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43화 (43/77)

〈 43화 〉 균열

* * *

강압적이면서도 고압적인 그녀의 짧은 한마디.

그리고 나 따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마치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맹수처럼 기백만으로 순식간에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묵직한 느낌이 담겨있는 그녀의 말과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에 비교적 방금까지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던 식탁의 공기가 순식간에 북극의 얼음덩이들처럼 꽝꽝 얼어붙어 버렸다.

당연히 그녀의 심기를 맞춰주기 위해 나의 얼굴에 걸려있던 어색한 웃음은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상황 덕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덕분에 상황을 파악하려 애써 눈동자를 굴리고 눈치를 보는 우스꽝스러운 표정만이 나의 얼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 내 말 못 들은 거 아니잖아. 유진 씨 뭐해? 만지라니까? 응? "

" 아....... 이, 이러지 마세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사장님. "

재차 자신의 팔뚝을 나에게 들이대며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의 행동에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난,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공포를 최대한 억누른 채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천천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물론, 아까처럼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그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선 식탁 밑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할 수밖에 없었다.

" 하. "

당연하게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안전을 확인했다.

이 상황을 유일하게 중재하고 막을 수 있는 선유린은 여전히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담배를 쉬지 않고 여러 개비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한 눈으로 보아도 연속으로 쉬지 않고 담배를 여러 개 피는 행위인 일명 ' 연담 ' 을 치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선유린이 몇 분 간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원래 선유린이 앉아 있던 자리. 즉, 유진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마치 친한 친구라도 되는 듯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쳐놓았다.

그러고선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그에게 얼굴을 서서히 들이민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씨발, 뭘 그렇게 비싸게 굴고 그러는 거야? 뭐 때문에 싫은 건데? 하이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원. 내가 키스를 해달라고 했나, 보지를 빨아달라고 했나, 야한 걸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니고 고작 해봐야 그 조막만 한 손으로 내 팔뚝 한 번 만져달라고 부탁한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

말을 하면서 나와 깍지를 끼려고 서서히 접근하는 그녀의 손길을 난 뿌리치고서는 의자를 살짝 뒤로 빼 그녀의 옆에서 살짝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그게 아니라 이, 이건 아니에요. 전 결혼한 유,유부남이잖아요. "

난 홑몸도 아닌 가정을 이루고 있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당연히, 모시고 있는 지어미가 있는 사람이 아내도 아닌 외간 여성의 몸과 접촉을 한다?

나 자신도 용납하지 못하고 아내 또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 아니, 내가 그걸 모르나? 유부남인 건 당연히 알지. 그런데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야한 짓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몸이 좋다고 생각하니까 손 한 번 올려서 팔뚝 좀 만져보고 개인적인 평가를 내려달라고 말한 것뿐인데 우리 유진 씨가 날 너무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단 말이야. 기분이 썩 좋지 않단 말이지. "

" 아,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

" 그게 아니면 그냥 시원하게 손 한 번 뻗어서 만져보고 평가 한 번 내려주고 딱 깔끔하게 끝내면 되잖아? 뭘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망설이고 그러는 거야? 단순한 접촉에 불과해 이건! 유진 씨가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하등 없다니까? "

" 아, 그, 그게 그러니까 또 제가 어떻게 함부로 소, 손을 올리겠어요.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시고 어떻게 보면 아내의 직장 상사분이신데 그런 분에게 함부로 몸에 손을 올리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잖아요. 그러니까... "

" 에이, 그건 도대체 뭔 쓸데없는 걱정이야. 매력 넘치는 남자가 자기 몸에 손을 올려주는데 그걸 거부할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리고, 애초에 난 유진 씨가 내 몸을 만지는 것에 대한 허락을 내렸잖아? 그러면, 상관없는 거지. "

" .... "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든 그의 입에선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라.

하지만 나에게 닥친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빠르게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 최대한 머릿속 세포의 활동을 빠르게 촉진시켜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 따윈 도저히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똑딱ㅡ 똑딱ㅡ

어색한 침묵 속 나의 귓가를 관통하는 시곗바늘 소리가 날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즉, 나에게 남은 것은 그녀의 말에 내가 순순히 따르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 하.... '

무서움, 부끄러움, 수치스러움, 공포,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 등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깨물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안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그럴 수 있는 용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고?

나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죄 없는 아내에게 피해가 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다는 협박을 그녀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며 그것을 실행에 직접 옮길 수 있는 능력 또한 충분했으니까.

내가 조금만 참는다면 전부 해결될 일인데 괜히 나의 감정을 앞세우다가 아내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도 두려웠고 무섭게 느껴졌다.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 또한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계속해서 등을 돌리는 것? 애초에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물러날 곳도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야한 행위가 아니야.

이건 단순한 신체 접촉일 뿐이야. 물론, 이러면 안 돼 지만 그래도 차, 참작의 여유는 있잖아. 내 몸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부분을 서로 만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팔뚝 정도만 만지는 거니까.... 이건 다른 사람들은 하,하는 거니까...

나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 하아. '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입 안쪽의 살을 이빨로 씹어대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치욕스러움을 달래갔다.

" 하, 할게요. "

" 어우. 좋은 생각이야. 역시 중앙대 재학생이라서 그런지 두뇌 회전율이 빠르네. "

딱 한 번 눈을 감고 저질러버리자 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솟아나는 미약한 떨림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그렇게 천천히 그의 손이 앞으로 점점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팔뚝에 살포시 올라가는 그의 하얗고 작은 손.

물컹ㅡ

굉장히 물컹한 촉감이었다. 아까 본인이 호언장담한 것과는 다르게 돌덩이는커녕 마치 젤리 덩어리를 만지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한 번 때리면 출렁거리며 요동칠 것 같은 살들의 촉감이 내 손을 타고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윽. '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촉감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는데,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녀는 히죽히죽 웃음을 보이면서 나에게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냈다.

" 어때? 단단하지? "

손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촉감에 차마 자연스러운 웃음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고 나의 입가에는 굉장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색한 웃음이 걸리게 되었다.

" 아, 네... "

단단하긴 개뿔. 나는 마치 불판 위에 올려둔 돼지 껍데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 같았다. 아마, 큰 접시에 담겨진 대왕 젤리가 아줌마의 팔뚝보다는 훨씬 단단하고 탄력이 있지 않을까?

" 솔직하게 말해봐. 부부생활 하면서 유린 씨도 유진 씨 몸을 많이 만져봤을 테고 반대로 유진 씨도 유린 씨 몸을 많이 만져봤을 텐데 비교를 해보자면 내가 유린 씨보다 조금 더 낫지 않아? "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선 생각했다.

'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건가? '

이건 도대체 무슨 개소리일까? 그러니까, 아줌마가 생각하기에는 본인의 몸이 아내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평소에 뭘 먹고 살길래 저런 과한 자신감에 차 있는 걸까? 본인에 대해 평가를 내려도 너무나도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것 같았다.

" 누구라고 생각해? "

" 아, 그건... "

당연히 우리 아내다.

장담하건대 세상 그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서 결과를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이 아줌마를 고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일반인 한 분을 붙잡고 데려와 비교를 해봐도 전부 나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애초에 아내와 아줌마 사이의 승부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내는 게이트 안에서 괴물을 잡는 현역 헌터고 아줌마는 헌터긴 하지만 현장에서 은퇴를 한 지 오래였고 그 후로 자기 관리를 따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건,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하지만,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 에이, 부담 없이 솔직하게 말해봐. 나는 입에 발린 거짓말보다는 솔직한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가감 없이, 과장 없이, 선의 따위는 부리지 말고 솔직한 감정을 말해봐. 자, 유진 씨가 보기엔 아내랑 나랑 둘을 비교해봤을 때 누가 더 좋은 것 같아? "

내 허벅지를 검지로 쿡쿡 찌르면서 대답을 재촉하는 그녀의 행동에 마음 같아서는 모든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억지로 그 욕망을 참아낸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오는 거짓말을 뱉어주었다.

" 아내도 엄청 좋고 사장님도 전부 좋으신데 제 개인적으로는 사장님이 제 아내보다 몸이 조금 더 좋으신 것 같아요.... "

" 푸하하하하하! 역시 그렇네! 역시 예상한 대로야! 아이고, 우리 유진 씨가 보는 눈이 있구만! "

때로는 정답이 나와 있어도 그것을 외면해야 할 때가 있는 법.

나의 거짓말을 듣고선 씨익 미소를 지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내 몸에서 손을 떼더니 곧바로 요란스러운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 하긴,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는 근육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 잘 파악했네! 그나저나, 난 꼼짝없이 유진 씨가 아내를 고를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유진 씨가 되게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네? "

" 사장님께서 솔직하게 평가해달라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그 말에 충실히 따랐을 뿐인걸요. "

" 흐하하하하하하! 아이고야, 우리 유진 씨는 진짜로 현명하게 처신을 잘하는 사람이네. 사회에서 이쁨받는 법을 잘 아는 걸 보아 하니까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잘 살아갈 것 같아 보여. 응? "

"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 끝났으니까 손은 떼도 괜찮겠죠? "

" 아유, 그럼 당연하지. "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그녀의 팔뚝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황급히 떼어버렸다.

굳게 다짐을 했고, 충분한 자기 합리화도 했기 때문에 막상 접촉을 하고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팔뚝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마자 물밀 듯이 몰려오는 수치심과 부끄러움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저절로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참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진정되지 않는 울분에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고선 뚝뚝 흘러나오는 닭똥 같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최대한 몰래 훔쳐내기 시작했다.

" 흡. 흑. "

그러나 아무리 몰래 눈물을 훔쳐낸다고 해도 옆자리에 앉은 그녀까지 속이지는 못했고,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겨 자신이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원래라면 눈물을 보인 그의 옆에 앉아서 그를 더욱 몰아세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막 베란다에서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재떨이에 비비고 있는 유린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샘솟아 오르는 욕심을 일단 저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 어휴, 좋네. "

그 사이 담배를 다 피우고 돌아온 선유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채 천천히 베란다 문을 닫고서 그 모습을 드러내자 소주잔에 가득 담겨있는 소주를 한 번에 들이마신 그녀는 여태껏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대화를 시작해나갔다.

" 유린 씨. 담배 너무 많이 피는 거 아니야? 연담을 도대체 몇 개를 피는 거야? "

" 6개 정도밖에 안 했습니다. "

" 6개 정도라니. 6개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헌터라고 해도 조금 가려가면서 피는 게 건강에 좋아.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하고 매력 있고 헌신적인 남편이 곁에 있는데 오래오래 살아야지? "

" 전 아직까지 팔팔해서 괜찮습니다. 나중에 정말 위태위태하면 끊던가 해야죠. 그나저나 유진아. 넌 아까부터 고개 숙이고 뭐 하고 있는 거야? 땅에 뭐라도 떨어졌어? "

유린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가자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고 있던 그의 몸이 움찔 떨림을 보였다.

' 여보.... '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아내가 알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일이 안 좋은 쪽으로 크게 번질 게 분명했다.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싫었다. 아까 있었던 일들은 그저 나 혼자 가슴에 묻어두고 싶었기에 난 눈물범벅으로 점철된 얼굴을 손등과 손바닥을 이용해 최대한 닦아냈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킁. "

대충 눈물을 닦아낸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린 그는 자신의 아내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옅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물론 콧물을 잔뜩 들이키며…….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