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균열
* * *
창문 밖으로 비치는 어둑어둑한 밤 풍경.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창문을 배경 삼아 소파에 몸을 기댄 아내는 TV에 시선을 고정해두고서 말없이 소주를 홀짝 들이켰다.
평소와는 아예 다른, 생기가 넘쳐흐르지 않으며 마치 어릴 적 나처럼 좌절감과 무기력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아내의 눈동자를 목격하자마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분이 벅차올랐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을 살짝 짓고서는 마지막으로 싱크대 주위에 묻어있는 물들을 행주로 깔끔하게 닦아 설거지를 마무리했고 곧바로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 한쪽에 살포시 걸어놓았다.
" 여보. "
" ... "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러한 것에 별로 굴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고무장갑을 끼고 있어서 고무 냄새를 솔솔 풍기는 손을 대충 비누로 닦아 물로 씻어낸 그는 한쪽에 걸려있는 수건에 물기를 닦아내면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왜 그러세요. 혹시, 정말로 오늘 무슨 일 있으셨던 거에요? "
"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가서 네 할 거나 해. 아니면 그냥 얌전히 침대에 처박혀서 자. 나는 술 좀 더 먹다가 잘 테니까. "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부를 묻자 아내가 인상을 한 번 찌푸리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나에게 꺼지라는 의사표시를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더욱 그녀에게 밀착시켰고 한쪽 손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올리며 살살 고개를 내저었다.
" 여보. "
" 어? "
" 여보가 평소와는 너무 다르게 행동하시는데 제가 남편 된 입장에서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
" 하, 야. 내가 평소랑 뭐가 다른데? 네가 씨발 무슨 탐정도 아니고 네 주제에 내가 어떠니 뭐느니 추리를 하고 있어? "
"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여보. 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지금, 여보가 짓고 있는 표정은 마치, 여보를 만나기 전 제 얼굴을 보는 것 같단 말이에요. "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의 내 얼굴.
지금 아내의 모습은 마치 내가 아내와 만나기 전 혼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며 온갖 풍파에 시달려 잔뜩 닳을 대로 닳아버린 예전의 내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드리워있었으며 절망과 자괴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희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한데 뒤섞여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 또, 평소랑 다르게 밥도 남기셨고. "
고개를 살짝 돌리자 식탁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는 소고기가 접시에 한가득 담겨져 비닐에 꽁꽁 싸매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본다면 이제 저녁을 차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접시에 담겨있는 저 소고기들은 몇 시간 전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아내가 다 먹지 않고 버린. 즉, 다 먹고 아내가 남긴 음식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내가 음식을 남긴다는 것은, 심지어 고기 중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을 받는다는 소고기를 남긴다는 듯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다.
군것질이라면 몰라, 밥을 먹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던 게 아내였는데 오늘은 반찬을 포함해서 밥까지 모조리 남겨버렸다.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 ... "
" 거기다가, 항상 술을 드실 때면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오라고 재촉하시는데 오늘은 저녁도 조금 드셔놓고 변변찮은 안주도 없이 여태까지 술만 마시고 계시잖아요. "
고개를 살짝 내려다보니 벌써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소주병이 무려 일곱 병이었고 지금 아내의 손에 들려있는 병까지 합친다면 무려 여덟 병이라는 소리.
약 3시간 만에 아내는 저 정도의 양을 변변찮은 안주도 준비하지 않고 텀을 두거나 조금의 휴식 시간도 없이 계속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이렇게 평소와는 아예 다른 행동을 아내가 대놓고 보여주고 있는데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를 채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이 정도라면 동네에 한두 명씩 있는 눈치 없는 바보라도 다 알아챌 게 뻔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다.
단지 오늘 유달리 아내의 기분이 나쁜 건가 잠깐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잠시 머리를 굴리며 이리저리 생각도 해보고 종합적인 이유를 넣어보면은 결국 결론은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 흠. "
그의 설명에 그녀도 대충 눈치를 챈 것인지 괜한 뻘쭘함에 헛기침으로 그녀는 최대한 주의를 돌려버렸지만, 오히려 그는 그녀의 행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 걱정돼요. 여보. "
그 어떤 시련이 와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우직한 사람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하니 너무나도 걱정이 돼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다 알고 있는데,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다시 술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나 강인하던 분이 혼자서 그렇게 끙끙 앓고 계신 거예요? 고민이 있으시다면 털어놓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
" 아, 됐어. 뭘 씨발 오바를 떨고 지랄이야. 아무것도 아닌데. "
"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여보가 이렇게나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아예 처음 보는데! 여보. 괜히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고민이 있다면 나누는 게 창피한 것도 아니고요. "
" 씨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너 혼자서 별 지랄염병을 떨고 있어? 아, 그리고 솔직히 까고 말해서 네가 뭔데 뭘 나누자니 마니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
" 남편이잖아요. 여보, "
" ... "
순간 이어지는 침묵에 곧바로 그녀의 입가로 다가가던 술병 또한 멈춰버렸다.
" 전 남편이에요. 여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여보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애정하고 잘못이 있어도 여보의 편에 조건 없이 서고 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도 전 여보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
나는 아내의 남편이었다.
조금 모자라고 그녀에게는 부족할 수 있는 남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아내의 곁에 항상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 저도 충분히 자격이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여보가 망가져 있던 제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준 것처럼 저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저, 믿어주세요. 그러니까, 괜히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고 조금만이라도 풀어가면서 저랑 이야기를 나누면.... "
" 아 씨발 진짜 아까부터 내가 됐다고 말하는데 자꾸 말꼬리 늘리고 지랄이네! 진짜 봊나 짜증 나게! "
그 순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녀는 손을 세차게 뿌리치면서 그를 바라보면서 살기가 등등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 야, 몇 번 말을 해야 해?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누가 씨발 도와달래? 도와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존나 오지랖 넓게 왜 나서고 지랄이냐고! "
" ... "
" 그리고 봊도 아무 일도 아니야. 네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혼자 착각 속에 빠져서 김칫국 처마시고 성부 마리아처럼 행동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좀 짜져있어. "
서서히 아래로 숙여지는 그의 고개.
" 야, 그리고 까고 말해서 나한테 고민이 있다고 쳐. 그리고 그 고민을 너한테 말했다고 쳐. 네가 뭐 어떻게 할 건데? 예전에 나처럼 너한테 막 돈을 대줄 수가 있어? 뭘 해줄 수가 있어? 아, 하나 있네. 몸 대주는 건 할 수 있겠네. "
" 그, 그런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면 서로 위로도 할 수 있고... "
" 봊도 도움 되겠다. 와 진짜 씨발 봉사 정신에 감탄을 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네. 씨발, 애초에 몸 대주는 거 빼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뭘 자꾸 나누자니 뭘 하자느니 왜 그런 지랄염병을 떨고 있냐고? 그냥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면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기나 해! "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의 기다란 부분을 붙잡고서 여차하면 그의 머리를 내리쳐버릴 듯이 팔을 뒤로 쭉 빼고 소주병을 높이 치켜올리자 그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혹여라도 맞을세라 곧바로 온몸에 감도는 공포감에 마치 바닥에 꽂아버릴 듯이 그는 머리를 저 아래 끝까지 숙였다.
" 죄, 죄송해요. 여보.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요. "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마음을 담아 아내를 도와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었는데, 어째서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은 몰라주고.....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올릴 것 같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볼을 타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겨우 멈추고서는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다잡기 시작했다.
' 아니야. 아내 말이 전부 맞아. 이건 전부 다 내가 잘못한 거야. '
그는 마음속에서 새어 나오는 섭섭함과 울적함을 떼어내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이건 아내의 잘못이 아니라 오로지 나라는 사람이 문제였다.
괜히 되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려서 괜히 아내의 기분만 더 상하게 만들어버렸다. 하긴, 아내한테 빌붙어서 사는 기생충 주제에 감히 누굴 위로한다느니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느니. 웃기네.
그래, 내 잘못이야.
" 하, 제발 남을 돕느니 공감해주니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제발 네 주제부터 파악해. 애초에 나 없으면 봊도 안되는 새끼가 누굴 돕느니 공감하겠느니 염병을 떨고 씨발. 에휴. 안 그래도 봊같던 기분 너 때문에 더 씨발 씹창이 났…. "
따르릉ㅡ
그 순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그녀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에 나를 향하던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핸드폰으로 옮겨졌다.
" ... "
알람은 아닌 것 같았고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를 보니 전화가 온 것이 확실했는데 전화라는 것이 확인되자마자 아내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 쯧. 너 나 전화 받고 올 거니까 방에 들어오지 말고 얌전히 앉아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알았어? "
" 네. "
" 흠흠, 아 씨발, 전화해서 또 무슨 봊같은 소리를 하려고.... 아, 네 사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
잠시 나를 흘끗 흘겨본 아내는 혀를 차고서 경고의 말을 날려준 다음 곧바로 헛기침을 해 목을 풀어주고서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 안방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예의가 갖춰진 아내의 목소리.
항상 크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던 아내가 저런 식으로 전화를 받는 것으로 보아하니 분명 중요한 전화가 확실해 보였다.
당연히, 그녀의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된 일일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사소한 행동이 혹여라도 민폐를 끼치지 않을까 생각하며 핸드폰을 만지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아내가 방 안에서 나올 때까지 허공을 계속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의 집중을 깨우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원래 저희와 계약이 되어있었잖아요. 사장님! "
분명 아내가 격양된 감정으로 안방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였다.
어찌나 컸는지 꼭 닫은 문밖으로 전화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였고 그러한 현상에 저절로 나의 귀가 쫑긋 세워져 닫힌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이게 뭐가 불평입니까? 사장님! 그쪽도 아시잖아요. 이런 건 비즈니스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 건 길드를 경영하고 있으신 사장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닙니까! "
무슨 일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차라리 백번 양보해서 변경이 되고 취소가 되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어떻게든 용납한다고 쳐도, 아무런 말도 없이 단 일의 언질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계약이랑 관계를 모조리 끊어버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 사장님.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사장님 입장에서는 대충 헌터들 변경만 하고 몇 푼 던져주면 끝날 문제시겠지만 저희는 절대로 아닙니다. 사장님이 여기서 취소해버리시면 저도 포함해서 여기저기서 끌고 온 사람들 모조리 당분간 아예 나가리 되는거라고요. 처지 좀 이해해 주십시오. "
생전 처음 듣는 아내의 간절한 목소리. 마치, 내가 아내한테 잘못을 비는 그 순간처럼 아내의 목소리에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내가 처한 상황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 사장님. 이게 지금 화가 안 날 상황입니까!?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사장님이 지금 제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화가 안 날 것 같으세요! 아니, 그러니까 이건 돈을 돌려주겠다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거 솔직히 개 씨발 얼마 된다고! 그거 가지고는 입에 풀칠도 못 하는... 야, 여보세요? 야! 야 인마! 이 씨발아! 이런 씨발 봊같은 개새끼를 봤나! "
심각하다는 것을.
아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듣지 않고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걸까?
쾅ㅡ
아내의 욕설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안방에서 세세하게 울려 퍼져 집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분명, 화를 참지 못한 아내가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려 액정이 깨져버린 게 확실해 보였다.
뒤이어 이어지는 안방에서 들리는 여러 요란한 소리에 나는 그저 두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