흘러나오는 기운 자체가 선해서 그런가? 진짜 미스테리하다니까. 그나저나, 내가 아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 씨랑 단둘이서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거잖아? 평소에는 항상 옆에 방해꾼이나 엑스트라가 붙어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끼리 시간을 보내니까 되게 좋은 것 같아. "

" ... "

" 특히나 저번에 정문 앞에서 봤던 그 남자! 그 씨발놈은 나이도 어리면서 초면에 반말 찍찍 내뱉고 남자가 돼서 창놈 마냥 욕설이나 내뱉고. 우리 유진 씨랑 내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성질 내던 게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원. 자고로 남자라면 우리 유진 씨처럼 조신하고 헌신적이고 언행이 단정해야 하는데 말이야. "

저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한 남성을 언급하는 그녀는 사람대 사람으로서 내뱉지 말아야 할 단어까지 써가면서 그 사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그 사람에 대한 욕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의 입가는 위로 올라갔고, 그의 입가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언급하는 사람이 경섭 씨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 그나저나, 갑자기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긴 한데 그 새끼랑 유진 씨랑 꽤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지금은 그 새끼랑 유진 씨랑은 어떻게 뭐, 잘 지내고 있는 거야? "

어떻게 지내냐고?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때 그 일 덕분에 나랑 경섭 씨, 그리고 창우 씨와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렸다.

하교할 때도, 강의실을 이동할 때도, 무언가를 먹으러 갈 때도 항상 내 옆에 쭐레쭐레 따라와 팔짱을 끼고 붙은 다음 실없는 이야기와 농담을 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여주던 경섭 씨.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주고 나랑 어울려주고 나를 위해 나서주던 경섭 씨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혹여라도 마주칠세라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창우 씨와 함께 저 멀리 사라지고, 항상 붙어있던 자리를 떼어내고, 말을 걸기 전에 괜히 자리를 피하며 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섭 씨만이 남아있을 뿐.

씁쓸했다. 항상 옆에 서있어주던 사람이 사라지니 학교에서 시간을 보낼때마다 허무함과 외로움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경섭씨에 대해서 짜증이 나거나 서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자업자득. 경섭 씨가 나를 먼저 밀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그를 밀어낸 것이기 때문에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한테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아니요. 그때 이후로 같이 안 다니고 있어요.... "

" 그래? 잘했어! 진짜로 잘했어! 그런 수준 떨어지는 애랑 같이 어울리다 보면 본인 수준도 같이 떨어지기 마련이야! 유진 씨 같이 수준 높은 사람은 그런 애랑 어울리면 안 되고 나같이 고급스러운 사람들이랑 어울려야 하는 법이라니까. "

좋을 것이다. 당연히 기쁘겠지. 여러 가지 사정과 성격 등이 얽혀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나와는 다르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얼마든지 태클을 걸 수 있는 경섭 씨라는 존재는 아줌마한테는 굉장히 거슬리는 존재였겠지.

그런 사람과 나와의 연결선이 끊어졌다는 게 확실해졌기 때문에 아줌마는 나와 경섭 씨와의 근황을 듣고서 기쁨을 숨김없이 내비치는 게 분명했다.

" .... "

" 난 또 그때 이후로 유진 씨가 그런 불량한 창놈 같은 새끼랑 계속 어울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

그러자,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경섭 씨의 얼굴.

그는 규격이 맞지 않는 구멍에 막대기를 끼워 넣는 것처럼 머릿속에 존재하는 지우개로 자꾸만 떠오르는 경섭 씨의 얼굴을 지워갔다.

그가 아무런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섭 씨의 얼굴을 지우개로 지우고 있을 때, 그사이 벌써 소화가 완료된 것인지 불판 위에서 식어가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쩝쩝 씹어대는 그녀는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혀로 입가를 핥으면서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유진 씨. "

" ㄴ, 네? "

" 유진 씨 나이가 지금 스물한 살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결혼을 스무 살 때 했고. 맞지? "

" ㄴ, 네. 맞아요. 사장님. "

" 그러면, 유린 씨랑 만나서 결혼을 하기 전에 다른 여자들이랑 연애나 썸같은 거 해본 적 있을 거 아니야. "

" 아, 아니에요.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

" 에이! 거짓말 하지 마! 요즘 시대가 조선 시대도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

그의 부정에 거짓말하지 말라며 손사래 치는 그녀.

" 지, 진짠데.... "

"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하면 안 돼! 설마, 내가 유린 씨한테 다 말할까 봐 일부러 숨기는 거야? 에이, 내가 이야기 듣자마자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할 사람처럼 보여?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내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유진 씨.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뭐,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옛날에 여자랑 사귀고 썸좀 탄 게 문제 될 게 뭐가 있어!? 나한테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도 괜찮아. "

" 그, 그게 아니라 진짜 저는 누구랑 사귀어보거나 썸같은 걸 타본 적이 없어요. 인생 역사상 제 첫 여자가 지금 제 아내인걸요.... "

대쪽같이 변하지 않는 그의 대답. 그 대답을 들은 그녀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 ...... 아니, 정말로? 초등학생은 코흘리개 시절이니까 집어치우고,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연애나 썸같은 거 타본 적 없어? 솔직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유린 씨랑 결혼을 하기 전에는 유진 씨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삶을 살아왔을 텐데 그렇다면 유진 씨 같이 매력적인 사람은 필연적으로 여자랑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진짜로 사귀어보거나 썸같은 걸 타본 적이 없다고? "

" 어, 없는데요……. "

애초에 난 이쪽 세상에서 살아가던 원주민이 아니라 갑자기 떨어진 이방인이었기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지도 않았다. 그리고, 손에 쥔 것 없이 떨어진 스무 살짜리가 영문 모를 세계에서 정착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수없이 많이 뛰느라 누굴 만날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고, 이전 세상에서는 친구도 없는 찐따였기 때문에 여자는커녕 같이 노는 남자애들도 없었다.

이전 세상이나, 이곳 세상이나 두 세상을 합쳐도 첫 여자는 지금의 아내라는 것. 이것이 진실이었다.

쐐기를 박는 진실이 녹아들어 있는 그의 말.

그 말에 잠시 고장 난 로봇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영문 모를 함박웃음을 짓더니 손을 뻗어 그의 두 손을 거세게 낚아채더니 자신에게로 거칠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벌어진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한 그는 축축한 땀으로 젖어있는 그녀의 두 손에 낚인 다음, 마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의자에서 강제로 일어나게 되었고 힘으로도 반항할 수 없는 그는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서서히 그녀에게로 끌려가게 되었다.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느샌가 그녀의 앞까지 도달한 그는 굉장히 위험한 수위에 근접해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빛이 어찌나 추악하던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겁에 질린 욕설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 연애도, 썸도 안해봤다고? 아랫도리 함부로 휘두르고 다녀서 걸레 같은 새끼밖에 없는 게 요즘 세상인데 이런 때 묻지 않은 흰 도화지를 유진씨가 가지고 있다니..... 진짜 감탄 밖에 안나오는걸? 하하.... 하하! "

" ... "

" 솔직히 말해서 난 유진 씨의 과거가 재사용 불가능한 걸레였어도 그걸 감수할 만큼 매력적이니까 충분히 용납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과거가 더럽기는커녕 이렇게 깨끗하면 나 진짜 미쳐버리지. "

" ...네? "

" 그래! 어쩌면, 그때 유린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바로 내가 유진에게로 이끌리는 운명. 바로 그런 거지. 때 묻지 않은 도화지에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정말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아. "

그 순간, 그의 두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들은 어느샌가 이동해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마치 먹이를 천천히 졸라 죽이는 보아뱀처럼 한쪽 팔에 전부 들어오도록 서서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팔에 힘을 주더니 세게 끌어당겨 그를 자신의 품에 안기도록 만들어버렸다.

" 뭐, 뭐야!? 어어...!? "

당연히 힘없이 그녀의 손길대로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던 그는 거친 숨소리와 몰랑한 것을 넘어서 옷 위로도 느껴지는 처진 살, 코를 찌르는 땀 냄새와 담배 냄새를 느끼면서 갑자기 일어난 영문모를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사, 사장님!? 갑자기 왜,왜이러세요! 지,진정..... "

갑작스럽게 닥친 청천벽력같은 상황에 그의 머리가 아예 초기화가 돼버린 것처럼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고선, 그녀의 위험한 눈빛을 마주하고 본능적으로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 일어나겠다는 것을 인지한 그가 그녀가 여태까지 했던 경고와 협박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채 곧바로 큰 목소리를 지르면서 요란스럽게 몸을 비틀며 거세게 저항하려던 그 순간.

" 씨발, 가만히 좀 있어. "

주위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그녀의 작고 위압감이 있는 읊조림에 그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지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서 그녀는 재차 경고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 내가 분명히 말했지? 두 번 이상 잘못을 범하는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유진 씨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

" ... "

" 얌전히 좀 있어. 씨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유진 씨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면 곤란해진다니까? 뭐, 혹시 내가 무슨 짓을 해주길 바라는 거야? 설마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 유진 씨가 말로만 지껄이고 행동으로는 피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 건가? 이 해석이 맞는 거지? "

"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

" 뭐가 아니야. 애초에 해석이 그런 식으로밖에 안 나온다니까? 원하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기길 유진 씨가 원하고 있는 거지? 에이, 그러면 미리 말을 해주지! 미리 말해줬으면 아까 학교 정문 앞에서 그대로 날려버리는 건데! 뭐, 지금 해도 늦은 건 아니니까 바로 시작해버릴까? 전화 한 통으로 선유린부터.... "

극한으로 치닫는 갈등 속, 그녀가 선유린의 신변에 대해서 말끝을 흐리자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그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왜 그래야 하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에 불과했지만, 그의 앞에 있는 아줌마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걸 알고 있기에 그는 겁을 먹어버렸고 설상가상 머릿속에서 자기 때문에 아줌마가 전화를 걸고 난 뒤 잔혹한 일들을 당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려지자 그는 앞뒤 모든 것들을 전부 제쳐두고서 냅다 머리를 조아렸다.

그 후, 두 손을 벌벌 떨면서 재차 그녀에게 제발 멈추어달라고 공손한 부탁을 건넸다.

" 조, 조용히 할게요! 제가 조용히 하고 있을 테니까, 사장님이 절 끌어안고 다,다른 걸 해도 전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아내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말아주세요! "

" 뭐야? 정말로? "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묻는 그녀의 말에 그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 네.... 그럴테니까 제발 아내한테만큼은..... "

그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내는 안 된다. 나 때문에, 괜히 나 때문에 아내가 위험해지고, 곤란해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 호오...... "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

" ... "

차라리 내가 힘들어지고, 내가 참고, 더러운 꼴을 보는 게 백 배, 천 배 훨씬 나았다.

' 아직 관계를 나눈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끌어안는 거잖아? 거기서 진도를 더 나가봤자 얼마나 나가겠어? 무, 물론 아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랑 끌어안고 접촉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건 하면 안 되는 게 상식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최후의 서, 선은 넘지 않았잖아? '

그럼 된 게 아닌가? 나만 조용히 하고 참고 있으면 모든 게 잘 해결될 수 있었다. 나만 참으면 모든 게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아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고 속으로 혼자 삭히면, 마지막 선만 안 넘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의 저런 생각은 그저 궤변일 뿐이었다. 그저, 아직 몸을 뒤섞는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으니 그럼 된 것이다며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이상한 정당성을 부여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 된 거야. 이러면 된 거라고. 나만 조용히 하고 참고 있으면 모든 게 잘 해결될 수 있어. 마지막 선만 안 넘으면 되니까, 그, 그것만 아니면 그냥 넘어가자.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잖아? 아내한테 이야기 안 하고 나 혼자 속으로 삭히면 되잖아? 그래, 참으면 평화로워져. '

계속해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며 자기의 결정은 틀린 게 아니라 마땅하고 좋은 선택이었다며 위로하는 오유진을 뒤로하고, 그녀는 그의 결심이 담긴 대답을 들은 뒤 얼굴이 찢어질 듯이 큰 미소를 얼굴에 지어냈다.

" 유진 씨! 우리 앞으로 자주 보자. "

" .....네. 사장님. 자,자주...... 네..... "

그의 허리만을 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도, 몸부림도, 소리도 지르지 않으며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씹어가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가만히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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