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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48화 (48/77)

〈 48화 〉 폭발

* * *

다음날, 어느덧 해는 저물고 수업을 들으러 인산인해를 이루던 학교 정문은 시간이 흘러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복작복작 큰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 우리 오늘 술 한잔할래? 차 운전해서 저기 앞까지 나가면 되는데. "

" 어차피 술 마시면 운전 못할 텐데 굳이 차를 끌고 가야겠냐? 그냥 여기 앞에 포차 있으니까 간단하게 한 잔 마시자. "

어깨동무를 하면서 수업도 끝난 김에 각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가볍게 술을 한잔 걸치려는 사람들.

" 우리도 간단하게 한 잔 마시고 갈까? 아는 남자애들 부를 테니까 갈래? "

" 남자들 오는 건 마음에 드는데 솔직하게 간단하게 맥주 몇 병 홀짝홀짝 처마실 거면 뭐하러 술을 먹냐? 원래 술은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야 하는 법이라고! "

" 지랄하네! 그렇게 처마시다가 OT 때 온갖 개진상이란 진상은 다 피운 주제에 아직도 술 부심, 가오가 남아있는 거냐? 아 몰라. 괜히 오늘 과음했다가 내일 학교 와서 골골 대긴 싫어. 그리고 남자애들도 올 텐데 거기서 부어라 마셔라 하면 우릴 어떻게 보겠냐!? "

가볍게 한잔 걸치기는커녕,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위장 속에 술을 들이붓자고 울부짖는 사람들까지, 모두 지는 해를 맞이하면서 저마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며 신나게 이야기를 떠들면서 술집으로 즐겁게 걸어가는 길이었지만 오유진, 그는 자신의 가방끈을 놓칠새라 꼭 잡은 채 홀로 집을 향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눈밑의 진한 다크서클 그리고 처진 눈꼬리를 감추지 않은채 큰 하품을 내뱉는 그는 피곤에 쩔어있는 자신의 몸을 이끌고선 집에 돌아가서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의 갯수를 세어가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갔다.

" 일단,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

아내가 일이 바빠서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했고 당연히 저녁도 해결하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은 나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뭐, 항상 아내와 함께 즐기던 저녁 식사였지만 요새 아내가 일이 많아지고 또,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까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이제 익숙한 일이 돼버렸다.

' 돌아가는 길에 라면이나 즉석식품이라도 사서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 그게 좋을 것 같아. '

원래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요리를 하던 나였지만 몸이 너무나 피곤해서 이런 걸까? 이상하게 오늘만큼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주방에 서서 요리하기가 너무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상태라면 요리를 하다가 바닥으로 픽 쓰러지지 않을까?

'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

뭐, 하루 정도는 쉬어도 문제 될 게 없을 거야. 그래, 잠깐 나에게 주는 휴식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컵라면이나 3분 카레, 짜장 등을 사서 햇반에 부워 먹어 대충 끼니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고선 그다음으로 저녁을 먹고 난 뒤 해결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생각했다.

" 빨래는 아직 하기에는 조금 이르니까 뒤로 미뤄두고 청소기랑 물걸레질만 끝내놓고 조금 쉬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런데 과연 내가 쉬려고 마음먹고 침대에 누워도 제대로 잠에 빠져들 수 있을까? 아마, 누워서 눈을 붙이기만 해도 항상 빼먹지 않고 꾸게 되는 그 꿈이 다시 내 머릿속에 나타날 게 뻔한데?

아, 모르겠다. 충분한 숙면은커녕 쪽잠도 청하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도 며칠이 지나니까 사고 능력이 저하 돼서 오랫동안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이 굉장히 힘겨웠다.

' 그냥 다 모르겠어. 생각하려니까 괜히 머리만 아파와. '

그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려주면서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두통을 최대한 완화 시켜나갔다 .

" 머,먼저 갈게요. 조금만 비켜주세요.... "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하 호호 미소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중충한 기운과 함께 혼자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인파를 비집고 가는 그 순간, 마치 데자뷰같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저번과 똑같은 상황에 그가 걸음을 멈춰섰다.

검은 머리카락과, 염색을 해 휘황찬란한 사람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한쪽 도로변에 잠시 주차된 흰색 BMW의 차량과 저번과 똑같이 선글라스를 낀 채 차 보닛 위에 앉아서 담배를 피며 큰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뚱뚱한 여성의 모습.

" 어. 거기 일 처리하고 따로 사람 빼서 돌려버려. 야! 뭐, 그런 걸 생각하고 그래. 그냥 사람 몇 명 넣어놓고 짜내다 보면 알아서 결과 나오는데 괜히 이상한데 돈 쓰려 하지 마. 원래 이러려고 직원 뽑는 거 아니겠어? "

그녀의 모습을 확실하게 인지하자마자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고 저번처럼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것도 아니므로 압도적인 공포감과 두려움 대신 여러 가지 감정과 불안함, 그리고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몸 전체가 마치 북극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떨어진 사람처럼 심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끓어오르는 불안과 머릿속의 분열을 제어할 수 있었고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저번처럼 최대한 이성의 끈을 놓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기서 꽤 걸어가면 서문이 보인다. 원래는 빙 돌아가야 하고 그쪽으로 이동하면 집까지 도착하는데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소요가 되므로 이용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아줌마와 마주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 아, 일단 그건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자. 음, 그게 아니라 나 지금 좀 바쁘거든. 누구 만나야 하니까 나중에 내가 시간 나면 약속 카톡이나 전화로 다시 알려줄게. 씨발, 뭔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 그런 거 아니니까 마음 놔. 애초에 네가 상관 쓸 일도 아니잖아? 어, 잠깐만 끊어봐. 나중에 다시 말하자. "

마치 없는 사람처럼, 주인공의 뒤를 받쳐주는 흔한 엑스트라 A처럼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전화 삼매경에 빠진 그녀를 뒤로하고 심한 떨림을 보이는 두 다리를 억지로 이동하면서 정문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인파를 해치우며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여기서 제일 가까운 서문으로 이동하기 위해 천천히 그가 발걸음을 떼는 그때였다.

" 유진 씨. 어디 가는 거야? 여기야! 여기! "

등 뒤에서 들리는 지방이 가득 낀 목소리에 덜컥 들썩이는 어깨. 틀림없이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몸을 멈춰 세우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사람이 유진 씨인데 전부 다 정문으로 나오고 있는데 불구하고 혼자서 반대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더 눈에 확 띄네! 엄청 쉬운 틀린 그림 찾기 하는 것 같은 걸? "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만화 속에서 킬킬 웃음을 보이는 악당처럼 기분 나쁘게 웃어대며 자신을 조롱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저번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이 시각에 하교를 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고 저번에 있었던 일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인지 그때처럼 부정적인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지는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간간이 느껴지는 부정적인 사람들의 시선.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쳐다보듯이 신기한 눈을 뜬 채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눈앞이 살짝 핑 돌아가며 일렁거렸지만, 저번처럼 바보가 되지 않을까를 우려한 그는 핏물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어가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선 천천히 몸을 돌렸지만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도달한 그녀를 차마 똑바로 마주 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여 시선을 피한 그가 앙다문 입술을 천천히 열어가며 말을 건넸다.

"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

" 좋은 아침…….은 아니고 좋은 오후야. 유진 씨. 아무래도 시간이 늦었으니까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맞지 않는 것 같네. "

" 네.... "

"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유진 씨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도 아니고 다들 하교하고 있는데 혼자서 정문으로 들어간다니. 멀리서 봤을때 그림이 어찌나 이상하던지 원, "

" 아……. 그, 그냥 뭔가 놔두고 온 것 같아서 잠시 강의실로 돌아가려고... "

" 그래? 그러면 또 내가 대학교도 둘러볼 겸 강의실까지 유진 씨를 에스코트해 줘야겠네. 여자 된 입장에서 가만히 놔두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그럼, 같이 갈까? 유진 씨. "

아줌마를 피해 서문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들어가고 있었어요.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대충 그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으로 자신이 둘러댄 거짓말이 악수가 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속담처럼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한 그는 황급히 두 손을 들고선 휘휘 내저으며 곧바로 상황을 수습했다.

" 아,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봤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강의실도 저희 과 사람들밖에 안 쓰니까 잃어버릴 일도 없어서 다음 시간에 들러서 가,가져가면 될 것 같아요. "

" 그래? 아이고, 아쉽네. 에스코트 쫙 하면서 학교도 한 번 쭉 둘러보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기약해야겠네. "

" 아하하.... 아, 그나저나 사장님이 여긴 또 무슨 일로 방문하신 건지... 설마, 저번처럼 또 근처에 일 보러 나오셨다가 그냥 잠깐 들르신 건가요…? "

등에 매고 있는 가방끈을 꽉 잡은채 떨리는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아니야. 오늘은 저번처럼 유진 씨 얼굴만 보고 쫑내는 게 아니라 유진씨한테 내가 따로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

" 부,부탁이요? "

" 어어?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니까 딴맘 먹지 마! 부탁이라는 게 꼭 그런 야릇한 거나 이상한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난 정말 순수한 의도와 감정을 가지고 말한 건데 유진 씨가 그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한다면 나 진짜 섭섭해져! "

" 아, 죄송합니다. 그게……. 어, 그러니까.... "

" 하하!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우리 사이에 그런 가벼운 실수는 내가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어. "

슬그머니 그의 손이 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것처럼 애정이 가득 담긴 그녀의 손길에 저절로 몸이 큰 떨림을 보이고선 마음속으로 혐오감이 샘솟아 올랐지만 난 억지로 그 마음을 참아내고선 어색한 웃음을 지어주며 내 사과를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 가, 감사합니다. "

" 뭐, 별게 다 감사하네. 그런데,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설마, 내가 유진 씨에게 말할 부탁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이, 나같이 젠틀하고 멋지고 매너 넘치는 여자가 남자, 그것도 유진 씨한테 설마 돈다발을 가져오거나 빌딩을 가져오라는 그런 병신같은 부탁을 하겠어? 당연히 안 하지! 긴장 풀어! 긴장 풀라고! "

" 아...... 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러면, 저한테 말할 부탁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

" 그래, 그러면 괜히 이것저것 이상한 이야기는 다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우리 유진 씨의 시간을 개인적으로 잠시 빌리고 싶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 유진 씨가 나를 위해서 시간을 좀 내줬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 .......네? "

가드를 올리고 잽을 날리면서 신경전을 벌이던 도중 갑자기 상대가 허리와 몸을 숙이고 형상이 일렁일 정도로 빠르게 발을 박차고 가드를 뚫고 들어와 깔끔한 라이트 훅을 날리는 것처럼 갑자기 훅 들어온 그녀의 공격은 안 그래도 잘 돌아가지 않는 나의 사고능력을 순간 마비시켜버렸다.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그의 반응을 본 그녀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대면서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 우리 유진 씨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

" 아, 아니 개인적인 시간이라니..... 그건 무슨.... "

" 귀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 말 그대로 유진 씨의 개인적인 시간을 나를 위해서 조금 내어달라는 거지. 뭐, 사실 충분히 유진 씨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고 오해할 수도 있는 게 맞긴 한데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걸 부탁하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 놓아도 돼. "

" ..... "

" 나같이 젠틀하고 매너 넘치는 여자가 이상한 걸 요구하겠어? 어차피, 유진 씨도 이제 학교 수업 마치고 나오는 길이니까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저녁이라도 한 끼 하면서 서로 진중한 대화랑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이야기지. 다른 의미가 있고 이상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한 오해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 아.... "

" 그나저나, 유진 씨 생각은 어때? 뭐, 사실 내가 굳이 대답을 물어보지 않아도 어차피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또, 내가 부탁하는 건데 우리 유진 씨가 거절할 리도 없고 그러면 당연히 정답은 예스일 텐데 내가 괜히 유진 씨 입 아프게 물어보는 건가? "

당연히 정답이 예스일 거라고? 도대체 그런 생각과 그 근거는 무엇일까? 아내와 동석해 저녁을 먹는 것도 아니고 나와 아줌마랑 단둘이서 저녁을 먹으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자니. 애초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 골빈놈들이 아니고 생각이란 걸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 것을 아는데 나보고 그런 행동을 하라고?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집안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라도 저 제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거절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만이 머리에 감돌뿐. 그것이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냐고?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절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내 앞에 있는 이 아줌마는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

만약 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매몰차게 그 부탁을 거절해버린다면 기분이 나빠질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아내는 물론이고 나와 우리 집안 전체가 큰 화를 면치 못할 게 뻔했다. 여태껏 그래왔고 이 아줌마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 유진 씨. 무슨 생각 하고 있길래 이렇게 대답이 느린 거야? 이게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문제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

그렇다면 최대한 기분이 나쁘지 않게 살살 돌려서 예의와 품위를 갖춘 채 거절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 여태껏 그렇게 행동해서 아줌마가 넘어가 준 적도 굉장히 많았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물러나 주지 않을까?

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아니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잖아. 아닌가? 시, 시도라도 한 번 해봐야 하나? 아니지.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냥 언제나 그랬듯이 나만 참으면 전부 다 해결되는 일이잖아..... 나만 조금 참으면 전부 다 좋게 해결되는....

" 유진 씨? 내 말 안 들려? 어른이 이 정도로 계속 물었으면 적어도 대답은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

그 순간, 솔로몬이 필요할 정도로 머릿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것을 한순간에 없애버리는 그녀의 손길.

두툼하고 투박한 그녀의 한쪽 손길은 그의 팔을 감싸면서 동시에 그의 배를 쓸어올림과 동시에 일부러 가슴 끝자락을 툭툭 건드리는 그녀의 손길에 그는 자신이 고민을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저번처럼 그녀는 선을 넘어 드는 과도한 터치를 보였지만 그는 저번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공포감에 질려 정신의 끈을 놓아버리고서 온전히 그 접촉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몸을 뒤척임과 동시에 몸을 뒤로 빼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났고 입가 주위에 미약한 떨림을 보이면서 곧바로 자신의 고민을 빠르게 정리해냈다.

' 안돼. 거, 거절해야 할 것 같아. '

늦은 시각이라지만 아직도 하교하는 사람이 많은 학교 정문에서도 이러고 저번에도 그랬는데 단둘이 식사를 가지는 자리라면 이 아줌마가 나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았다. 아마, 내 신변이 엄청나게 위험해지지 않을까?

더 이상 가만히 손가락을 빨며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입술을 세게 이빨로 짓누르고서는 잠시 쿵쾅쿵쾅 울림을 보이는 심장을 진정시켰고 그와 동시에 거짓을 살짝 섞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조심스레 운을 떼며 그녀가 말한 부탁에 단호한 거절 대신 부탁을 들어주기가 어렵다며 난색을 표현했다.

" 사, 사장님. 죄송합니다. 아, 아무래도 저녁은 오늘 아내가 일찍 돌아오니까 아내랑 먹어야 할 것 같아요. "

단순하게 거절을 표시한다면 순순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아내를 핑곗거리에 넣어서 최대한 변명을 구사해나갔다. 아무리 아줌마라고 하더라도 아내에게는 한 번씩 져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까 분명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 ......음? "

" 아, 아무래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위해 저녁밥도 안 차리고 밖에 나가서 자기 혼자 외, 외식을 하는 건 조금 그, 그렇잖아요? 또 아내는 바, 밥을 잘 못 해서 제가 옆에서 마, 만들어줘야... "

" .....유진씨. "

" ㄴ, 네? 부르셨어요? 사장님? "

갑자기 아까와는 다르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부름에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범인을 발견한 탐정처럼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며 입가에 소름이 돋는 호선을 그리는 그녀.

" 유린 씨랑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흠, 이상하네? 오늘 내가 직접 유린 씨한테 최소 새벽 두 세시 정도에 끝나는 일들을 맡기고 수고해달라고 격려까지 해주고 왔는데 말이야. "

담담한 그녀의 말에 입밖으로 거짓을 섞은 변명을 내뱉던 그의 몸이 멈춰졌다.

" 유린씨랑 저녁을 같이 먹는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선유린은 진짜 선유린이 아닌가? "

" .... "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니지. 그녀는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가 아니라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일부러 거짓을 말한 나를 놀림과 동시에 경고를 함께 주려고 저런 반응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 그럼, 도대체 유진 씨는 누구랑 집에서 저녁을 먹는 거지? 선유린 도플갱어라도 존재하는 걸까? 어, 이러면 큰일인데!? 우리 잘생긴 유진 씨가 선유린 도플갱어에 당해버린다면 나 진짜 엄청 슬플 것 같거든. "

" ㄴ, 네? "

" 그나저나, 요즘은 저녁을 새벽 두 시나 세 시에 먹는 게 유행인가 봐? 이야, 그건 나도 몰랐네. 그러면 그건 저녁도 아니고 야식도 아니니까 두 개의 단어를 합쳐서 저야식이라고 불러야겠네? 하이고, 내가 확실히 나이를 먹다 보니까 트렌드에 확실히 뒤처진 것 같단 말이지. 이거, 유진 씨한테 내가 색다른 걸 배워가는걸? "

저번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는 이미 정신의 끈을 놓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못한 채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외부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오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두툼한 살집의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걸어가 그의 얼굴을 마주 본 채 마치 커플들끼리 빼빼로를 같이 먹는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안 그래? 유진 씨?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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