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폭발
* * *
깜깜한 어둠 속 모두가 당연하게 꿈나라에 곤히 빠져있을 시간인 새벽 3시.
검은 속옷만을 입고 있어서 사실상 반나체 상태나 다름없는 유린은 더운 것인지 덮고 있던 이불까지 전부 뒤엎은 채 배를 긁적긁적 긁고 시끄러운 코까지 골아가며 깊은 꿀잠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누가 업어서 납치를 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녀와는 다르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입 밖으로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자꾸만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 흐윽, 흡. 으읏. "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점점 호흡이 더욱 가팔라지던 그는 결국 정신력의 한계에 다 달랐던 것인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꺄악! 흐윽, 흑. 하악, 흐윽. 끄읍. "
요란법석 난리를 떨며 상의를 일으킨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최대한 자신의 몸에 두른 채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또르르 뱉어냈다.
곧이어 송곳으로 심장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 가슴 한쪽에 울려 퍼지자 그는 혹여나 이불이 흘러내릴까 봐 한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남은 한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가슴을 팡팡 두드리면서 거친 숨을 고른 후 상의를 최대한 풀어 헤쳐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을 억지로 이겨낸 그는 잠시 마른 침을 목 뒤로 넘기고서는 놓고 있던 정신줄을 챙긴 후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 새벽 세 시. "
이빨로 입술을 질끈 씹은 그는 피곤함에 잔뜩 절어있는 눈동자를 뒤로하고선 시계에서 곤히 잠에 들어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내가 여태까지 지랄을 하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 점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소식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난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쉰 채 꼭 잡고 있던 이불을 놓고선 침대에서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아내가 깰까 봐 조심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천천히 안방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고 시원한 생수가 들어 있는 냉장고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달칵ㅡ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그는 헛웃음과 함께 자신을 자책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 너 왜 그러는 거야. 유진아 너 진짜 왜 그러는 거냐고. "
떠올리기 싫은 그때의 그 기억.
" 또 그 꿈이야. "
그 꿈은 항상 하얀 백색의 공간으로 시작의 포문을 연다.
그리고 난 그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며 무릎을 손으로 감싼 채 정신을 놓고선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다.
마치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죽은 눈동자를 띈 채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시간을 몇 분 동안 보내다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의 그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흐르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 나에게 있어서 지옥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흉흉한 기운을 뽐내던 아줌마의 손길,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내 모습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야릇한 눈길을 빛내는 아줌마, 그리고 아줌마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결국 그녀의 몸에 손을 뻗는 나의 모습.
모든 행위가 끝나고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더불어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러냐며 묻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질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 내 마지막 모습까지.
그리고 항상 끝나버리는 꿈.
벌써 그 아줌마가 우리 집을 방문한 지도 삼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 아줌마가 우리 집을 떠난 그 순간부터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잠을 잘 때마다 이 꿈을 반복하면서 꾸고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수치심은 굉장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죄책감과 더불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야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간단한 스킨십 좀 했다고 오버를 떤다고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때 있었던 일은 그저 간단한 스킨십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때의 일은 아내가 나에게 보내는 믿음을 깨뜨리는 행위였고, 나 스스로 다짐한 신념을 무너뜨리는 행위였으니까.
삼일동안 쉬지 않고 그때의 그 기억이 계속 내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덕분에 이미 속마음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으며 언제나 짓고 있던 미소는 점점 자취를 감춰갔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것 또한 힘들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울분은 나의 생기를 계속해서 앗아갔다.
" .... "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은 유진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큰 소리를 냈지만, 그는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내기보다는 그저 한 손으로 입을 꼭 막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한 손으로 냉장고 문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혹여나 자고 있는 아내에게 방해가 갈까 봐 숨을 죽이고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갑작스럽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달빛에 비춰져 한 줄기 빛을 반짝였고, 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갔다.
* * *
굳은 표정으로 숟가락을 움직이는 그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는 두손을 꼭 모은 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서는 그저 아무말 없이 그녀가 숟가락을 움직이며 여러가지 음식을 맛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뚝배기에 담겨 아직도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된장찌개를 한 번 맛보더니 잠깐 입맛을 다셨고 곧이어 눈동자를 번뜩 빛내며 그녀가 냉정하게 음식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 음, 맛있어. 야, 잘 만들었는데? 간도 딱 알맞게 맞췄고 재료도 여러 가지가 들어가니까 확실히 국물맛이 예전이랑 다르네. 틀려. "
아직도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를 숟가락으로 몇 번 두드린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그를 향해 흔들어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편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서는 안도감의 한숨을 내쉬었다.
" 칭찬해줘서 고마워요. 여보. "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배경 삼아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준 아내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 그대로 밥을 허겁지겁 흡입하고 있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주부들이 공감하는 사실일 텐데 본인이 만든 아침밥이나 음식을 사랑하는 배우자 혹은 소중한 사람이 먹고선 맛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은 요리를 하는 입장으로서는 정말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 그나저나, 여보. 천천히 드세요. 아무도 안 뺏어가는데... "
어린애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들이붓다 보니까 입가에 온갖 양념이 묻었고 그는 황급히 휴지를 뽑아 그녀의 입가에 묻어있는 새빨간 양념들과 여러 음식을 살살 닦아 내주었다.
" 씨발, 시끄러워. 하늘 같은 아내가 음식을 먹고 있는 걸 가지고 옆에서 뭐라고 하고 지랄이야. 뒤지고 싶어? "
하지만, 그녀가 거대한 손을 들어 올리며 뺨을 내리칠듯한 시늉을 보이자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던 그가 겁에 질려 움찔 떨림을 보이면서 그녀의 곁에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 그, 그게 아니라 제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급하게 드시다가 갑자기 체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
" 씨발, 살다 살다 그런 개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네. 음식 빨리 처먹다가 체한 헌터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내가 전 재산이 얼마 안 되긴 하는데 그거라도 싹싹 긁어모아서 다 줄 테니까. "
그의 걱정스러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그녀는 도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이리저리 긁어가며 입안으로 모조리 털어 넣은 다음 잠깐 시원한 트림을 한 번 내보내더니 무언가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기 시작했다.
" 아이씨, 안 되겠다. 밥 한 공기 더 줘. 괜히 애매하게 배 채우고 일 나가는 것보다 든든하게 배 채우고 지각해서 욕 좀 얻어먹는 게 차라리 낫지. 양은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으니까 이 그릇에 최대한 담을 수 있을 만큼 담아서 다시 가져와. "
" 네, 알겠어요. 여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치 새 그릇처럼 텅텅 비어있는 밥그릇을 받아들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밥솥 뚜껑을 열고 마치 조선 시대 머슴들이 먹는 밥처럼 흰 쌀밥을 그릇에 주걱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 아 참, 여보. 어젯밤에 만들고 남은 제육볶음 용기에 보관해서 냉장고에 넣어놓았는데 혹시, 꺼내는 걸 까먹으셨다면 제가 지금 꺼내드릴까요? "
" 제육볶음? "
" 네. 조금만 그릇에 덜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금방 완성되니까 오래 기다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원하시면 곧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어떻게 할까요? "
" 아, 그거 하지 마. 씨발 제육볶음이 있는 걸 까먹은 것도 아니고 꺼내기 귀찮아서 안 먹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일부러 전자레인지에 안 데운 거야. 꺼낼 필요 없어. "
" 네? 정말이에요? 왜.... "
" 지금 식탁에 놓여있는 반찬으로도 충분하고 애초에 된장찌개 안에 차돌박이도 가득 들어 있어서 고기가 별로 안 당겨. 그러니까, 괜히 이것저것 꺼낼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빨리 가져오기나 해. "
" 알겠어요. 여보. "
제육볶음을 꺼내기 위해 잡은 냉장고의 손잡이에서 곧바로 손을 뗀 다음 혹여나 쏟아버릴까 한 손으로 조심히 옮기던 밥그릇을 다른 한 손으로 받친 다음 빠르게 달려가 아내의 앞으로 밥그릇을 놓아주었다.
주걱으로 꾹꾹 눌러 담아 밥알 사이사이에 빈틈은 없었으며 가히 백두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게 솟아있는 쌀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아마, 전국에서 난다긴다하는 먹방러들도 밥 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하얀 쌀밥의 봉우리를 보면 기겁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이었고 당연히 아내는 먹는 것, 신체 능력을 포함한 여러 부분이 일반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하얀 쌀밥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보고선 만족스럽다는 듯 약한 박수를 내게 쳐주었다.
다시 한번 숟가락을 들고 전투적으로 밥을 꿀떡꿀떡 삼키는 아내를 보며 난 목이 먹히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컵에 생수를 따라 그녀에게 밀어주었고, 핸드폰을 켠 다음 등교를 언제 할 지 한 번 점검하고선 나지막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 여보, 오늘 저녁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요? "
" 저녁? "
" 네. 기왕 만드는 거라면 여보가 좋아하는 걸 저녁으로 만들고 싶은데 혹시나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말만 해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전부 다 만들어드릴게요. "
" 아, 존나 날 생각해주는 말이라서 고맙긴 한데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도 너 혼자 알아서 처먹어야 할 것 같은데? "
" 네? 왜.... "
" 저번이랑 똑같이 나한테 중요한 일이 내려져서 오늘도 집에 늦게 귀가할 것 같아. 당연히 집에 늦게 오는 거니 아마 저녁도 밖에서 먹을 게 뻔하고. "
" 아…….오늘도 저 혼자 먹어야 한다고요? 힝……. 여보랑 같이 저녁 먹고 싶었는데...... "
" 야, 나도 집에 일찍 가고 싶어. 누군 씨발, 좋아서 남아서 일하는 줄 알아? 일이 바쁘고 많은 걸 뭐 어떡하겠어?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야 하는 일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 그, 그건 그런데.... "
" 탓하려면 날 탓하지 말고 그 봊같고 병신 같은 뚱땡보 새끼를 탓해야 하는 거 알지? 아 그 씨발 새끼가, 내가 똥구멍을 여태껏 그렇게 열심히 빨아주고 집에 초대까지 해준 다음 극진히 대접을 해줬는데 겨우 이 정도로 밖에 은혜를 안 갚아준다니. 양심을 씨발, 길에 가다가 시장 바닥에 버려두고 온 건가? "
" 아.... "
짜증이 난다면서 욕설을 내뱉으며 누군가를 언급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녀의 행동에 그가 잠깐의 탄식을 내뱉고서는 입술을 이빨로 세게 짓눌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채 아까까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순식간에 달라져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고 식탁 밑에서는 마치 눈앞에서 살인마를 만난 것처럼 두 다리와 양손에 미약한 떨림까지 보이고 있었다.
가슴 부근에서 다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한 손으로 다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뒤 그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그녀가 점점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쿵쾅ㅡ 쿵쾅ㅡ 쿵쾅ㅡ
" 뭐야? "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와 마치 먼 거리를 전속력으로 주파한 사람처럼 점점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는 그의 모습에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던 그녀가 잠시 행동을 멈춘 채 열심히 음식을 씹어대며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갑자기 왜 지랄이야? "
손을 뻗어 그의 뺨을 툭툭 내리치며 그녀의 행동에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그가 고개를 들고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 아, 아무일도 아니에요. "
그의 얼굴에 걸려있는 어색한 웃음,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그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느끼며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식탁 밑에서 덜덜 떨림을 보이는 백옥같이 하얀 그의 손. 그는 어떤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 * *
지루하고 어려웠던 모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아낸 뒤 주섬주섬 짐을 챙겨 가방을 정리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준비를 전부 다 마치고서 교수님의 출석에 응한 뒤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 내 등을 두드리는 낯선 손길에 발걸음이 멈추었으며 고개 또한 뒤로 돌려졌다.
" 형! 바로 집에 가는 거예요? "
반갑다며 손을 흔들어주며 나에게 다가오는 경섭 씨에게 나 또한 손을 흔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네. 이제 집에 가려고요. 유부남이 어디 갈 데가 있을 리 없잖아요? 애초에 그런 곳이 있어도 가면 안되는 게 상식이기도 하고요. "
" 헤헤. 그러네요. 그럼 어차피,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똑같으니까 저랑 같이 가요! "
나에게 안기며 팔을 감싸는 그의 행동에 나는 머리에 손을 올려 그를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 운전 기사분이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
" 오시는 길이라는데 계속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제가 조금 걸어가서 일찍 타는 게 더 마음 편하잖아요? 자, 얼른 가요! "
그의 애교 섞인 말과 팔을 잡아끄는 이끌림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주고 난 뒤 가방을 황급히 챙긴 뒤 함께 강의실을 나선 뒤 건물을 나와 정문을 향해 사이좋게 걸어갔다.
" 아, 날씨도 좋고 짜증 나는 일도 없어서 요즘 진짜 행복하긴 한데 여기서 학교 수업만 더 쉬워지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 같은데 아쉽네요. "
" 후훗. 아마,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
"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저희 이제 겨우 일학년밖에 안됐는데 난이도가 왜 이렇게 괴랄한건지 모르겠어요. 아니, 대학 수업이 이런데 자격증 시험은 도대체 얼마나 어려울지 원, 아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아. 헤으으응. "
" 저희가 선택한 길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눈이 빠지도록 책상 앞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
" 으아아아! 싫어! 공부 멈춰! 독서실 멈춰! 형은 어떻게 토시 하나도 안 틀리고 누나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생각이 같은 건가? 그, 뒷머리에 칼라 달아놓고 누나랑 형이 생각을 공유한 뒤 말을 하는 거 아니죠? "
" 하하, 그런 건 아니고 누나분도 사회에 진출을 해서 활동을 하는 어른이시잖아요? 저도 이른 나이에 활동했고, 그러니까, 저랑 생각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
" 히잉. 잔소리 멈춰! "
그렇게 두 명은 캠퍼스를 걸으며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워갔다.
몇 분 동안 수다를 떠느라 정신도 놓고 이야기의 꽃을 피워가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정문에 도착한 두 명. 그러나, 그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한쪽 도로에 여러 학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연예인이라도 온 건가 착각할 정도로 인파는 대단했으며, 그러한 모습에 저절로 경섭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생겨났다.
" 형. 저기 한 번 가보는 게 어때요? "
그의 팔을 옭아맨 채 인파 사이로 섞여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자며 제안을 던졌지만 유진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 그, 글쎄요. "
솔직히 말해서 저기에 무슨 일이 있길래 사람들이 몰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인파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그저, 집에 얼른 돌아가 저녁을 만들어 먹고 할 일을 빨리 끝낸 뒤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떨떠름한 반응을 보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경섭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에 힘을 준 뒤 그를 재촉했다.
" 한 번만! 딱 한 번만 살짝 훑고 가는 게 어때요? "
" 어... "
" 한 번만 들어줘요! 딱 한 번만 도와줘요! 저 진짜로 궁금하단 말이에요! "
그의 진심이 담긴 부탁을 결국 거절하지 못한 그는 허락의 표시로 잠시 눈을 감아주었고 그러자 경섭의 얼굴에도 화색이 감돌았다.
유진의 팔을 잡고 이끌어주며 두 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인파 속을 불도저처럼 밀고 헤치고 들어갔으며 마침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맨 앞줄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그들은 마침내 한쪽 도로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한쪽 도로에 세워진 흰색 BMW. 그리고 차 보닛 위에 앉아 있는 선글라스를 낀 한 명의 여성.
정장을 차려입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를 손목에 찬 채로 입에 담배를 문 채로 하얀 연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여성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괜히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씩 웃음을 얼굴에 짓고 있었다.
본인은 멋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육중한 몸무게와 셔츠 밑으로 삐져나와 있는 뱃살, 그리고 삐질삐질 흐르는 땀에서 나는 냄새는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개 똥폼이라고 할 수 있는 꼴값 그 자체. 당연히 엄청난 인파 속을 뚫고 온 경섭은 그러한 사실을 보자마자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눈을 찌푸리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 에이 씨발,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유가 연예인처럼 멋있는 사람을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동물원 원숭이를 보고 싶어서 이렇게 모여있던 거였구나. "
실제로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 모두가 우스꽝스러운 동물을 보듯이 핸드폰을 든 채 낄낄 비웃음을 보이면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저마다 수군수군 험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사진을 찍히고 있는 당사자는 그게 자신에 대한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멋진 포즈를 잡으려고 있었지만.....
" 못 볼 걸 봐버렸네. 형 가요. 여기 더 있다가 눈 썩어버리겠어요. "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돌린 뒤 유진의 팔을 잡아끌면서 얼른 이곳을 벗어나자며 졸라댔다.
" .... "
" 형. 얼른 가자니까요? 한시라도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 정신 건강에 이로운 법이라고요. 형? 저기요? 이봐요? "
그러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그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경섭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덜덜 떨리는 두 다리, 그리고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충격에 빠져있는 눈동자와 공포에 질린 듯 가쁘게 몰아 내쉬는 숨소리까지. 그는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절대 정상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여졌다.
" 어떻게 여길.... "
떨리는 목소리, 그의 가느다랗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은 여성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한 웃음을 보여주곤 쓰고 있던 검은색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더니 보닛에서 엉덩이를 뗀 후 점점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은 한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매만지면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유진씨. 이제 마친거야? "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