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31화 (31/77)

〈 31화 〉 원하지 않았던 모임

* * *

혐오스러운 걸 본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아내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치 아이처럼 나에게 딱 붙어있는 경섭 씨와 창우 씨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 한 명은 술에 꼴아서 자고 있고. "

창우 씨를 둘러본 아내의 소감은 간결했고,

" 한 명은 정신은 붙잡고 있는데 딱 봐도 자기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안 좋네. "

경섭 씨를 둘러본 아내의 소감은 꽤 길었다.

" 딱 봐도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막 퍼마신 거네. 쯧쯧, 남자가 이렇게 술을 막 들이부으면 쓰나? 마구 넣다 보면 몸이 금방 망가지는데 말이야. "

" 경섭 씨랑 창우 씨가 조금 많이 마시기는 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학년이랑도 마시고 이학년 선배들이랑도 계속 쉬지도 않고 달리기만 했으니까. "

" 그래? 뭐, 일단 그건 집어치우고 그나저나 술에 잔뜩 취해있는 그 두 명을 왜 네가 부축을 하고 있어? 그냥 술집에 던져놓고 나와버리면 되잖아? 굳이 내 앞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뭐야? "

" 아, 안 그래도 얘기 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여보가 전화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말이 끊겨버렸거든요. 그래서, 지금 여보한테 말하려고 하는데... "

" 뭔데? "

" 여보가 혹시 경섭 씨랑 창우 씨를 집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

조심스럽게 아내의 의사에 관해 물어보자 짜증이나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아내는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내가 왜? "

심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짜증을 부리는 것도 아닌 정말로 자기가 왜 그런 행동을 해줘야 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는 손가락을 그들을 가리켰다.

" 내가 얘네들의 대리기사를 왜 자처해줘야 하는 거야? 나랑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생판 남이고, 난 애초에 너만을 데리러 온 건데 다른 사람을 내가 차에 태워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

" 그게 아니라, 지금 바깥이 어둡기도 하고 다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했으니까 부탁하는 거죠. 남자 혼자 이 상태로 돌려보냈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잖아요. "

"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그건 쟤들 사정이잖아? 그러니까, 누가 떡이 되도록 술을 처먹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알아서 자진해서 처마신 거잖아? 본인의 행동에 책임은 져야 할 것 아니야? "

" 여보.... "

" 그러니까, 내가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쟤들이 위험해지든 말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렇게 걱정이 되면 다시 가게 안에 집어넣고 나와. 그러면 알아서 가게 사장님이 짐 덩어리 치우듯이 해결해줄걸? "

물론 가게 안에 박아두기만 한다면 가게 사장님이 알아서 정리해주시긴 할 테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점이 많았으며, 또한, 이 두 명을 다시 술집에 박아놓았다가 괜히 이상한 사람한테 이끌려 안 좋은 일을 당할 것만 같았다.

" 여보.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얘네들은 제가 학교에 간 첫날부터 저랑 친해진 애들이에요. "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난 아내의 옷깃을 살짝 잡은 채 다시 한번 아내에게 부탁을 시도했다.

" 먼저 다가와 주고 굳이 저랑 어울려주고 친하게 지내주며 장난도 쳐주는 착한 애들인걸요? 이 애들을 이대로 놔두고 간다면 제 마음이 너무 복잡해지고 불편해질 것만 같단 말이에요. "

" ... "

" 그러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전 죄책감 때문에 아마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 여보. 한 번만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지, 집으로 데려다주거나 저희 집에서 재우는 게 힘든 일은 아니잖아요. "

" 야, 나 피곤해. 일 마치고 너 데리러 올 때 하품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보지 빠지게 일 존나 한 다음 너 데리고 집에 가서 이제 대접받으면서 쉬고 싶은데 얘네들 데리고 가면 내가 그러지도 못하잖아. "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일을 마치시고 곧바로 저한테 달려왔는데 제가 막무가내로 이런 부탁을 해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여보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달게 벌을 받을 테니까 지금은 하, 한번만 저한테 양보해 주실 수 없을까요? 여보. 부, 부탁이에요. "

" ...하. 나 진짜 씨발. "

내가 아내에게 이렇게 강한 자기주장을 펼친 적이 얼마 만일까? 아마,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굉장히 적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나중에 더 잘해드릴게요. 아니지, 애들 정신 차리고 집에 보내고 난 뒤부터 평소보다 더 힘내면서 여보가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드릴 테니까 오늘 한 번만 어떻게 안 될…. 까요? "

조심스럽게 마무리되는 그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한숨을 내쉬며 짜증이 잔뜩 담겨있는 눈빛을 발사했고 그러자 그의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숙어졌다.

'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려 일을 마치고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달려온 것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약속장소에 도착하니까 내가 큰 짐 덩이 두 개를 둘러업고 같이 이 짐을 부담하자는 말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내 입장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있어서 아내가 날 때리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이건 아내한테 뺨을 후려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난 아내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으니까.

잔뜩 풀이 죽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던 그녀는 결국 마음을 굳힌 것인지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 하, 나 씨발. 진짜 내가 너랑 살면서 별 같잖은 짓을 다 해보는구나. 직장 상사도 아니고 하다 하다 남편 대학교 친구 대리기사 노릇까지 해야 한다니. 아, 존나 내 처지에 현자 타임이 몰려오네. "

" 죄송해요. 여보. 저 때문에 괜히 번거롭게.... "

" 됐어. 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어차피 그 대가도 나중에 내가 확실하게 받아낼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은 너한테 한 번 져주도록 할게. 차 문 열고 뒷자리에 지금 당장 걔들 태워. "

삐비빅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자 내 고개도 거기에 함께 맞춰서 벌떡 솟아올랐다.

' 허락해준 거야? '

내가 부탁해놓고도 이게 과연 성공할까 라며 혼자서 많은 의문을 가졌었는데 내가 과연 성공한 게 맞은 걸까?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아내의 대답이 과연 YES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난 재차 아내에게 물었다.

" 정말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여보? "

" 네가 나한테 부탁해놓고 그런 질문을 쳐 묻는 건 무슨 심보냐? 어차피 애들 저 상태인데 깨워서 집이 어딘지 일일이 묻고 각자 집에 데려다주는 건 무리 같으니까 그냥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재울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

" 여, 여보! "

" 감격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참고로 차에 있을 때랑 집에 있을 때도 쟤네 관리는 네가 다 해야 하는 거 알지? 난 일하고 갔다 와서 집까지 대리기사 노릇까지 하고 난 뒤 애새끼들 수발까지 또 들어줄 자신까진 없거든. "

"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 그럼, 빨리 엉덩이 떼고 움직여. 봊같은 거 얼른 끝내고 집에 가서 대접받으면서 쉬고 싶으니까. "

" 네! "

아내의 재촉에 난 환한 웃음을 보이며 펭귄처럼 두 명을 꽉 끌어안고서 아내가 열어준 뒷자리에 경섭 씨와 창우 씨를 대충 쑤셔놓고서는 문을 닫았다.

* * *

" 썅, 신호는 왜 또 걸리고, 지랄이네! 아, 존나 거지같이 왜 맨날 내가 운전할 때나 딱 출발하려고 할 때 거짓말같이 신호가 바뀌는 거지? 조작인가? "

본격적으로 차가 빠지고 아내가 액셀을 밟아 속력을 내서 도로를 빠르게 지나가려고 할 때쯤, 거짓말같이 곧바로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에 차가 급정거를 시도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있어서 앞으로 몸이 살짝 쏠리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뒷자리에 누워서 서로 잔뜩 엉켜있는 창우 씨와 경섭 씨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앞 좌석에 머리를 세게 들이박아 버렸다.

" 음냐, 흠. 음. "

꽤 큰소리가 난만큼 고통이 클 게 뻔한데 역시나 술에 단단히 취해 있어서 그런지 다들 크게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단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잠꼬대를 계속 보여줄 뿐.

" ... 다들, 잘 자고 있네. "

고개를 돌려 둘의 상태를 대충 확인한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려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빨간불의 신호만을 계속 노려보고 있는 아내를 향해 말했다.

" 여보. 저희 때문에 일부러 너무 급하게 가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천천히, 안전하게만 운전해주시면... "

" 무슨 개소리야? 널 위해서 천천히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존나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속도를 내는 거니까 혼자서 김칫국 들이마시지 마. 씨발, 여기 무슨 신호가 이따위야? 바뀌는 건 한참 걸리는데 유지는 더럽게 안 되네? 사람 봊같게 하네. "

" .... "

" 그나저나, 갑자기 드는 생각이긴 한데 쟤네 부모님께 따로 연락 안 해도 괜찮아? 따지고 보면 따로 언질이나 연락도 없이 무단으로 외박을 하는 거잖아. 내 아들이었으면 다시는 밖에 못 나가도록 몽둥이로 다리를 다 부숴버렸을 텐데. "

" 그, 그렇죠. "

" 그쪽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연락도 없이 외박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아들이라서 걱정 많이 할 텐데 우리한테 따로 귀찮은 문제 안 오는 거 맞지? 네가 따로 연락이나 카톡이라도 남겨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뒷말 나오면 처치하기 곤란해져. "

나도 그 문제는 인지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시도해보려고도 했다.

원래 세상이든 남녀역전의 세상이든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외박을 해야 한다면 집에서 걱정을 하고 있을 가족에게 연락을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연락을 보내려면 경섭 씨와 창우 씨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보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각자 둘 다 핸드폰에는 잠금화면이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 잠금이 걸려 있어서 저희가 카톡이나 전화를 먼저 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냥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가 전화가 걸려오면 제가 받아서 걱정하지 말라고 일일이 대답해드려야죠. "

" 별 지랄을 다 하네. 씨발. "

" 제가 오늘 하루는 책임지겠다고 했으니까 확실하게 끝까지 제 책임을 다해줘야죠. 그리고, 사실 경섭 씨랑 창우 씨가 이야기해 줬던 걸 기억해보면 딱히 가족한테 연락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딱히 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 왜? "

" 경섭 씨는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친누나랑 둘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친누나가 직장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많지 않아서 외박이나 외출이 자유롭다고 말했거든요. "

그러자 아내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선 입을 떡하니 벌렸다.

" 스무 살짜리가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게 아니고 자기 친누나랑 둘이 같이 산다고? 씨발, 누나라는 사람이 직장인인가 봐? 쟤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건가? "

" 그건 아니라고 하던데요? 세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들었는데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한다고는 못 들어서... "

" 세 살 차이면 스물세 살인데 벌써 자기 집이랑 번듯한 직장이 있다고? 씨발, 그게 말이 돼? 존나 그렇게 귀티 나는 것처럼 안 보였는데 알고 보니 뼛속까지 금수저 새끼였네. 아, 존나 봊같네. 그 말 들으니까 당장 차 문 열고 저 새끼들 떨궈버리고 싶어졌어. "

" 아.... "

" 그냥 더이상 말하지 마. 기분 존나 봊같아지니까 거기서 멈춰. 아, 제기랄. 존나 그 말 들으니까 운전할 맛 뚝 떨어지네. "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아내는 정말로 화를 내겠지. 그녀의 으름장에 나는 더이상의 말을 아끼고서는 입을 꼭 다물었다.

굳이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해서 좋기만 하던 아내의 기분을 일부러 망쳐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 어휴, 봊같네. 나보다 한 살 어린 새끼는 집도 있고 떵떵거리면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누구는 제기랄, 현장에 나가서 피가 날 때까지 구르고 욕 처먹고 봊만한 갑질이란 갑질은 전부 당하고 별 생지랄을 다 하고 있으니 원, "

" .... 일이 많이 힘드시죠? 여보. "

" 존나게 힘들지. 늙어서 보지도 검은색이고 흐물흐물 거릴것 같은 개새끼들이 매일매일 같잖은 갑질하는 거 보면 얼마나 거지 같은지 알아?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제일 문제는 안 그래도 요즘 필드 상황이 안 좋아서 예전처럼 그 봊만한 갑질하는 년들을 무시하지도 못하고 이젠 똥구멍을 오지게 빨아주면서 온갖 아부를 부려야 한다는 게 제일 봊같아. 씨발. "

" .... "

" 살만 뒤룩뒤룩 찐 뚱땡이 아지매가 지랄 할 때마다 당장이라도 이 거지 같은 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드는데 씨발, 내가 평생 해온 게 이거잖아? 이걸 안 하면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그냥 화가 나도 봊같아도 마음속으로 삼키고 참고 계속하는 거지. 씨발. "

난 아내가 일터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일을 겪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대략 추측을 할 뿐이지.

하지만, 정확하게 아내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행동을 하며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이것 하나 만큼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아내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점, 그리고 아내도 본인의 위치에서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그는 다시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고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운전대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렸다.

" 고마워요. 여보. "

" ... "

" 그리고 힘내요. "

그는, 웃으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그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 하, 운전 중이니까 치워. 뜬금없이 고맙다니, 힘내라느니 그런 소리는 왜 하는 거야? 그리고 그걸 알면 나중에 네가 따로 보답하던가. "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표정인 채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낯간지럽고 귀찮게 일부러 왜 그런 소리를 하냐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아내의 반응뿐이었다.

" ....네. "

그러한 아내의 반응에 그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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