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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33화 (33/77)

〈 33화 〉 만남

* * *

"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고 반건조 오징어처럼 늘어지는 경섭은 마치 복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입 밖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당연하게도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진은 다음 교시에 쓸 교재들을 가방에서 꺼내면서 태연하게 그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틀어나갔다.

" 왜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고 그러세요? "

" 술이 아직 덜 깨서 그래요. 아, 진짜 속이 너무 쓰려서 죽을 것 같아요. 형. "

창백한 얼굴을 띈 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마음 충분히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오장육부가 느끼하고 뒤틀리고 똬리로 꼬아진 느낌은 정말, 다시는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지.

" 그러게, 저랑 같이 등교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가 아침에 해장하라고 콩나물국도 시원하게 끓이려고 했는데. "

어젯밤, 경섭 씨와 창우 씨를 집에서 재운 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쾌락만을 위한 아내와의 질펀한 섹스가 끝나고 내가 가운을 걸치고 오늘 아침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분명 이부자리가 깔려 있어야 할 거실 바닥이 깨끗하게 정리된 후였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는가? 분명 있어야 할 사람들이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는데 당황을 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다급히 전화를 돌려보니 새벽에 잠에서 깬 경섭 씨가 더 이상 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여전히 술에 취해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창우 씨를 데리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어두컴컴한 새벽 시간에 남자 두 명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 위험하기 때문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바로 친누나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고 하는데, 친누나랑 같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경섭 씨는 어젯밤 아무런 연락 없이 외박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핸드폰에는 연기가 날 정도로 전화가 계속 왔다고 한다.

그래도,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직접 옷을 챙겨입고 경섭 씨를 찾아 나서려고 했던 그의 누나는 새벽에 일어나 경섭 씨가 비몽사몽한 상태로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위치를 물어본 다음 차를 운전해 창우 씨까지 포함해서 데리고 같이 집에 귀가했다고 한다.

" 어젯밤, 그렇게 민폐를 끼쳤는데 제가 또 형한테 실례를 범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아침까지 형 집에 있었으면 저 진짜 누나한테 반으로 찢겨서 죽었을걸요? "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치 그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두 손으로 온몸을 감싼 채 부르르 떨림을 보여주었다.

" 누나 차 타고 집에 돌아가는데 진짜 숨 막혀 뒤질뻔했어요. 저 진짜 누나가 그렇게 진심으로 화를 낸 건 살아생전 어제가 처음인걸요. "

" 다,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나 잘생기고 귀여운 남동생이 술 먹으러 간다는 말만 전하고서 그 이후로 아무런 연락도 안 받는데 가족으로서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

" 큼, 뭐, 제가 좀 잘난 남자긴 하죠. 아니, 그런데 솔직히 본인은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매일매일 늦게 들어오면서 내가 한 번 그랬다고 성질은 왜 그렇게 내는지 원, "

" 아무래도 경섭 씨는 남동생이니까 어쩔 수 없죠. 혹여나 잘못 되면 어쩔까 하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리고 경섭 씨의 누나로서 하는 걱정이니까 누나분을 이해해주세요. "

" 뭐, 솔직히 제가 여기서 말은 이렇게 해도 제가 백번 잘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는 별말 안 하고 모조리 스펀지처럼 어떤 소리를 해도 다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에요. "

" 후훗, 좋은 자세네요. 그나저나, 창우 씨는 오늘 안보이네요? 그때, 같이 집에 귀가하셨지 않아요? 아직도 꿈나라에 계신 건가? "

주위를 둘러보자 항상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채로 경섭 씨와 매일같이 투덕거리던 창우 씨가 오늘은 그 옷깃조차도 도저히 보이지를 않았다.

분명, 경섭 씨의 친누나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같이 집에 귀가했다고 했으니까 분명 그는 알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그에게 창우 씨의 행방에 대해 질문을 뱉어냈다.

" 아, 그 새끼 아직도 자고 있어요. "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예상 안이었다.

" 그 새끼는 어제 아예 완전히 필름이 나가버린 건지 몸을 손으로 잡고 흔들고 발로 이리저리 차도 깨어날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거 보고 누나가 자기가 사람 붙여서 돌봐줄 테니까 등교하라고 해서 전 버리고 그냥 곧바로 등교해버렸죠. "

" 예상대로네요. 하긴, 창우 씨는 중간부터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렸으니까 아직까지 꿈나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 그렇죠. 제가 봤을 땐 아마 오늘 오후 6시쯤에 슬슬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새끼, 일어나면 어제 일을 기억하긴 할까요? "

" 아마, 못하지 않을까요? 창우 씨는 말 그대로 가게에서 정신을 잃고 픽 쓰러져버렸는데 그걸 기억할 리가 있을까요? 제가 볼 땐 일어나자마자 자기가 왜 경섭 씨 집에서 자고 있는지부터 궁금해할 걸요? "

" 그렇겠네요. "

" 그나저나, 창우 씨는 그렇다고 해도 경섭 씨는 혹시 어젯밤 있었던 일은 다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

경섭 씨도 창우 씨 못지않게 단단히 취해 있었는데 과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 어렴풋이는 기억하고 있어요. "

대답은 의외로 NO가 아닌 YES였다.

" 정말요? "

" 가게에서 술에 취해서 형의 부축을 받으며 아내분의 차를 타고 집에 오고 그다음 형이 깔아준 이부자리에 몸을 누운 것 까지는 기억이 나요. 그런데 그 이상은 아무리 쥐어짜려고 해봐도 도저히 떠오르지를 않더라고요. "

꽤 많이 기억하고 있네.

" 그래도, 그전까지는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는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

" 아니에요. 사실, 그것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그 장면만 생각이 나는 거지. 거기서 제가 어떤 대화를 나눴고, 말을 했고, 행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몰라요. 그냥 어렴풋이 대강 장면만 떠오를 뿐이에요. "

" 아아... "

" 아, 그러니까 어제 생각이 나네요. 잔뜩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던 내 모습. 이런 씨발! 개 같네! "

그 순간 어젯밤 본인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술을 마구 들이킨 것이 후회스러운 걸까?

갑자기 급발진을 하며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세게 후려잡은 채 이리저리 긁어대며 책상에 자신의 머리를 세게 들이박기 시작했다.

" 내가 진짜 미쳤지! 혼자 분위기에 휩쓸려서 염병 떨어서 그 지경까지 된 거잖아! 아아, 진짜 어젯밤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일만 떠올리면 형이랑 형 아내분한테 민폐 끼친 걸 생각하면 너무 쪽팔리고 미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

" 하하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그래요. 원래,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 굳이 거기에 미련을 둬봤자 바꿀 수 있는 건 없잖아요? "

나도 술을 먹고 여러 번 실수한 적이 있었기에 충분히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하지만... "

" 중요한 건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과 그 결심을 현실로 옮길 실행력이죠. "

" ... "

"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경섭 씨랑 창우 씨가 보여줬던 행동은 제가 보기엔 추태나, 실수가 아닌 애교였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술에 취해서 헤실헤실 웃으면서 저한테 잔뜩 안기는 거 엄청 귀여웠는걸요? "

자애로운 아버지.

현실에 강림한 성부 마리아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일까?

배려심이 가득 넘치는 유진의 말을 듣자마자 쓰나미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를 정통으로 맞은 경섭은 마치 신을 만난 광신도처럼 행복에 젖은 표정을 보여주면서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는 유진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 진짜, 제가 무조건 장담하는데, 형은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돼도 제가 죽기 전까지는 옆에서 평생 챙겨드릴게요. "

" ㄴ,네? "

마치 드라마 속 재벌 여주인공이 가난하지만, 자신을 미친 듯이 좋아해 주는 남자친구에게 평생을 책임지겠다며 결혼을 하자는 로맨틱한 단어를 내뱉는 것처럼 그는 유진의 두 손을 꼭 잡아주면서 유진을 일찍 만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했다.

" 아, 이런 사람이 세상에 과연 또 있을까요? 왜 이렇게 일찍 만나지 못했지!? 저는 제가 많이 살아왔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그래도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형보다 착한 남자는 아예 보지를 못 했어요. 진짜, 형은 최고예요. 최고 그 자체. 리얼 짱. "

" 아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저는 그렇게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제 얼굴에 그렇게 금칠을 해주시면 조, 조금 부끄러운데. "

" 금칠이라니요. 이건 금칠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거라고요! 아, 진짜 형이 유부남인 게 너무너무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아요. 내가 좀 더 형을 빨리 알아서 어떻게든 우리 친누나랑 잘되도록 노력했어야 했는데! "

" 아하하... "

" 요리 잘해, 성격 좋아, 얼굴도 괜찮아, 이해심도 많아, 배려심도 있어, 생각도 깊어, 헌신적이야, 그리고 공부도 잘해서 미래도 탄탄하지! 이런 일등 신랑감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어요!? 아, 정말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형 아내분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 게 확실한 것 같아요. "

"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많이 있고 또,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많고 모자란 점이 많은걸요. "

" 개소리하지 마요! 형이 부족하고 모자란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바보 천지라는 소리라고요! 그리고, 오만함이 아니라 겸손까지 가지고 있다니. 이 무슨 사기 캐릭터란 말인가. "

끊임없는 칭찬에 부끄러움이 들이닥친 나의 양 볼이 저절로 빨갛게 물들었다.

" 아하하…. 경섭 씨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까 누나분이 아직 결혼을 안 하셨나 보네요? "

나는 내가 남을 칭찬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데 남에게 나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 그게 유독 부끄러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이야기의 주제를 다른 주제로 돌려버렸다.

" 결혼은 무슨, 제가 알기론 아직 23살 처먹고 제대로 된 연애 한 번도 못 해보고 아다도 제대로 못 뗀 처녀일걸요? "

" 정말이에요? "

이건 좀 놀라운 이야기다. 누나분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23살의 나이에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재력가라는 소리인데 연애 한번을 못 해봤다니.

그 정도면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서로 자기가 가지려고 할 것이라서 연애를 안 해볼 수가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말이야.

" 그러니까, 누나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정말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은데 돈이 많고 능력도 좋으니까 주위에서 접근하는 남자들은 다 재력이랑 능력만 먼저 보고 접근을 해버려서 누나가 알아서 거리를 계속 벌리더라고요. "

" 아... "

" 그런 것도 있고 또 워낙 일이 바쁘니까 남자를 만나는데 할애할 시간이 없기도 해요. 워낙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게 계속 세월을 보내며 지내다 보니까 어느새 23살이 돼버렸더라고요. 뭐, 누나도 누나 나름대로 절망 불쌍한 사람이죠. "

그녀의 상황에 부닥쳐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감정을 이입해보면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에이, 됐어요. 어차피 그 일은 누나 일이니까 더이상 신경을 안 쓸래요. 뭐, 애초에 누나는 정말 본인이 급하다 싶으면 직접 발로 뛰어가며 해결책을 찾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하겠죠. "

" 그런가요? 뭐, 위로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누나분이 좋은 사람을 만나길 기도할게요. "

외적인 것이 아니라 누나분의 본연 그 자체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길ㅡ

" 그게 형이 되면 좋겠네요. "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그의 부탁에 경섭은 짓궂게 미소를 지으면서 개인적인 바람을 혼자 중얼거렸다.

" 무, 무슨 소리예요! 저는 겨, 결혼 했어요! 아, 아내가 있다니까요! "

당연히 그 이야기를 들은 유진은 홍당무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어가며 말을 더듬어가며 그의 혼잣말에 흥분을 잔뜩 한 채 심한 부정을 보여주었다.

" 에이, 장난이에요. 장난. "

" 그, 그런 장난 치시면 안 돼요. 마, 말은 항상 조심하셔야 하는 법이라고요! "

" 에이, 어차피 지금 여기 아내분도 없으신데 이정도 장난은 할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런 말 한다고 해서 진짜로 우리 누나랑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서 별 상관도 없고! "

" 저, 정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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