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균열
* * *
" ...그냥, 중요한 사람이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
역시나, 평범한 직장 상사 후배의 관계라고 보이지는 않았는데 내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요? 아, 그럼 아까, 여보가 사장님이라고 계속 부르던데, 그러면, 중견 기업의 사장님인 거에요? "
"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기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고 우리 쪽 업계의 사람인데,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헌터야. 헌터. "
" 네? 헌터라고요? "
의외의 대답이 아내에게서 돌아왔다.
' 저 사람이 헌터라고? '
살이 오를 대로 올라서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아줌마가 아내와 같은 일반인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갖춘 헌터라고?
내가 알기론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부 다 몸이 굉장히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헌터라는 사람들은 일반인처럼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게이트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괴물들을 잡고 다니지 않는가.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고 종일 뛰어다니며 괴물의 공격을 피하는 등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목숨을 건 운동을 종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헌터라는 직종은 살이 찌려야 찔 수가 없는 직종으로 알고 있다.
" 정말이에요? "
당연히 쉽게 믿지 못할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재차 그 사실을 아내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얼빠진 그의 반응에 공감하는 걸까? 옅은 미소를 보인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 못 믿겠지? 근데, 진짜야. 저 봊같은 년 나랑 똑같은 D급 헌터인데 심지어 나보다 경력도 높아. 거의 화석이나 다름없어. "
" ..... "
" 물론, 현장에서 뛰는 새끼는 아니야. 그건 당연하지. 현장에서 뛰는 새끼면 저런 뚱땡일 리가 없잖아? 자기 경력도 경력이고 쌓인 것도 있으니까 현장은 이미 은퇴한 지 오래됐고 지금은 길드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년일 뿐이지. "
" 아……. 현장에서 뛰시는 분은 아니구나. 그런데, 길드 하나를 운영한다는 거면 한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소린데. 제가 알기론 길드는 헌터 업계에서 굉장히 넉넉하다고 알고 있는데. "
" 그렇지. 뭐, 길드라고 한다면 헌터 업계에서 바닥에 치일 정도로 널려있는 게 길드긴 한데 문제는 저 봊같은 년 길드가 유진이 네가 예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한다는 거야. "
잠시 텀을 가지고 담배를 한 번 빨고 하얀 연기를 내뱉고서는 아내가 말을 이어갔다.
" 저딴 봊같은 병신년이 길드장으로 있는데 어떻게 길드가 장성할 수가 있는 거지? 존나 의문이라니까. "
" 어, 어느정도길래... "
" D급 헌터들 중에서는 저년 길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예 없어. 그냥, D급 헌터 내를 완전히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짜 더럽게 큰 곳이야. 개개인이 아닌 길드 자체로 밀어붙이면 어지간한 C급 소형 길드도 넘볼 수 있을 정도고. "
" 와.... "
저 아줌마가 그 정도 되는 길드의 수장이라고?
도저히 쉽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 뭐, 어쩌다가 연이 닿아서 그럭저럭 지내곤 있는데 같이 어울릴 때마다 옆에서 혀가 얼얼할 때까지 보빨 해줘야하는 거 진짜 봊같아서 못 해 먹겠다니까. 뭐, 그래도 여태 동안 저년 옆에 서서 열심히 맞장구쳐준 덕분에 콩고물이 떨어져서 요즘 안 좋았던 형편이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내가 참고 있는 거지. 그거 아니었으면 진작에 반으로 접어서 죽여버리고도 남았어. "
한숨을 내쉬며 눈을 살포시 감는 아내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욕을 내뱉었다.
" 그런데, 씨발 적당 것 해야지. 하다 하다 이제는 남의 집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그냥 얌전하게 룸에서 술 처먹고 있으면 되는 것을, 굳이 우리 집에 와서 술을 쳐먹겠다고 그 지랄을 떠는 거지? 씨발, 진짜 봊나 짜증 나네. 옆에서 자꾸 예예 대답하면서 허리 굽혀주니까 내가 진짜 자기 멋대로 부릴 수 있는 종으로 쳐 보이나. "
" ... "
" 에휴, 유진아. 너도 알겠지만, 저년 절대로 순순히 일찍 집으로 갈 새끼는 아니거든. 우리 집에서 술 처먹고 간다고 했으니까 아무리 빨라도 새벽 늦게까지 있을 게 뻔하니 너도 그냥 상황 보고 알아서 잘 판단하면서 행동하도록 해. 알았어? "
" 네. "
" 너 내일 어차피 학교도 가야 하잖아? 지금도 충분히 늦은 시각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빠지는 것도 좀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앉아서 자리만 지키다가 적당히 눈치 보고 바로 빠져버려. 물론, 그때까지는 언행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
" 아, 알아요. "
"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건데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냥 저년이 말 걸면 예의 지키는 선에서 최소한의 대답만 해주고 치워버려. 절대로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누지 말고. 너 이거 무조건 지켜.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
" 네. 꼭 명심하고 또 조심할게요. "
" 그래, 우리 유진이는 똑똑하니까 굳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행동할 거라고 내가 굳게 믿고 있어. "
그때였다.
조금 열려있는 안방 문밖으로 들리는 걸걸한 여성의 큰 목소리가 집안을 우렁차게 장악해나갔다.
" 아, 시원하다! 보기와는 다르게 뜨거운 물은 잘 나오네! 수건, 그냥 바닥에 버린다? "
그러자, 내 머리에 큰 손을 올리고서 마치 칭찬받을만한 행동을 한 강아지를 기특하다며 만지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내의 행동이 멈춰졌다.
" 에휴. 씨발. 봊같은 년. 그래, 간다. 가니까 씨발 좀 기다려. 참을성 한 번 존나 없는 년이네. 유진아. 내가 나간다고 곧바로 너도 따라 나오지 말고 안방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천천히 나와. 알았지? "
" 네. 여보. "
한숨을 내뱉고서는 내 어깨를 몇 번 토닥거려주더니 아내는 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버리고서는 곧바로 옷장을 열어 프리사이즈의 옷들을 몇 가지 챙기고서는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밖으로 빼꼼 내밀자 아내는 수건으로 머리를 제대로 닦지 않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잔뜩 떨어지고 있는 아줌마에게로 달려가더니 방금 챙긴 옷들을 아줌마에게 내밀어주었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파악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 아줌마가 아내가 준 옷들을 받들고서는 투덜투덜 불평을 부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내와 이야기를 하던 아줌마의 눈동자가 돌아가자마자 문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나와 눈빛이 마주치게 되었다.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려주며 눈웃음을 짓는 아줌마.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그녀의 미소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보여주지 않고 문밖으로 빼꼼 내밀었던 내 얼굴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을 뿐이었다.
* * *
" 아이고, 이게 뭐야? 두부김치 아니야? "
괜히 이것저것 시키는 것보다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드는 게 훨씬 싸게 먹히고 맛도 좋으므로 급하게 집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두부김치를 만들어서 술안주로 식탁에 대령하니 아줌마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되게 의외의 반응인걸?
난 왜 안주를 요리해도 이런 하찮은 음식을 자기한테 내왔냐고 버럭버럭 화를 낼거라고 예상했는데.
" 너무 급하게 준비해서 이,이것밖에 못 만들었어요. 죄송합니다. "
형식적으로 내뱉는 나의 사과에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아줌마.
"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아이고, 센스 있게 아내가 헌터니까 양도 충분하게 만들었고, 냄새도 좋고, 이야, 이거 플레이팅 솜씨도 남다르네. 유린씨. 남편이 요리도 엄청나게 잘하나 보네? "
" 아유,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
" 뭐가 아니야? 원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도 몰라? 이거 내가 봤을 땐 맛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
" 하하, 이거 제 남편 얼굴에 너무 금칠해주시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 부끄러워서 남편이 쓰러져버릴지도 모릅니다. "
아내의 말에 나또한 겸연쩍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 아이, 이 사람. 금칠이라니!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아이고, 진짜 복을 타고났네. 타고났어. 요즘 요리도 잘하고 아내한테 헌신적으로 대하는 착한 젊은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정말 유린 씨는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살아야 해. "
" 안 그래도 매일 잘 때마다 꿈속에서 이런 남편이랑 같이 살게 해줘서 고맙다고 빌고 있습니다. "
어색한 웃음을 보여주던 아내는 아무런 의미 없이 젓가락을 자꾸 만지기만 하는 아줌마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두부김치가 빼곡히 담겨있는 접시를 그녀에게로 살짝 밀어주었다.
" 사장님. 굳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드셔도 괜찮습니다. "
" 아, 그래? 아무리 그래도 집주인이 먼저 먹기 전에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건 젠틀한 여자가 보여줄 모습이 아닌 것 같아서 유린 씨가 먼저 먹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
" 사장님이랑 저 사인데 무슨 그런 걸 신경 쓰시고 계시는 겁니까? 편안하게 먼저 드셔주시고 찐한 평가를 한 번 내려주십시오. "
아내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아줌마가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 하하! 그럼, 사양하지 않고 먹어볼까? 자, 이렇게 김치를 두부위에 올려서 한입에 넣으면, 흠. "
아무 의미 없이 만지고 있던 젓가락을 본격적으로 들어 올려 내가 손수 만든 안주를 한입에 집어삼킨 아줌마는 잠깐 우물우물 음식을 씹어 넘기더니 곧이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쪽 눈썹을 씰룩쌜룩 움직였다.
" 맛있네. 맛있어. 야,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 "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거듭 말하는 칭찬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 가, 감사합니다. "
" 혹시 가게 내 볼 생각 없나? 이 메뉴를 주력메뉴로 딱 걸고 장사하면 쭈그렁탱이 아줌마들 지갑이 저절로 열릴 것 같은데? "
" 그,그정도는 아닌데... "
" 뭐가 그 정도가 아니야? 나, 미각 되게 예민해. 음식도 고급스러운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야, 이건 진짜로 거짓말을 하나도 안 섞고 말하는 건데 맛있어. "
" 아하하.... "
"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요리도 잘하는구먼. 나는 집에만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돈만 받아먹으며 소파에 앉아서 TV만 보는 남자가 있는데 유린 씨는 집에 돌아오면 이런 완벽한 남편이 맞이해준다니. 그래서 말해보는 건데 우리 유린 씨는 남편 한 번 교환해볼 생각 없어? 내 남편은 정말 얼마든지 가져가서 사용해도 괜찮은데 말이야. "
얼굴에 미소를 띠더니 사람의 신경을 살살 긁어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줌마의 행동에 곧바로 난 주위의 눈치를 살살 보게 되었고 살짝 고개를 돌려 아내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줌마의 신경을 살살 긁어내는 말에 아내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흉악하게 변하였지만, 그것은 단 한 순간이었을 뿐이었고, 아내는 곧바로 표정을 원래대로 바꾼 채 굳은 미소를 얼굴에 지었다.
" 제가 워낙 소유욕이랑 욕심이 많아서 죄송하지만 양보는 못 해 드릴 것 같습니다. "
아내의 정중한 거절에,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보이는 아줌마.
" 하하하! 하긴, 이 정도 되는 남편이 곁에 있는데 저절로 소유욕이랑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 자자, 잡소리가 길었네. 한잔하자고. "
" 영광입니다. 사장님. "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제의하는 그들의 행동에 나는 예의상 술 대신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선, 컵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워나갔고 곧바로 집안에서 이어지는 술자리가 시작되면서 이어지는 아줌마의 여러 이야기들.
사실, 술자리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재밌거나 웃음이 가득해야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에서 펼쳐지는 술자리는 재미와 웃음은커녕 노동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굉장한 정신력을 소비시키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꽃인 수다는 이곳에서 가장 윗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줌마가 당연히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나와 아내는 강제적으로 아무런 감흥도 재미도 없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중간마다 감탄사와 추임새를 넣어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곗바늘이 흐르고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재미없는 술자리를 가진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늪에 빠진 것처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이야기의 늪에서 먼저 항복을 외친 것은 내가 아닌 아내였다.
더이상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본인 자랑밖에 들어있지 않은 무용담을 듣기 괴로웠던 것인지 아내는 내가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한숨을 살짝 내뱉고서는 식탁 위에 올려둔 담뱃갑에 손을 올리고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아이고, 이거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다 보니까 담배가 당기네요. 베란다에 나가서 한 대 피고와도 괜찮겠습니까? "
" 당연하지! 그런데, 그냥 내 앞에서 펴도 괜찮은데 굳이 베란다까지 나갈 이유가 있나? "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장님이 앞에 계신데 건방지게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
갔다 오라는 신호로 손을 흔드는 아줌마의 행동에 아내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하고서는 곧바로 뒤로 돌아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내가 담배를 챙기고 베란다로 사라지자 그렇게 아줌마와 나, 둘만이 이 공간 안에 남게 되었다.
식탁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에 난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깐 채 괜히 물이 담겨있는 컵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큰 하품에 아줌마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곧바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뒤 고개를 다시 한번 밑으로 숙여 미안함을 표현하고서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 피곤해. '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을 훨씬 넘기고 새벽 3시까지 자리를 지키다 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져 저절로 감기고 있었다.
또한, 온몸에 느껴지는 피로함에 지금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면 꿈나라에 갈 것만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침대로 뛰어가 잠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예의상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 그럼, 아내가 담배 다 피우고 오면 상황 봐서 슬슬 들어가야겠네. '
이 정도면 솔직히 내가 해야 할 의무는 마땅히 다 지킨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내도 어느 정도 자리를 지키다가 타이밍 보고 들어가서 자라고 미리 나에게 말을 해줬으니까, 슬슬 들어가도 괜찮겠지.
' 어차피 너무 더러운 것도 아니고 다들 깔끔하게 드셨으니까 술자리 정리는 내일 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정리 못할 텐데.
에이, 그러면 학교 갔다 와서 정리해도 되지. 굳이 아침에 정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렇게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올 아내를 기다리면서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둔 다음 의자에 앉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이었다.
혼자서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던 그녀의 눈빛이 아까 셋이 모여 있을 때와는 다르게 두 명으로 인원이 줄여지자마자 위험한 쪽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선유린이 베란다에서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확인하던 그때, 그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만약, 위험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과 기괴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가 목격했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이 자리를 곧바로 피해버렸겠지만 안타깝게도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는 그는 이런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그녀는 입술을 혀로 적시고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손가락으로 식탁을 몇 번 두드리더니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그를 향해 한마디 말을 건넸다.
" 둘만 남았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