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폭발
* * *
깜깜한 어둠 속 모두가 당연하게 꿈나라에 곤히 빠져있을 시간인 새벽 3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덮고 있던 이불을 전부 뒤엎은 채 배를 긁적긁적 긁으면서 시끄러운 코까지 골아가며 깊은 꿀잠에 빠져있는 그녀와는 다르게 오늘도 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에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깊은 숙면에 빠져있는 아내와는 상반되게 그는 허리를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의 입술을 이빨로 거세게 물어뜯어 내고 있었는데 그러자, 입술 사이로 핏물이 송골송골 맺혀졌지만 그런 단순한 아픔 따위가 그의 정신적인 아픔을 덮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그는 여전히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하아. "
가뭄에 의해 쩍쩍 균열이 생겨난 땅덩어리처럼 갈라져 있는 그의 목소리.
" 흐윽. "
역시, 오늘도였다. 하얀 백색의 공간으로 시작의 포문을 여는 그 꿈. 떠올리기 싫은 그때의 기억이 영화처럼 지나가는 그 꿈. 원하지 않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그 꿈은 나의 머릿속을 방문했다.
하얀 백색의 공간 속 우두커니 앉은 채로 무릎을 손으로 감싼 채 정신을 놓고선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나.
흉흉한 기운을 뽐내던 아줌마의 손길,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내 모습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야릇한 눈길을 빛내는 아줌마, 그리고 아줌마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결국 그녀의 몸에 손을 뻗는 나의 모습.
모든 행위가 끝나고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더불어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러냐며 묻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질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 내 마지막 모습.
본래라면, 여기서 끝나야 할 꿈이었지만, 이 망할 놈의 꿈은 마치 컴퓨터나 핸드폰처럼 자동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것인지, 이제는 어제 학교 앞에서 일어난 일까지 나에게 모조리 비춰줘 버렸다.
본래의 그 꿈만으로도 괴로웠고, 나의 미소를 앗아가는데 충분했고 또한 내 생기를 빼앗아 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는데 이젠 거기에 어제 일까지 추가가 되어버리니 슬슬 내 정신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줌마를 보고 정신을 놓아 버리고서는 그녀의 손길에 저항하기는 커녕 모조리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오히려 더욱 들이대는 나의 모습.
그러한 상황을 목격하고 저마다 추측을 내놓으며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
내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게 빠른 임기응변으로 일이 커지지 않게 상황을 수습하고 난 뒤 소리를 지르면서 시원한 욕설과 함께 나를 아줌마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를 두둔하고 지켜주려던 경섭 씨의 모습.
그러나, 나를 지켜주려고 하던 경섭 씨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손길을 놓아버리고 반대로 그녀의 편에 서는 나의 모습과 충격을 받은 표정과 함께 입술을 물어뜯으며 주먹을 꽉 쥐며 나와 더불어 아줌마를 노려보는 경섭 씨의 살벌한 눈빛까지.
" ..... "
도와주려는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기는커녕 아예 짓밟아 버린 나의 행동을 다시 떠올리자 경섭 씨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저절로 생겨났는데,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경섭 씨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과는 상반되는 감정인 안도감도 함께 감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아줌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혹여라도 아내에게 갈 수 있는 피해를 막아내며 집안의 평화를 지켰다는 그 안도감과 다행스러운 감정.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진 물과 불처럼 아예 상반되는 감정인 죄책감과 안도감이 마음속에서 함께 생겨나는 역겨운 이중성에 혐오감을 느낀 그는 자신의 입술을 더욱더 세게 깨물고서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조리 뽑아버릴 듯이 세차게 쥐어뜯기 시작했다.
대머리라도 될 심상인 건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계속 뽑아내던 그때, 갑자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감에 두 손으로 세차게 입을 틀어막고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굽힌 뒤 구토를 하지 않게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였다.
그와 동시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올라오려는 구역감을 겨우 참아내고 입을 막고 있던 두 손을 떼어낸 그는 침대에 누워 누가 납치해가도 모를 정도로 편히 잠에 들어 있는 아내와는 다르게 저번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초점이 없는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힘없이 가슴을 들썩거릴 뿐이었다.
* * *
" 영차. "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 준비에 모든 정신을 쏟아부은 그는 마지막으로 완성된 요리인 미역국을 옮기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손에 벙어리 장갑을 낀 채 뚝배기를 힘겹게 들어 올린 뒤 혹여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국물이 가득 담겨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는 뚝배기를 식탁에 얹은 뒤 잠시 숨을 돌린 그는 장갑을 벗고 손등으로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닦아내며 그가 안방 문 앞을 서성거리면서 소리치던 찰나.
" 여, 여보. 아침 드세……. "
쾅ㅡ
" 힉!? "
무언가 부서질 듯한 굉음과 함께 문이 세차게 열렸고, 그 소리와 박력에 당연히 나는 화들짝 놀라며 주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열린 안방 문으로 서서히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 씨, 씻고 머리 말리고 계셨어요? "
영락없이 여태껏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워야겠다고 생각해 큰 목소리로 소리치려고 한 건데 벌써 일어나 샤워까지 전부 끝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니.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아이 씨발 진짜... "
그녀의 입 밖으로 슬그머니 새어 나오는 욕설에 그는 저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눈을 내리깔자마자 터벅터벅 걸어와 방 밖으로 나온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마치 담배를 피우듯이 입 밖으로 바람 소리를 내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그를 향해 욕을 내뱉었다.
" 아, 씨발! 존나 재촉하네. 야, 머리 말리고 있는데 뭘 그렇게 소리치고 지랄인 거야? 그냥 얌전히 입 다물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나올 텐데 뭔 지랄을 그렇게 떠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네. "
그녀의 욕설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고, 그러자 그녀는 혀를 한 번 차더니 아침부터 화를 크게 내기는 싫은 것인지 손에 들고 있던 젖은 수건을 대충 바닥에 집어 던지고서는 터덜터덜 걸어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뭐야? 미역국이야? "
뚝배기 안에 가득 담겨있는 김이 펄펄 나는 미역국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숟가락을 들어 올린 그녀는 러닝셔츠를 입어 여과 없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복부를 손가락으로 벅벅 긁어 올리면서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 네. "
" 안에 당연히 소고기 넣었지? "
" 당연히 넣었죠. 여보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넣었으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아, 그리고 혹시라도 모자라면 무조건 얘기해 주세요. 만드는 김에 한꺼번에 크게 만들어서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얼마든지 더 드셔도 괜찮으니까요. "
" 좋아. 마음에 들어. 뭐, 내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간은 알아서 맞췄을 테니까 자, 그러면 어디 한 번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밥 위에 사르르 적신 다음 크게 한 숟갈을 퍼 입안으로 직행한 그녀는 마치 산적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우적우적 씹어대더니 곧이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족의 표시를 나타내주었다.
만족스럽다는 그녀의 평가에 그도 살짝 마음을 놓고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산적처럼 푹푹 밥을 크게 떠서 먹는 그녀와는 다르게 마치 아이처럼 깨작깨작 밥과 반찬을 떠서 먹는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야, 밥 좀 푹푹 퍼서 먹어. 씨발, 무슨 벌레 새끼도 아니고 밥알을 세면서 처먹는거야? "
" 아.... "
" 그냥 숟가락으로 밥 떠서 한입에 삼키고 국물 한 번 쫙 들이키란 말이야.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하나하나 입에 넣어서 언제 다 처먹을려고? 앞에서 보는 사람 답답해서 뒤져버릴 것 같은 거 알고는 있냐? "
" 죄,죄송해요. 여보. "
그녀의 충고를 들은 그는 혹여나 다시 꾸중을 들을까봐 아까와는 다르게 밥을 크게 한숟갈 퍼서 입안에 집어넣고 고개를 숙이고선 바쁘게 이빨을 움직여 음식물을 씹어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대로 행동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서는 고개를 갸웃 움직이던 그녀는 잠시동안 그를 노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잠시 식탁에 내려놓고서는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숙이고 있던 그의 얼굴을 잡아 위로 올려버렸다.
" 야, 그런데 너 얼굴 꼬라지가 왜 이래? "
" ㄴ,네? "
" 얼굴 꼬라지가 왜 이러냐고. 너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안 봐? 지금 씨발 눈밑의 다크서클이 장난아니게 밑으로 내려와 있는데 길가다가 모르는 사람한테 처맞기라도 한 거야? 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팬더라고 오해하겠는데? "
그의 턱을 한 손으로 잡은 뒤 안색을 이리저리 살핀 그녀는 마치 범인을 추궁하는 형사처럼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닥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밑으로 축 처져 있는 다크서클과 뽀얗고 부드럽고 마치 아기 피부를 만지던 것처럼 탱글탱글했던 예전 촉감과는 다른 피부의 질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당장이라도 잠자리에 들 것같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까지.
모든 확인이 끝난 그녀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곧바로 팔짱을 꼈고 그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서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 야. 유진아. "
" 네? "
" 너 밤에 도대체 혼자서 뭘 하길래 씨발, 얼굴이 그렇게 씹창이 난 거야? 나 몰래 꼭두새벽에 어디 처 나가서 놀기라도 하냐? "
" 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나간다고 하면 소리가 나서 여보한테 무조건 걸릴 게 뻔하고, 애초부터 제가 그런 짓을 할리가 없잖아요. "
" 그럼 뭔데? 이유를 말하라니까?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고 있잖아? 그럼, 괜히 시간 이리저리 끌 생각 하지 말고 재깍재깍 그 이유를 말하란 말이야. "
" 아, 그게 그러니까.... 그, 그냥 고, 공부하는 거예요. 마, 맞아요. 공부하는 거예요. "
차마,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던 그는 최대한 그럴싸한 이유를 빠르게 도출해내고서는 뼈대와 살을 붙여 그럴싸한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리 뼈대와 살을 붙여 그럴싸한 거짓말을 내뱉었다고 해도 아내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그는 혹여나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키면 어떡하지라는 일말의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서는 식탁 밑에 있는 두 손을 벌벌 떨면서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 공부? "
" 네. 고, 공부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은데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남는 시간이 새벽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짬 내서 조금씩 하고 있는데……. "
" 흠..... 그래? "
최대한 뼈대와 살을 붙이며 얼버무린 어설픈 나의 거짓말이었지만 아내는 별로 크게 상관을 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납득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말에 아내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뭐, 사고 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한다는 건데 그런 거면 상관없지. 그런데 씨발, 다크 서클 때문에 네 얼굴을 마주 보기 살벌해지니까 공부도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시간 조절하면서 해. 일상생활이랑 나한테 피해 안 주는 선에서 끊고. 그건 알고 있지? "
" 아, 네. 며, 명심할게요. "
" 그럼 이 이야기는 네가 알아서 잘 조절한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이런저런 이야기는 안 할 테니 여기서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이 씨발, 내가 원래 이걸 너한테 먼저 보여주려고 했는데 괜히 네 얼굴을 먼저 봐버려서 씨발 순위가 뒤로 밀려버렸네. "
그러더니, 갑자기 의자 뒤쪽으로 손을 옮긴 뒤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든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마치 자랑을 하는 것처럼 흰 봉투를 들고 있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유진아. 너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이게 뭔지 알아? "
" 희, 흰봉투 아니에요? "
흔히들 명절날 친척 집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흰 봉투가 아닌가? 하지만, 나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는지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 흰 봉투라는 건 병신 새끼가 아닌 이상 전부다 알아보는 거야. 자,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봐 봐. 네가 알던 흰 봉투랑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흰 봉투랑 차이점이 보이지 않아? 솔직히 이건 눈깔이 맛탱이가 가지 않은 이상 바로 보일 텐데? "
" 아……. 그, 조금 두툼한 것 같아요. "
차이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보이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두께라고 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흰 봉투는 아무리 잘 쳐줘 봐야 아주 약간의 두께가 있을 뿐인데 지금 아내의 손에 들려있는 흰 봉투는 바위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큰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인제야 만족한 것인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
" 그렇지. 명절날 코 묻은 애새끼들이 받는 세뱃돈 흰 봉투랑은 두께 자체가 차원이 다르지? 너, 여기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해보면 진짜 자지가 발딱 설 정도로 존나 놀랄걸? "
손에 들고 있던 흰 봉투를 식탁 위로 던지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무게감이 피부로도 느껴졌고 그 후, 그녀는 턱짓으로 두툼한 흰 봉투와 그를 번갈아 가면서 가리키며 넌지시 말했다.
" 네가 직접 까서 한 번 확인해 봐. "
그녀의 신호와 함께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흰 봉투를 집어 든 그가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궁금증을 뒤로하고선 손가락으로 천천히 입구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러자, 씩 호선을 그리는 그녀의 미소를 배경 삼아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앙다물고 있던 입을 떡하니 벌리고선 흰 봉투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 이, 이게...... "
" 놀랐지? 씨발, 존나 놀랐지? "
흰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다름 아닌 돈다발. 하지만, 만 원짜리 다발이나 오만 원짜리 다발이 아닌 흰 봉투 안에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수표 다발이 꽉꽉 채워져 들어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봉투와 아내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아내는 내 손에 들려있던 수표 다발이 든 봉투를 낚아채 가고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 반응 존나 귀엽네. 하긴, 나도 처음에 받고선 진짜 보지 떨릴 정도로 존나 깜짝 놀라긴 했지. 야. 내가 이걸 누구한테 무슨 이유로 받은 것 같아? "
" 어..... 여보가 일을 잘하시니까 서, 성과금 같은 걸 받으신 건가요? 아니면 보너스라던가.... "
그러나 나의 예상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내.
" 성과금? 보너스? 뭐,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해석이 될 수도 있겠네. 그런데 조금 자세히 파고 들어가자면 성과금이나 보너스는 아니고 그냥 개인적으로 받은 용돈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보면 되는데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이걸 누구한테 받았는지 알아? "
" 누구한테 받으셨는데요? "
" 뚱땡이! "
" 아.... "
뚱땡이라는 말은 굉장히 넓은 의미를 가진 포괄적인 단어였지만 아내가 지칭하는 뚱땡이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즉, 고유명사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아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내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치, 핵폭탄을 발사하는 빨간 버튼을 누른 것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흰 봉투 안에 든 수표 다발을 봤을 때처럼 사고회로와 몸의 움직임도 정지되고 표정 또한 급격하게 굳어졌는데 굳어진 나의 표정을 보지 못한 걸까? 아내는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분위기가 다운되어있는 나를 앞에 두고서는 천천히 자신이 이런 돈을 받게 된 배경과 이유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 아니, 어젯밤에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그 뚱땡이년이 갑자기 나한테 다가오더니 이걸 던져주더라고? "
" 아……. 그, 그래요? "
" 그래. 그래서 나도 깜짝 놀라서 갑자기 이게 갑자기 무슨 돈이냐, 이걸 왜 주냐고 물었는데 그년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
" 뭐……. 라고 했는데요? "
" 존나 사람 궁금증 자극하게 처음에는 그냥 내 얼굴 보면서 자기 혼자 실실 쪼개더니 나보고 가지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년이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고 뒷말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다시 돌려주려고 했단 말이야. "
" .... "
" 그런데, 그 뚱땡이가 내가 계속 돌려준다고 하니까 결국에는 이유를 말해줬는데 자세하게는 말을 안 하더라고? 그런데 그년이 대충 말한 게 뭐냐면 오늘 자기가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는 거야. "
그러자, 잠시 움찔거리는 그의 어깨.
' 분명 그거야.... '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면 어제 학교 앞에서 있었던 그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넌지시 아내에게 그러한 사실을 떠보듯이 말했다니. 다시 한번 이빨에 짓눌려지는 빨간 앵두 같은 입술.
자기를 도와주려던 경섭 씨의 호의를 짓밟아버리고 오히려 그녀의 편에 서서 그녀를 두둔하던 자신의 행동이 다시 떠올려지자 그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들고 있던 고개를 아래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선유린.
" 그래서, 뭐 갑자기 나한테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다는 거야. 그러고선 나한테 흰 봉투를 다시 쥐여주더니 특별 보너스 같은 거니까 그냥 어른이 줄 때 곱게 받아 처넣으라고 하니까 나도 그 이상 거부할 수는 없겠더라고. 그래서, 가져온 거야. 내가 집에 돌아오면서 세어봤는데 대충 눈대중으로 흘겨봐도 몇백은 가뿐하게 넘기고 몇천 정도는 돼 보이는 것 같던데. 씨발 솔직하게 땡잡은 거지. "
" .... "
" 아, 씨발. 나야 뭐, 그 뚱땡이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솔직히 거부할 수는 없잖아? 애초에 씨발, 안 좋은 걸 떠넘기는 것도 아니고 돈다발을 가지라고 하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아 개 같은 년. 확실히 졸부 년이라 그런지 자기 기분 좋으면 돈 뿌리게 확실히 일반적인 부자들이랑 틀리다니까. "
뚱뚱한 그녀를 비웃음을 보인 그녀는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수표 다발을 꺼내서 냄새를 한번 맡더니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처럼 눈을 까뒤집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웃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와는 다르게 그는 눈앞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수표 다발을 눈앞에서 목격해도 함박웃음이나 즐거워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온몸에 감도는 수치심과 자괴감 때문에 두 손으로 자신의 바지 밑단을 쥐어 뜯어내고 있었다.
" .... "
수치스러웠다. 치욕스럽고 창피하고 마치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자괴감이 온몸에 들이닥쳤다. 만약 아내가 없고 지금 집 안에 나 혼자 남아있었더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았을까?
수표 다발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행복도, 즐거움도 아닌 수치심과 자괴감뿐이었다. 저건 아줌마가 아내에게 준 선물이 아니었다. 성과금도 아니었고 기분이 좋아서 챙겨준 특별 보너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저건 대가였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대가. 마치, 열심히 봉사를 하고 거사를 치르고 나온 창남의 손에 안겨주는 돈처럼 그녀는 대가를 내가 아닌 아내의 손에 줬을 뿐이었다.
" 조, 좋겠네요. 여보. "
" 당연하지. 씨발, 갑자기 수중에 큰돈이 들어왔는데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일단, 나중에 짬 날 때 액수 한 번 세어보고 천천히 처리하든가 해야지. 너도 얌전히 잘 행동하면 내가 알아서 콩고물 떼어줄 테니까 귀찮게 달라붙어서 괜히 내 심기 건드릴 생각 하진 마. 알고 있지? "
" 네..... 명심할게요. 여보. "
그는 억지로 웃어주었다. 마치, 정신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처참히 망가지고 파괴된 사나이이자 최악의 악인, 조커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