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만남
* * *
작은 틈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꽉 채워져 있던 오후수업이 모조리 마치자 여태까지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 하암, 피곤해. "
아마, 침대에 누우면 그대로 잘 수 있을 정도로 눈꺼풀은 계속 감겨 왔지만, 그는 애써 감기는 눈을 최대한 참아가며 교재와 유입물, 그리고 필기구를 정리하여 가방 안에 넣으며 집에 갈 준비를 마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집에 돌아가서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으니까 여기서 주저앉을 시간은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제 몸을 생각하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그 순간, 불쑥 내 옆으로 사람의 인영이 들어왔다.
" 형,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고 따로 약속 같은 거 있어요? "
시간이 흘러 술기운이 완벽하게 떨쳐낸 경섭은 맑은 눈동자를 잔뜩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 약속이라니요? "
" 말 그대로예요. 혹시, 학교 끝나고 따로 선약 같은 거 잡혀 있어요? 어디를 놀러 간다거나 친구들이랑 카페를 간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
" 아, 아니요. 유부남이 약속은 무슨 약속이에요. 그런 게 있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거죠. "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경섭 씨와 창우 씨를 제외하면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종잇장처럼 얇디얇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내가 약속은 무슨 약속이 있겠는가.
애초에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귀가해 집에서 빨래를 하고 물걸레와 청소기를 돌리고 아내를 위한 저녁밥을 만들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친구들과 카페? 친구들과 여행? 혹은 가족들과 여행?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들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그야말로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뜬구름을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개소리일 뿐이다.
" 진짜 없어요? 그럼 오늘 마치고 따로 어디 가시는 게 아니라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
" 그래야죠. 돌아가서 늘 하던 것처럼 빨래하고 청소기랑 물걸레로 방 청소도 싹 하고 집에 가서 냉장고 안의 상태도 한 번 보고 너무 먹을 게 없으면 시장에 갔다 오고 아직 충분하다 싶으면 곧바로 저녁밥 만들고 해야죠. "
" 와, 진짜 난 빨래고 청소고 요리고 나발이고 그런 것들은 이야기만 들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하기 싫어지던데. 매일 매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신다니까 진짜 대단하네요. "
" 하하, 뭘요. 사실 이건, 누구한테 칭찬을 받거나 감탄 받을만한 일은 절대로 아니에요. 남성으로서, 한 집안의 남편으로서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인걸요. "
집안일이 재밌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솔직히, 나도 매일 빨래와 청소 그리고 저녁밥을 만들면서 단 한 번도 즐겁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꿋꿋이 묵묵하게 할 뿐.
" 와, 진짜 현세에 강림한 성부 마리아의 환생이 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백 퍼센트 형일 것 같아요. 종교 한 번 만들어볼 생각 없어요? 평소 행실만 보여줘도 신도들이 알아서 쫙쫙 모일 것 같은데. "
" 네? 아하하, 조, 종교라니요. 제가 그, 그정도는 아닌데. 저는 정말로 제가 있는 위치에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하고 있을 뿐인걸요. "
" 에이, 알죠. 그냥 장난으로 말해본 거예요. "
" 하하, 아, 그나저나 저한테 야, 약속이 있는지는 왜 물으신 거에요? "
" 아, 맞다! 얘기 하다 보니까 다른 길로 새버려서 본론을 까먹고 있었네. 흠흠, 형 뭐, 이야기 들어보니까 학교 마치고 딱히 큰 약속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지금 집으로 바로 가지 마시고 잠깐만 시간 내셔서 저랑 같이 우리 집에 들르시지 않을래요? "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면서도 굉장히 뜬금없는 제안에 저절로 그의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 가, 갑자기요? "
" 아, 조금 갑작스럽긴 하죠? 사실, 어제 모임에서 술 한잔 하면서 넌지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제가 취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못 했거든요. "
"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경섭 씨 집에 왜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
" 뭐, 큰 이유는 아니고 그냥 제가 드릴 게 있어서 그래요. "
" 저한테요? "
" 네. 막 엄청나게 비싸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먹을 건데 제가 지금 보여드릴게요. "
곧바로 품속에서 꺼낸 그는 몇 번 화면을 두드리더니 곧바로 갤러리를 띄워 그 사진을 유진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핸드폰 화면에서는 새빨간 자태를 뽐내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고기 비치고 있었고,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질 만한 광경에 악물어지어 있던 그의 입은 천천히 벌려지기 시작했다.
" 그냥 소 몇 마리를 통째로 썰어놓은 것 같죠? 저희가 얼마 전에 아는 지인들한테 질이 좋은 소고기를 잔뜩 받았는데 받고 현실을 딱 직시해보니까 양이 너무 많더라고요. "
" 사진으로만 봐도 엄청나게 많아 보이는데 직접 보면 더 많아 보일 것 같아요. 이걸 다 먹으려면 한 삼 개월은 꼬박 먹어야 할 것 같은데. "
" 형 말이 백번 맞아요. 일단 소고기는 더럽게 많은데 실질적으로 집에 머무는 사람은 나랑 친누나뿐이고, 이렇게 되면 몇 개월 정도는 꼼짝없이 삼시 세끼 소고기만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요즘 제가 이리저리 주위에 나눠주고 있거든요? "
" 정말요? "
"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거면 나눠주면 생색도 낼 수 있고 좋은 일도 하는 거니까요. 아무튼, 소고기를 일단 주위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있는데 형도 혹시 받아 가실 생각이 있는지.... "
" 다, 당연히 받아야죠! 다른 것도 아니고 품질 좋은 소고기를 언제 무료로 받아보겠어요. 무, 무슨일이 있더라도 받아야죠! "
마치 무료 봉사와도 같은 이 좋은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도대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반찬값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매일매일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고민을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경섭 씨의 제안은 정말 하늘에서 내린 기회나 다름없었다.
소고기라니.
일반적인 돼지고기도 아니고 경섭 씨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최소 특등품 이상의 품질을 가지고 있는 소고기가 분명했으며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마자 벌써 입가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 분명 좋아하겠지. '
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우리 아내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 선물을 받아 가면 아내가 무조건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내에게 고기라는 것은 없어서 못 먹는 정말 말 그대로 귀한 음식 그 자체였으니까.
벌써 선물 받은 부위들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아내에게 대접을 하고 그걸 본 아내가 진심을 담아 좋아해 줄 것을 생각하니까 저절로 입꼬리와 기분이 들떠 올라갔으며 얼굴에는 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헤헤. "
" 역시 형을 미소짓게 만드는 거 보니까 고기의 힘은 위대하네요. 제가 형한테 어젯밤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가정부 아저씨한테 말해서 형은 특별히 더 꽉꽉 눌러서 담아드릴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알겠죠? "
" 네! "
" 좋아요. 그럼 지금 가방 챙기시고 곧바로 출발할게요. "
강의실을 나가는 유진의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 * *
알고 있었다.
창우 씨에게도 들었고 본인이 어렴풋이 이야기하는 것을 조합해서 절대로 가난하지는 않고 경섭 씨의 집안이 재정적으로는 여유가 넘치는 부자인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친누나라는 사람이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고 경섭 씨는 등교를 할 때 가끔 운전기사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등교를 하는데 그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러니까, 난 그저 경섭 씨의 집안이 부자긴 부자인데 그렇다고 해서 억 소리 나게 놀랄 정도로 부자는 아닌, 즉, 동네에 한 명씩은 있는 부유한 집안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 머릿속에 정해놓은 그 개념 자체를 박살 내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광경이었다.
" ... "
" 들어와요. 형. "
덜덜 떨리는 다리를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자 펼쳐지는 드넓은 마당. 그리고 그사이를 장식하는 대리석 모양의 아름다운 예술품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이러한 집이 존재했던가? 난 TV나 영화 속 그리고 심지어 인터넷에서도 이러한 집은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비슷한 걸 찾으라고 한다면 게임에서나 몇 번 구경을 해본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경섭 씨의 집은 내가 머릿속에서 정해놓은 개념 자체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정말 거대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 흠흠. "
걷고 계속 또 걷다 보니 대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 집안의 현관문을 가볍게 연 그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 편안하게 들어와도 돼요. "
" 시, 실례합니다. "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 바닥과 현대적인 양식이 인상적인 화려하고 절제된 인테리어에 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화려한 무늬가 인상적인 커피잔들은 예술에 식견이 없는 내가 보아도 정말 비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이 커피잔에 얼룩이라도 묻히는 순간 난 평생 삼시 세끼 라면만 먹고 지내며 그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으며 목 뒤로는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경섭은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잔뜩 넋을 놓고 있는 유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 안쪽에 들어와서 앉아계셔도 되고 그게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셔도 되는데 저는 안쪽에 들어와서 앉아있는걸 추천해 드릴게요. "
" 아, 아니에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여기 있게 해주세요. "
나는 그의 제안을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 네? 계속 서 있으시면 다리 아프시지 않겠어요? 고기 가져오는데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고 해도 그때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앉아서 대기하시면 될 텐데. "
" 아니에요. 서 있게 해주세요. 무조건 서 있게 해주세요. "
" 그래요...? 그게 편하시다면 뭐, 어쩔 수 없네요. 일단, 바로 준비는 해드릴 건데 양이 너무 많고 무게가 많이 나가서 형 혼자서 들고 집에 돌아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거든요. "
" 아, 그런가요? 그러면 양을 좀 줄이면 괜찮을까요? "
" 에이, 째째하게 양을 줄이면 어떡해요? 제가 특별히 형한테는 사람 다 시켜놓을 테니까 형은 그냥 부담 갖지 마시고 어떤 부위를 원하는지 아니면 어떤 게 더 좋은지 선택만 해주시면 돼요. 뭐로 드리는 게 좋을까요?"
" 그, 그냥 주, 주는 대로 받을게요. 뭐를 주시던지 전부 다 알뜰하고 효율적으로 쓸 자신이 있어서 어떻게 주셔도 상관없어요. "
받는 사람 입장에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선택까지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모습 같으므로 난 경섭 씨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실, 정말로 어느 부위를 가져다주든지 간에 상관이 없었다. 어떤 부위를 가져다주든 간에 난 그것을 맛있게 요리를 할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빨리 고기를 받고 얼른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 같은 미꾸라지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깨끗한 강물을 흐리게 만드는 것처럼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것 같다고 느껴졌으니까.
" 그래요? 흠, 그럼 제가 주방 안쪽으로 가서 고기 가져와 달라고 말할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곧바로 제가 달려올 테니까 그때 동안 주위 좀 둘러보고 계시면 ㄷ... "
야!ㅡ
그 순간 계단을 타고 위층에서 들리는 여성의 괴성에 나와 경섭 씨의 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굉장히 큰 분노에 차 있는 목소리였는데 이거 지금 괜찮은 건가?
그러나, 약간 겁에 질려있는 유진의 얼굴과는 다르게 경섭의 얼굴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 섞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변해갔으며 곧바로 그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곧바로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 뭐! "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너 진짜 뒤질래?ㅡ
" 네가 먼저 소리 질렀잖아. 병신아! 네가 먼저 해놓고 왜 나는 안된다는 건데!? 내로남불 개 역겹네! "
네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그러지 멍청아! 야, 됐고 너 지금 당장 계단 타고 나한테 튀어 올라오기나 해!ㅡ
" 봊까! 싫어! 안가! 내가 거길 왜 가? 가봤자 딱 봐도 심부름시킬게 뻔한데 미쳤다고 거기에 가겠냐? 지금 시각을 보니까 딱 봐도 운동하고 있을 시각인데 내가 지금 거기로 가면 나보고 단백질 셰이크 가져오라고 시킬 거잖아? "
잘 알고 있네. 알고 있으면 얼른 흔들어서 가져오기나 해! 세 통씩 섞어서 가져오는 거 알지? 골고루 섞어서 가져와라! 가져왔는데 가루 둥둥 떠다니면 나한테 뒤져!ㅡ
" 봊까! 절대로 안 가! 꼬우면 네가 내려와서 알아서 처먹어! 애초에 가져갈 일이 없는데 뭘 골고루 섞어서 가져와라야! 엿이나 처먹어! "
신개념 대화법인가?
메아리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내 눈동자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갔다.
여성의 목소리라서 분명 창우 씨랑 대화를 하는 게 아닌 건 확실한 사실인데 그럼 도대체 누구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 아, 진짜 손님 있는데 쪽팔리게 뭐 하는 거야. 이럴 땐 진짜 누나가 아니라 원수라니까. "
아, 그렇네. 친누나분이 있으셨네.
" 형, 미안해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면 안 되는 건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돼버리네요. "
" 아니에요. 원래 남매 사이는 다 그런 거잖아요? "
" 하긴, 뭐 그렇죠. 그런데 그놈의 단백질 셰이크는 제발 운동하러 이 층에 올라갈 때 챙겨서 갈 생각은 안 하고 매일매일 나한테 시키고 지랄이야. 아니, 내가 무슨 단백질 셰이크 배달 기사도 아니고. "
" 하하... 누나분이 운동을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단백질 셰이크를 한 통도 아니고 세 통이나 가져다 달라는 걸 보면 단순히 취미로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
보통은 한 통 다 먹기도 버거운 게 단백질 셰이크인데 그걸 세 통을 먹는다고? 트레이너들도 그 정도는 안 먹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 취미는 아니에요. 뭐라고 해야 되지? 누나한테는 운동이라는 게 인생의 일부? 수련? 그게 아니면 생존? 뭐라고 단정 짓기가 좀 어렵네요. 아무튼, 누나한테 운동이란 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고 빠져 먹는 날 없이 하루에 매일매일 5시간씩 할애를 한다는 거죠. "
" 그만큼 운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네요. "
" 뭐, 그렇죠. 사실 중요하게 여기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지만.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가 곧바로 주방에 가서 가정부 아저씨한테 부탁드릴 테니까 형은 그때 동안 편한 데서 기다리고 계시면 될 것 ㄱ… ."
쿵ㅡ
그 순간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나와 경섭 씨의 시선이 저절로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집중되었다.
무언가 오고 있었다. 짐승? 아니지, 이건 짐승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개가 느껴졌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만화 속에서 세계관 최강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바로 이런 기운을 풍기는 게 아닐까? 어림짐작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서서히 우리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은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동시에 계단을 향해 집중되어있는 시선 또한 거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서서히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의 인영은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 소리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무언가 굉장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길고 쭉 뻗어있는 다리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검은 망사로 장식되어있는 팬티와 함께 방금까지 격렬한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땀으로 가득 차 있는 상체까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갈색의 긴 생머리를 고무줄로 한데 묶은 여성은 팬티만 걸친 반나체 상태로 목에 걸친 수건으로 이마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땀을 닦아주며 경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바로 경악에 가득 차 일그러지는 경섭의 얼굴을 마주 본 여성은 괘씸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서는 온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 단백질 가져오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누나가 부탁하는 것 좀 가져오는 게 그렇게 힘드냐!? "
" 옷 입어 이 미친 개또라이년아!!!!!!!!! "
유진은 홍당무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