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원하지 않았던 모임
* * *
왁자지껄한 술집.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았지만 결국 이학년과 일학년 모두가 모임에서 백 퍼센트의 출석률을 자랑하자 먼저 도착해있던 교수님들의 표정이 저절로 밝아졌으며 결국 좋은 분위기로 모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루한 교수진들의 일장 연설 뒤 이어지는 자유로운 술자리에 이학년과 일학년은 서로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아가거나 모두가 저마다 술잔을 들고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잔씩 들이키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한잔 두잔 들이키자 취기가 올라서 다들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하고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이런 행복한 술집의 분위기와 대비되게 유진은 유독 음침한 모습을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구석에 쭈그려 앉아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물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고개를 땅바닥에 쳐 박을 듯이 숙인 채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있었다.
" 시끄러워. "
난잡하다.
시끄럽다.
귓가에 들리는 노랫소리는 감미롭기는커녕 생목으로 불러서 그런지 거의 소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난 마음속으로 기겁을 금치 못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나도 시끄러웠으며 왁자지껄한 이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해도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술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고 물만 약 4시간 동안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는데도 분위기 때문인지 눈앞이 어질어질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 같네. '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집으로 떠나버리고 싶은 욕구는 태산보다 컸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내가 올 때까지는 꼼짝없이 이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뭐, 크게 상관 쓸 필요가 없는 게 어차피 술집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고 아까전 아내에게서 퇴근했다는 카톡도 받았으니 조금만 참으면 아내가 가게 앞에 도착할 게 뻔했으므로 나는 눈을 끔뻑 감았다 뜨면서 최대한 말똥말똥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곤한 기색을 최대한 깨우려 노력하던 그 순간 나의 얼굴 앞으로 슬며시 소주잔이 들어왔다.
" 설마, 저희 놔두고 혼자 집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건 아니죠? 형? "
잔뜩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홀짝홀짝 남들이 주는 술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목구멍 안쪽으로 계속해서 들이 부어 양쪽 볼에 홍조가 오른 경섭 씨가 나를 보며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취했네. '
눈이 풀려 있네. 보아하니 경섭 씨가 제대로 취한 것 같았다.
난 생긋 미소지으며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 아니요, 그럴 일은 없어요. "
" 그럼, 다행이고요! 제가 아침에 얼마나 깜짝 놀라고 서운했는지 알아요!? 꼭 형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도망쳐버리다니... "
" 아, 그건 뭐라 하, 할말이 없네요. 죄송해요. "
아직도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와버린다. 잔뜩 삐져버린 경섭 씨와 창우 씨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얼마나 내가 노력했는데...
" 아이, 괜찮아요!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다 같이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과정은 됐고 결과를 보면 자앙땡이죠! "
이제 상관 쓰지 말자면서 손사래를 치는 경섭.
하지만 지금 소주잔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은 보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굉장히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꾸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계속 저대로 놔둔다면 컵에 들어 있는 소주를 모조리 쏟아버릴 것 같았다.
하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여러 테이블을 번갈아 가면서 여태까지 술을 진탕 퍼마셨는데 안 취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광경이겠지.
' 사실, 경섭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지 않나? '
고개를 든 김에 살짝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보자 이른 저녁에도 불구하고 경섭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거나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화장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 일학년 과대와 이학년 과대를 중점으로 쉬는 타임도 가지지 않고 안주를 먹지도 않고 오늘만 사는 것처럼 계속 달리더니 결국엔 다들 저렇게 돼버렸네. '
술에 취한 사람보다 술에 취하지 않고 맨정신으로 앉아있는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술집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녹다운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깨어있는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일학년 과대랑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학년 선배들 몇 명뿐.
" 형! 어디 봐요! 우리 같이 짠 쳐요! 짠! "
그들에게서 시선을 다시 거둬 앞으로 향하자 소주가 가득 찬 소주잔을 들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경섭 씨가 건배를 하자고 요구하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식탁에 놓여 있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삐죽 튀어나오는 그의 입술은 마치 부산 앞바다를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튀어나왔다.
" 형! 물잔 좀 그만 들어 올려요! 같이 술 한 잔만 딱 마시면 안 돼요? "
" 아, 죄, 죄송해요. 제가 술을 안 좋아하고 또 모, 못먹어서.... 그리고, 집에 들어가는데 또 유부남이 술 냄새가 나면 조금 그렇잖아요? 이, 이해해주세요. "
" 어,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요. 그런데 이 맛있는 걸 왜 안 좋아하는 거예요? 한 잔 두 잔 마시면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고 또 평소랑은 아예 다른 느낌도 받을 수 있고 마치 내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붕 뜰 수 있는데! "
두 팔을 옆으로 쫙 벌리면서 헤실헤실 웃어 보이는 그는 누가 보아도 굉장히 위험한 상태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위험한데. 저대로 손에 들고 있는 소주를 마시게 내버려 둔다면 창우 씨처럼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자버릴 것 같단 말이지. '
실제로 창우 씨는 이미 기절한 지 약 2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처음에 내 앞자리에 앉아서 혼자서 소맥을 말아 벌컥벌컥 마시면서 신나게 달리고 경섭 씨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갑자기 총에 맞은 사람처럼 픽 쓰러져버리더니 지금은 가게 소파에 누워서 고롱고롱 잠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왠지 경섭 씨를 이대로 달리게 놔둬 버린다면 창우 씨의 옆에 나란히 누워서 꿈나라로 떠나버릴 것 같은 미래가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난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원래,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뒤처리와 관리 정신이 제일 멀쩡한 사람이 하는 게 규칙이니까.
" 경섭 씨.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나 아직 안 취했어요! 엄청 멀쩡한걸요!? "
초점이 없는 흐릿한 눈동자부터 감추고 그런 소리를 해야 설득력이 있을 텐데....
" 봐요. 나 엄청 멀쩡해요! "
도대체 어딜 보고 멀쩡하다고 판단을 해야 하는 걸까?
" 그래요? 그럼, 사과 2개와 사과 3개가 바구니에 들어있는데 민정이가 추가로 사과를 2개 더 사 왔으면 총 사과의 개수는 과연 몇 개일까요? "
" 6개! "
" 왜 6개에요? "
" 마트에 들렀다가 집에 오기까지 입이 심심하잖아요! 그럼 민정이라는 애가 사과를 샀으니까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한 개를 먹으면서 집에 올 테니까 그럼 모이게 되는 사과는 총 6개! 어때요? 제가 멀쩡한 건 이로써 증명이 됐죠? "
그의 신박한 계산법에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탁' 칠 뻔했다. 아마, 하버드대학교에나 MIT 공대에 다니는 학생들, 일명 천재들도 경섭 씨처럼 이런 고차원적인 계산법을 내놓지는 못하겠지.
' 무조건 막아야 해. '
그의 신박한 대답을 들은 나는 더이상 그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제지해야겠다고 확실하게 결심했고 팔을 뻗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소주잔을 떼어놓아 대충 비어있는 그릇에 부어버렸다.
이대로 계속 마시게 놔둬 버린다면 창우 씨만큼, 아니 어쩌면 창우 씨보다 더한 괴물이 탄생할 게 뻔했다.
어쩌면 가게 한가운데서 용가리 브레스쇼를 펼칠지도 모르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의 이미지와 남성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는 그의 팔을 붙잡고 살포시 일으켜 세웠다.
' 아내한테 부탁을 한 번 해봐야 하나. '
창우 씨는 물론이고 경섭 씨를 이 상태 그대로 집에 보낸다면 분명 그것이 사소하던 큰 사건이던 어떤 식으로라도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술에 잔뜩 취해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남성이 야심한 시각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범죄의 표적이 되는 모습을 친구로서, 또 이들의 형으로서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되면 둘 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우리 집에서 재운다는 차선책도 존재는 했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점은 아내가 과연 나의 이런 부탁을 들어줄까가 문제였다.
' 안된다고 한다면 매달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만약 내가 여자들을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한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겠지만 창우 씨와 경섭 씨는 남자라서 아내가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할 것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도 혹여나 만약 안 된다고 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번만큼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매달려서 계속 부탁을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 뒤가 귀찮아지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들이 이렇게나 취해서 인사불성이 돼버렸는데 그것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엔 이들의 친구로서, 또 형으로서 절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니까.
띠디딕ㅡ
띠딕ㅡ
타이밍 좋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에 선명하게 찍히는 아내라는 글자에 나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네, 여보. "
[지금 네가 위치 찍어준 곳 앞에 다 와 가는데 슬슬 옷 챙겨서 입고 나올 준비 해. 그나저나, 거기 상황은 어때? 쉽게 나올 수 있지?]
" 오히려, 잡을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문제일 것 같아요. 지금, 저 포함해서 약 네 사람 정도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처음 시작하자마자 전부 말 달리듯이 달려서 다 드러누웠거나 화장실에 들어가서 안 나오고 있어요. 여보. "
[아이고, 지랄 났네. 너는 목소리 들어보니까 멀쩡한 것 같은데 혹시 술 마신 건 아니지?]
" 여보가 말한 걸 끝까지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누가 술을 권해도 꾹 참고 한 모금도 입에 안 댔어요. 저, 잘했죠? 여보. "
[그래, 잘했어. 역시, 우리 유진이는 중요한 순간에서만큼은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네. 자, 그럼, 이제 내비게이션으로 일 분 정도 남았다고 뜨니까 이제 옷 입고 나와서 가게 앞에 서서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어 씨발, 신호 바뀌었다. 나, 끊는다]
" 아, 여, 여보! 잠깐만요. 부탁드릴 게 있는…."
뚝ㅡ
" 아…. 끊어졌다. "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러면 어쩔 수가 없게 됐네.
뭐, 굳이 통화로 하지 않아도 아내가 거리가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곧 있으면 도착하니까 그냥 얼굴 마주 보고 물어보면 되겠지.
일단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제 나는 이 지긋지긋한 술집에서 드디어 엉덩이를 뗄 시간이 돌아왔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의자 한 쪽에 걸린 옷을 후다닥 챙기고서는 내 몸에 기대있는 경섭 씨의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그리고 엉기적 걸어가 소파에 누워있는 창우 씨까지 억지로 일으켜 한쪽 팔로 단단히 몸을 잡고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좌측에는 경섭 씨를 우측에는 창우 씨를 부축한 채 천천히 걸어가며 가게 문을 연 채 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서 아내의 차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 여, 여보! "
손을 흔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두 손은 잔뜩 술에 취한 이 두 명을 부축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미소만을 지어주면서 아내에 대해 반가움을 표시해주었다.
대충 자리가 남는 곳에 차를 잠시 대놓고 내린 그녀는 술에 취하지 않고 멀쩡한 나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그리고 각각 내 손에 붙잡힌 채 잔뜩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경섭 씨와 창우 씨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 허... "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온 아내는 술에 잔뜩 취해서 내 몸을 기둥 삼아 기대있는 그들을 보고서 마치 귀찮은 짐들을 보는 것처럼 말했다.
"뭔 씨발..."
" 브에? 부브브... "
"이 새끼들은 또 뭐야?"
옹알이를 내뱉는 경섭 씨의 외침에 아내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