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균열
* * *
사실, 저번에 아내가 혼자 안방에 들어가서 화를 내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전화를 할 때부터 아내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의 직장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애초에 아내가 전화 상대와 나누는 이야기 자체가 일반적인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심오한 이야기들인데 이걸 눈치를 못 챈다면 그건 애초에 바보가 아닐까?
하지만, 아내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그러한 사실을 나에게 숨기려는 기색을 보여주었지만, 어찌 손바닥으로 드넓은 하늘을 전부 가릴 수 있겠는가?
예전과 다르게 아내가 집에 귀가하는 시간은 점점 빨라졌고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는 날 또한 예전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웃는 모습은 아예 사라졌으며 가끔 나에게 보여주던 친절한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더는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항상 말끝마다 심한 욕을 붙이며 아내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마구마구 내뱉었다.
또한, 아내의 짜증도 굉장히 많이 늘어졌으며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행위와 범위 또한 많이 늘어나 이제는 피부가 뻘겋게 물들지 않는 날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가 되어버렸다.
옷장에 넣어둔 칼집을 꺼내는 날은 줄어들어 서서히 그 위에는 먼지가 쌓이고 있었고, 당연히 그러한 모습이 서서히 많아지면서 의심은 옅어졌고 이제는 아내의 직장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신하는 단계에 오를 수 있었다.
예로부터 시간이 흐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들이 우리 집의 상황을 목격한다면 전부 이렇게 말하겠지.
" 기다려라. 기다리다 보면 전부 해결될 거야.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에 한해서는 그러한 옛말이 전혀 통용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 집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내는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으며 또한 집안을 지탱하는 대들보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 ... "
언제나 늘 그렇듯이 여러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은행.
평일 아침 시간이라서 그런지 다른 시각보다는 확실히 사람들의 왕래가 적긴 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것은 아침에 갑자기 생겨난 공강 시간을 활용하여 은행에 방문한 오유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통장을 받아주시고 놓고 가신 물건이 없는지 잘 확인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ㅡ
사락ㅡ
기계적인 목소리를 뒤로한 그는 정리가 끝난 통장을 ATM에서 뽑아 곧바로 페이지를 천천히 한 장 또 한 장 넘겨보았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에 당도하자마자 한 눈에 들어오는 끄트머리에 적힌 선명한 숫자들의 향연을 쭉 읽어낸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 하아. 역시나네. '
고운 입술을 이빨을 세워 꽤나 세게 물어뜯은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잡히지 않는 쓸데없는 희망에 약간의 집착을 보였고 혹여나 기계가 잘못되어 입력을 이상하게 해준 게 아닐까 라는 쓸데없는 기대를 가져보고 눈을 질끈 감아 다시 떠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다시 감고 떠보고 별 지랄을 떨어도 통장에 찍힌 숫자는 변하지 않았으며 곧이어 현실을 직시한 그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한숨에 고개를 아래로 푹 숙여버렸다.
' 역시나 들어오는 돈이 줄어들었어. '
통장 아래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백만 원이라는 숫자.
혹여나 0이 한 개 덜 붙은 게 아닐까 라고 말도 안 되는 희망에 기대어 아까와 똑같이 천천히 손가락을 세워 일일이 개수를 세어 가면서 다시 금액을 확인해보았지만 역시나 달라진 건 없었다.
" 하아. "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고 당장이라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조리 쥐어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의 울분이 샘 솟아올랐다.
돈에 대한 문제.
이것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피할 수 없던 운명인 걸까?
높은 등급에 있는 헌터와는 비교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D급헌터의 자리에 있는 아내는 늘 이백만 원에서 삼백만 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수익을 항상 벌어왔었다. 그리고 나는 주부로서 항상 아내가 벌어준 그 돈으로 이 집안의 모든 것을 꾸려나갔고.
요즘 시대에는 보통은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로 나도 그 점을 생각해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할까 고민했지만, 곧바로 달려든 아내의 격렬한 반대에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집안에서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것은 아내 혼자뿐이었다.
즉, 우리 집은 그렇게 아내가 벌어준 돈으로 생활비도 그렇고 관리비, 빚, 차값, 수도세, 반찬값, 등등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직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설마 이 시스템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로써 완벽하게 정립되어있던 시스템 자체가 아예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을 해보아라.
항상 고정적으로 들어오던 이백만 원에서 삼백만 원 정도 되는 아내의 수익이 백만 원 이하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백만 원이라는 돈은 한 명의 개인이 아껴 쓰고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혼자서 살기에 충분한 돈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정이 버티기에는 턱없이도 모자란 금액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면 기본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행동에 저절로 제약이 생기게 될 것이다.
' 어떡하지? '
일단, 몇 년 간 틈틈이 남는 돈으로 저축을 한 게 있으니까 그걸 깨버린다면 당분간 버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
그것으로 근근이 버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저축한 돈이 무제한으로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그 짓을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 어떻게 해야 할까? '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 상황을 타파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왠지 모르게 이러한 상황이 굉장히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주어지고 있었으니까.
남편으로서, 그녀의 곁에 서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으로서 아내에게 들이닥친 시련은 함께 극복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자신을 도와준 것처럼 자신도 아내의 곁에 서서 큰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을 되찾고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내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이라도 부려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이 일은 마음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일.
모든 이들이 말하듯이 차별 없이 그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오는 삶의 시련에 빠진 아내를 미치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막상 뒤를 돌아보면 내가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아내에게 들이닥친 불행한 일에 대해서 내가 도움을 주기에는 난 너무나도 무력했으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무슨 사정으로 이 일이 일어난 지도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게 바로 나였다.
' 네가 뭐 어떻게 할 건데? 예전에 나처럼 너한테 막 돈을 대줄 수가 있어? 뭘 해줄 수가 있어? 아, 하나 있네. 몸 대주는 건 할 수 있겠네. '
' 몸 대주는 거 빼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뭘 자꾸 나누자니 뭘 하자느니 왜 그런 지랄염병을 떨고 있냐고? 그냥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기나 해! '
머릿속을 지나가는 뼈가 서린 아내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저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꽉ㅡ
아내의 말대로 이러한 상황이 막상 닥쳐오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내가 너무 분하고 짜증이 났으니까.
어찌나 힘을 세게 준 것인지 마치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은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토마토처럼 새빨간 색깔을 띠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누른 건지 이빨로 짓누른 입술에서 송골송골 빨간 핏방울이 맺혀 얼굴을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런 상관을 쓰지 않고 착잡한 마음이 감돌아 있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혼잡한 광경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펼칠 뿐.
" 하아. "
자꾸만 바닥으로 흘러내리려는 가방끈을 다시 동여매고서는 그는 은행의 입구 앞에 서서 푹 숙였던 고개를 저 하늘 위를 향해 서서히 올렸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의 날씨는 정말 빌어먹게도 좋았다.
' 이런 일만 없었다면 아내와의 나들이를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남들처럼 이 환상적인 날씨를 마음껏 만끽할 수 없을 것 같네. '
그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
북적북적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이탈리아 전통 파스타 간판을 내세운 가게 안에 앉아있는 두 명의 남자 중 경섭은 부산스럽게 덜그럭거리며 포크로 토마토 파스타를 돌돌 말아 굉장히 맛있게 흡입하고 있었다.
" 맛있다. 여기가 숨은 맛집이네요! 맛집이야! 구성이랑 소스도 괜찮고 이 정도 맛에 만원이면 가격도 꽤 착한 편이고. "
다시 한번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으로 집어넣고서 우적우적 씹어대는 그는 곧이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짓더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다음 자신의 앞에 앉아 가만히 먹는 것만을 지켜보는 유진을 쏘아보았다.
" 아니, 그런데 점심시간에 저랑 둘이서 학교 근처 파스타 집에 같이 와놓고 형은 왜 안 먹는 거예요? 뭐, 다이어트 하시는 거예요? 아닌데. 솔직히 형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 이 세상 남자들은 다 고도 비만이라는 소리인데? "
멀뚱멀뚱 그가 먹는 것만을 바라보던 유진은 불만이 가득한 경섭의 말에 실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 다이어트 아니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냥, 집에서 늦은 밥을 먹고 왔더니 배가 별로 안 고프네요. 저,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드세요. "
" 아니, 그게 아니라 저 혼자만 먹으니까 약간 그림이 오묘하게 이상해서 직원분들 시선이 느껴져서 그런 거죠. 그나저나, 집에서 늦은 아침을 드신 거에요? 형이 웬일이래요? 항상 일찍 일어나시던 사람이 오늘은 늦잠이라도 잤나 봐요? "
" 조, 조금 그런 거죠. 저도 사람이라서 늦게 일어나고 조금 더 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
" 다른 사람이 말하면 되게 한심해 보일 건데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되게 귀여워 보이고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이게 평소 이미지에 따른 생각의 차이인 건가? 그런데 아침을 늦게 먹으셨다고 해도 점심은 드시는 게 낫지 않아요? 나중에 수업 듣다가 배고프실 게 뻔한데. "
그는 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만을 보여줄 뿐.
" 에이, 알았어요. 전 먹으라고 계속 권유했다는 거 꼭 기억해두셔야 하는 거 알죠? 나중에 와서 딴말해도 전 아무것도 못 주니까 명심하세요! "
" 다, 당연하죠. 나중에 가서 다른 소리 절대로 안 하니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펴, 편하게 드셔도 괜찮아요. 전 앞에 앉아서 경섭 씨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니까. "
대외적으로는 늦은 아침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불러서 점심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경섭 씨가 알고 있는 게 좋겠지?
사실, 늦은 아침 식사는커녕 오늘 아침은 아예 굶어서 그런지 평소와는 다르게 배에서 울리는 배꼽시계는 정말 시간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당연히 배고픔에 눈은 돌아갈 것 같았으며 당장이라도 내 앞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경섭 씨의 음식을 똑같이 시켜 먹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손을 들어 주문을 넣지는 못했다.
그야,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기 위해 만원이라는 돈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웠으니까.
안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런 돈을 아껴봤자 티끌 모아 티끌인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방법밖엔 없지 않은가.
까고 말해서 나 같은 사람이, 아내를 위해 어떤 것을 해줄 수 있겠는가?
난 부자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좋은 능력과 인맥을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평범하디 평범한 남자 유부남일 뿐이지 않은가.
그럼,그 역할 내에서는 설령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나의 이러한 행동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모든 손을 놓아버리고 가만히 아내가 혼자서 이 상황을 타파해 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는 것은 나 스스로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시도해봐서 힘들어하고 있는 아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그런 사소한 행위로 아내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밥을 굶을 수 있었고 지하철을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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