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35화 (35/77)

〈 35화 〉 만남

* * *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파에 앉아서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여성.

방금까지 운동을 해 땀을 번들번들 흘리며 건강미를 물씬 풍기던 것과는 다르게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깔끔했으며 또한 성숙미가 저절로 흘러넘쳐 내렸다.

" 흠. "

부끄러움과 부담스러움으로 인해 빤히 쳐다보지는 못하고 흘끔흘끔 눈길을 주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그녀는 혹여나 티셔츠가 흘러내려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가슴이 다시 보일까 봐 목 부근을 손으로 꽉 눌러 잡고서는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와 고개를 숙여 사과를 표시했다.

" 정말, 초면에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실례했습니다. 진짜로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

" 아, 괘, 괜찮아요. 모, 못볼꼴은 아니에요. 충분히 몸이 좋으시던데 그 정도면 자랑하고 다니셔도 되는걸요. "

사실 처음 그녀가 계단을 내려온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시선은 머물러 있었기에 어렴풋이 그녀의 모습은 아직 머릿속 깊은 곳에 단단히 각인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단 몇 초 동안만 눈에 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땀에 젖어 근육이 잔뜩 새겨져 있는 그녀의 몸은 강렬했으며, 또한 여성의 반나체 상태를 본 것은 아내 이후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서 머릿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저는 보잘 것 없는 몸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을 또 그렇게 예쁘게 포장해서 해주시니까 정말 감사하네요. 아이고, 이게 변명을 조금 하자면 저는 당연히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참,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제가 팬티만 입고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

" 그, 그러실수 있어요. 충분히 이해하고 또, 괜찮으니까 저한테 너무 미안함을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

또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시선과 고개.

자신의 사과를 받으면서도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시선에 그녀는 혹여나 자신이 무의식중에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나? 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던 그녀의 상념을 깨우는 한 마디.

" 내가, 진짜 누나 때문에 이제 형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녀야 할까? 진짜, 창피하다. 창피해. "

진심으로 혐오가 가득한 경섭 씨의 냉기 넘치는 목소리에 환한 미소와 함께 친절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던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아, 옆에서 진짜 쫑알쫑알 말 더럽게 많네. 지금 분위기 아주 좋게 풀어가고 있고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자꾸 옆에서 초를 치고 지랄이야? 진짜 뒤지게 맞고 싶어? "

" 네가 진짜 사람 새끼냐? 내가 집에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손님이랑 왔는데 어떻게 팬티만 입고 계단에서 내려올 수가 있어! 넌 기본적으로 사람을 맞이할 때의 예의를 모르는 거야? 어떻게 그런 정신머리로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거지? "

" 야 이 거지 같은 놈아! 내가 방안에 박혀서 운동만 하고 있는데 손님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어떻게 구분해? 네가 애초에 맨 처음부터 손님이랑 같이 집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게 예의라고! 전화 정도는 해줬어야지. 아니면 카톡이라도 하던가. "

" 봊까! 넌 헌터라는 사람이 내가 누구랑 같이 들어왔는지도 모르냐!?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몇백 미터 밖에서 어떤 괴물이 다가오는지 전부 다 감지하는 새끼가 내가 누구랑 집에 들어왔는지 구분하지 못했다고!? 지랄하고 있네! 넌 그냥 단지 네 몸을 이리저리 광고하고 싶은 거잖아. 이 개 봊같은 노출증 새끼야! "

" 아니, 근데 이 쌍놈이 아까부터 누나한테 말하는 말버릇이 아주 씹창이 났네? 네 대가리를 오늘 내 방에 있는 창으로 꿰뚫어줄까? 내가 너 특별히 대형 몬스터한테 쓰는 스킬로 써줄게. 일격 필살이라고 들어봤어? "

" 와, 진짜 존나 무섭다. 그래, 써봐. 아, 자신 있으면 한 번 써서 내 대가리에 고속도로 시원하게 한 번 내줘봐. 할 수 있으면 해! 진짜로 행동에 옮기지도 못할 거면서 가오는 무슨, 풋. "

" 말하는 꼬락서니 진짜 씨발. 야, 너 얘기하다 말고 또 어디가!? "

" 주방 잠깐 갔다 올 거니까 거기 앉아서 앞에 앉아있는 형 기분이나 풀어주고 있어. 이 아다 새끼야. 나 금방 돌아오니까 혹시라도 형한테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라? "

" 뭔, 미친 소리야 그건. 내가 무슨 개수작을 부려!? 날 무슨 성욕에 찌든 미친년으로 보고 있네? "

혀를 내밀면서 갑자기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달려가며 사람의 약을 제대로 올리는 경섭의 행동에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인지 헛웃음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 아, 저 새끼 때문에 진짜 돌아버리겠네. 저거 진짜 남동생이 아니라 여동생이었으면 죽도록 때려 패서라도 정신머리를 고쳐놓는 건데 남자라서 그럴 수도 없고. "

시선은 경섭 씨가 달려간 주방으로 고정하고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의 어조에는 살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 경섭이가 학교에서도 저렇게 행동하나요? 그러면 문제가 있는 건데. 저렇게 행동하다가 괜히 나댄다고 사람들한테 안 좋은 인상 박혀서 왕따당할까 봐 걱정이 드는데 학교생활은 어떻게 하는가요? "

" 아, 아니에요. 왕따라니요! 경섭 씨 학교에서 인기가 엄청 많아요! 잘생기고 또 성격도 좋고 밝고 쾌활하니까 친구도 엄청나게 많아서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세요. "

경섭이가 왕따면 나는 저 지하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닐까? 아니지, 오히려 지하 아래인 나락에 존재하는 사람일 거야.

" 신기하네요.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고 보통 쾌활하고 밝다고 말하다니, 제가 볼 때는 그냥 지랄병 떠는 고릴라 오크 새끼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진짜 기회만 있으면 언젠간 날 잡고 개 패듯이 패고 싶거든요. "

" ... "

" 그리고, 쟤가 자꾸 잘생겼다고 주위에서 뭐라고 막말하는데, 솔직히 저는 매일 붙어서 생활을 하니까 그런 걸 잘 느끼지는 못하거든요. 까고 말해서 저런 얼굴보다는 오히려 제 앞에 계신 그쪽이 경섭이보다 훨씬 배로 잘생겨 보이거든요. "

" ㄴ, 네? 아, 아니에요. 저, 저같은게 무슨 경섭 씨 보다... "

" 하하하, 되게 겸손하신 분이네요. 물론 누나로서 보는 시선은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러면 그쪽은 경섭이랑 언제부터 친구 사이를 가지게 되신 거에요? 제가, 창우나 다른 친구들은 많이 만나 봤는데 그쪽은 제가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 "

" 대학교 친구예요. 보, 보시다시피 제가 좀 낯을 가리고 조용한 성격인데 경섭 씨랑 창우 씨가 먼저 다가와 줘서 치, 친구가 되었어요. "

" 아! 대학교 친구시구나. 오, 경섭이의 대학교 친구라면 제가 알기론 얼마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

" 네? "

" 경섭이가 평소에 말했던 걸 기억해보면 대학교에서 같이 어울려 다니는 사람은 창우랑 그, 누구였지? 그 결혼했다고 말했는데, 아! 유진이라고 했던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 사람이랑 밖에 안 다닌다고 말했는데. "

이게 무슨 소리지?

잠깐만, 정리하자면 일단 이분은 내가 그 오유진이라는 걸 모르시는 것 같은데?

" 유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섭이가 집에서 매일매일 저한테 이야기를 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되더라고요. "

확실하네. 모르는 게 맞으시네. 하긴,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게 더 신기한 게 아닐까?

나랑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방금 서로 얼굴을 처음 본 사인데 단순히 경섭 씨가 이야기한 것만 듣고 내가 누군지 알아 맞춰버리면 그건 백 퍼센트 무당이니까.

" 제가 알기론 경섭이가 실질적으로 같이 다니는 대학교 친구가 그렇게 두 사람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쪽은 경섭이가 새로 사귄 친구인가 봐요? "

" 아.... "

"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마, 경섭이가 저한테 말을 한 번 했는데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 그런데 이렇게 단아하시고 우아한 사람을 제가 이 머릿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기억에서 잊을 리는 없는데.... "

" 하하... "

이분한테 나는 단아하고 우아한 사람처럼 보이나 보네.

저절로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그려졌다. 솔직히, 기분이 좋아졌다.

남성으로서 이성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는데 기분을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저런 소리를 처음 보는 여성분이 아니라 아내가 해주었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작은 소망이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그러한 말을 자주 해주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 뭐,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이름만 말해주시면 제가 바로 기억이 날 수도 있어요. 애초에, 이것도 인연이고 경섭이 친구분이면 저랑 자주 마주치실 텐데 이름을 서로 알아두면 부르기도 편하고 또 좋으니까, 겸사겸사해서. "

그나저나, 이분은 여태까지 계속 말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나인 걸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이실까?

궁금함을 한가득 안은 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서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그녀에게 당당히 밝혔다.

" 오유진이라고 합니다. "

" 네? "

순간 " 그게 무슨 개소리야? " 라는 말을 얼굴로 나타내는 것처럼 표정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다시 나에게 되물었지만 내가 들려줄 대답은 아까와 똑같을 뿐이었다.

" 모, 못들으셨나요? 저 오…. 유진이라고 하는데... "

순간 이어진 약간의 침묵.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제일 먼저 운을 띄운 것은 그녀였다.

" ....아, 그 설마 그쪽이.... "

고장 난 반응. 마치, 물에 한 번 빠져버려 잔뜩 젖어버린 로봇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 경섭이가 말한 대로 결혼도 하셨고 경섭이보다 나이도 1살 더 많으신 분에다가 제가 여태까지 계속 말씀하신 그분이 맞으신 건가요? "

" 네. 결혼도 했고 경섭 씨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것도 맞아요. 그리고 누나분께서 아까부터 계속 언급했던 사람도 제가 맞는데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제가 오유진인걸 모르고 계셨네요.... "

" ......그럼 씨발 제가 지금까지 계속 아내가 있으신 남성분한테 우아하다니 기품이 넘치다니 내 스타일이라더니 라면서 추파를 던지고 첫 만남에 팬티만 입은 채로 맨몸을 보여준 거네요? "

" 매, 맨몸을 보여주신 건 맞는데 추파를 던진 건 아닌 것 같아요. 추파라고 하기에는 그냥 단순한 칭찬이셨고 저도 딱히 무섭거나 부, 불쾌하지는 않았어요. 기분도 좋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어뜯으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뿐.

" 오, 이런 씨발. 하느님. "

자괴감.

후회.

절망.

어이없음.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한데 뒤섞인 욕설이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 *

트렁크에 잔뜩 소고기가 실려 있는 세단에 올라타기 전 경섭 씨와 경섭 씨의 누나분은 나를 배웅해주기 위해 대문 앞까지 친히 나와 준 상태였다.

" 너무 많이 챙겨주신 거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챙겨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

소를 한 마리 전체 나에게 준 것처럼 그 양이 어마무시해 트렁크가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 에이, 뭘 이런 것 가지고 그래요? 제가 형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꽉꽉 눌러 담았고 또, 집까지 기사님이 대신 들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형 아내분이랑 맛있게 요리해서 드시면 돼요. "

솔직히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 같아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경섭 씨는 상관 쓰지 말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 그런데, 형. "

" 네? "

"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누나가 존나 똥 마려운 사람처럼 혼자서 진지 빨고 개 정색한 채로 벌써 한 십 분째 저러고 있는데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

고개를 살짝 돌리자 마치 생각하는 사람 동상처럼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는 나와 눈빛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 아마도 그거일 텐데. '

내가 오유진이라는 것을 커밍아웃 하고 그것에 대해 알아챈 그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 저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여러 이야기를 재밌게 늘어놓던 사람이 맞는 걸까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한순간에 말이 없어졌으며 또한 나와 시선을 최대한 교환하지 않으려 굉장히 애를 쓰며 마치 죄인처럼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죄책감 때문인 것 같은데, 물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앞선 행동에서 그녀의 행동에 나는 불쾌감을 느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었다.

아마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본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뭐, 이런 게 아닐까?

아무튼,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던 경섭 씨는 당연히 자신의 누나가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게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나분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경섭 씨에게 왠지 이걸 말했다가는 저 누나분의 처지가 굉장히 곤란해질 것 같아서 차마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 글쎄요? 잠시 생각하실 게 있는 거 아닐까요? 일이라던가, 아니면 개인적인 사정이라던가. "

그래서 난 싱긋 웃으며 최대한 정석적인 대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 그런가요? 하긴, 본인도 본인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냥 놔두는 게 좋겠죠? 그럼, 형 말대로 할게요. "

" 후훗. "

" 오늘, 제 고집대로 저희 집에 들러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정말 귀찮으셨을 텐데. "

" 아니에요. 차를 타고 왔는데 귀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오히려 저런 비싼 것들을 일부러 저한테 많이 챙겨주셔서 제가 더 고마운걸요? "

" 에이, 비싸긴 뭘 비싸요? 사실, 저도 선물 받은 거라서 가격이 얼만지도 잘 몰라요. 아무튼, 집에 조심히 들어가시고 아내분이랑 맛있게 나눠 드세요. 그리고, 다음에 학교에서 만나서 후기 들려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

쾅 하며 고급 세단의 두꺼운 문이 닫혔다.

눈동자를 살짝 돌리자 손을 흔들고 있는 경섭 씨와 저 멀리서 고개를 살짝 숙여주는 경섭 씨의 누나분이 짙은 선팅으로 이루어진 리무진 창문 밖으로 보였고, 알아볼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면서 그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해주었다.

"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

딱딱하고 사무적인 운전 기사님의 통보 후 곧바로 출발하는 자동차가 빠르게 골목길을 빠져나가 도로를 타고 내가 사는 동네로 쌩쌩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늘 보던 나무, 늘 보던 도로, 늘 보던 빌딩들.

지하철을 타러 갈 때와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갈 때 매일 보던 것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받아들여지는 느낌 자체가 평소와는 굉장히 색달랐다.

그냥 이걸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까? 답답하면서도 먹먹하다고 해야 할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창문 밖으로 계속 시선만을 둘 뿐.

* * *

소고기가 잔뜩 들어 있는 무거운 마지막 자루가 문 앞에 놓이고 난 곧바로 여태까지 고생을 해주신 운전 기사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태워주시고 또, 짐까지 손수 옮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운전도 해주고, 짐도 손수 옮겨주면서 싫은 말 한 번 내뱉지 않는 그녀는 정말 프로에 가까웠다.

" 아닙니다. 이게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무거우실 텐데 집안까지 제가 옮겨드릴까요? "

" 아니요. 집안까지 옮기는 건 제가 하도록 할게요. 여기까지 해주셨는데 그것까지 바라는 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어 보여서. "

"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 또 방문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제가 자택까지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

가볍게 묵례를 한 후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으며 다시 차를 타고 빠르게 동네를 빠져나갔다.

저 멀리 사라지는 고급세단은 이곳의 동네 풍경과는 정말 너무나도 멀리 동떨어져 있었으며 그 모습에 그의 얼굴은 아주 살짝, 미세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온 그는 이제 집안으로 이 거대한 소고기 자루들을 옮기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리고서는 자루의 끝부분을 세게 붙잡았다.

' 무겁네. '

무거웠다.

예상보다 더욱더 무거운 무게에 그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어깨에 들쳐메고 갈 계획을 바닥에 놓고 자루를 놓고서 질질 끌고 가는 계획으로 수정했다.

이럴 때 집에 아내가 있었다면 부탁을 해 도움을 조금 받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간에 아내가 집에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아내는 항상 일찍 끝나는 시각엔 항상 나에게 카톡을 먼저 보내준다.

애정이 넘치는 카톡이라기보다는 본인이 일찍 마쳤으니 딴생각 하지 말고 곧바로 집에 돌아와서 저녁밥을 만들라는 카톡이었지만 뭐, 그것도 내가 걱정돼서 아내 나름대로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일찍 마쳤으면 당연히 알림이 울렸어야 할 나의 핸드폰에 아내의 카톡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 집에 아내가 없다는 것을 뜻하므로 그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그렇다면 아까, 운전 기사님이 도와준다고 했을 때 얌전히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여태까지 도움을 주셨는데 그것까지 부탁하기에는 내 마음 안에 살아 숨 쉬는 양심이 도저히 허락을 내려주지 않았으니까.

' 뭐, 어쩔 수 없지. 몸을 조금만 고생시키자. '

혹여나 놓칠세라 더욱더 손에 힘을 꽉 주고서 곧바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황급히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치고서 고정핀을 내려 혹여나 문이 닫혀버리지 않게 막아주도록 바닥에 단단히 문을 고정시켰다.

그 후 뒤이어 바닥에 자루를 완전히 대고 질질 끌어가면서 집안으로 서서히 들어가면서 몸을 틀어 주방으로 끌고 가던 그 순간 나의 눈 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에 자루를 옮기던 나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 .....어? "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여성의 실루엣.

순간 처음에는 혹여나 도둑이 아닌가 착각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눈동자에 들어온 여성의 실루엣은 다름 아닌 아내의 얼굴이었다.

" 여보? "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와버리자 저절로 그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분명 지금 이 시각에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아내인데 왜 어째서 나보다 더 빨리 집에 도착을 할 수 있던 거지?

" 여보. 왜 이 시간에 집에 계시는 거예요? "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곧바로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을 하기 위해서 그는 잡고 있던 자루를 놓고서 황급히 아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핸드폰을 한 손에 꽉 잡은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아내는 마치 마네킹처럼 차가웠으며 딱딱했고 또한 무서운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왜 지금 집에 계신 거지? '

일단 오늘 아침에 같이 집 밖을 나섰으니까 휴무는 절대 아닌데, 그러면 일이 일찍 끝나버린 건가?

' 아니야. '

이것도 솔직하게 말이 안되는 게 일이 일찍 끝났으면 무조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아내는 나한테 카톡을 보내는데 오늘은 아까 확인했듯이 카톡이 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설령 백번 양보해서 보내는 걸 깜빡했다고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찍 퇴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 집에 일찍 돌아갈 수 있어서 기쁘고 감격에 찬 표정을 짓지 않겠는가? 그것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혹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공감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도저히 일찍 퇴근해 집으로 빨리 돌아올 수 있어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안 좋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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