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원하지 않았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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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씨발, 존나 길어서 읽는데 하루종일 걸렸네. 넌 세줄 요약 모르냐? 저렇게 긴 걸 일일이 읽으려면 읽는 사람 눈깔 빠져 뒈진다는 거 몰라?]
유진>[죄송해요. 저도 너무 두서없이 급하게 적은 글이라서 그랬어요]
솔직히 내가 봐도 엄청나게 길긴 했다.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아내가 읽는데 고생 좀 했을 것이다.
아내>[하여튼, 씨발 진짜. 저렇게 긴 거면 띄어쓰기 좀 해. 아니면 내용을 줄이던가. 무슨 연설문처럼 쭉 이어서 적으면 읽는 사람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유진>[죄송해요. 다음에는 읽기 편하시게 고쳐서 보낼게요]
아내>[뭐, 아무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하는 건데 너 미쳤냐? 남자애들끼리만 술을 먹는다고 해도 허락해줄까 말까인데 여자들이 포함돼있는 상태에서 술을 마신다고? 정신 나갔어?]
역시나, 아내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짜증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이 가득 담긴 장문의 카톡.
내가 남자들끼리 술을 먹는다고 해도 아내가 별로 탐탁지 않아 할 텐데 여성들이 포함된 술자리라니. 더군다나 선배들도 포함된 술자리를 가진다고?
아내 입장에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사실, 아내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원래라면 허탈해하고 아쉬워하며 무서운 감정을 가지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내가 이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면 경섭 씨와 창우 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은 내가 그 자리에 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내>[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고꾸라지는 거야? 너 일부러 내 분노 테스트하냐? 그게 아니면, 무슨 게임처럼 너의 그 건방진 행동에 쿨타임이라도 있어? 쿨타임 다 돌면 무조건 써야 하는 패시브라도 쳐 달린 거냐?]
잠시 생각을 가지는 와중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분노와 욕설이 가득 담긴 그녀의 카톡이 연속해서 그에게 쏟아졌다.
' 일단 이것부터 수습하자. '
핸드폰의 진동 소리에 상념에 빠져있던 그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그는 멍하니 잡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자신 쪽으로 당겨 아내가 더이상 분노해서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난 불씨를 끄려고 노력하는 소방관처럼 천천히 침착하게 자판을 누르며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유진>[여보. 일단 진정해주세요. 제가 완벽한 제 의지로 보낸 게 아니니까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단 제 얘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여보도 알다시피 제가 그런 자리 싫어하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아내>[그래, 잘 알지. 너무나도 잘 아는데 오늘은 씨발 왜 그딴 말을 지껄인 거냐? 무슨 질풍노도의 사춘기도 아니고 생각이 왔다 갔다 해? 네가 아주 나한테 복날에 개 맞듯이 맞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유진>[그게 아니라….]
아내>[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대로 충실히 이행해줄게. 너 오늘 다른 길로 새지 말고, 아니지. 어차피 다른 길로 샐 곳도 없구나. 그냥 너 집에 돌아오면 얌전히 앉아서 저번처럼 기다리고 있어]
죽여버릴 테니까ㅡ
머리를 뚫어버릴 정도의 분노로 인해 통보만을 남기고 대화를 끊어버리려는 그녀의 반응에 화들짝 놀란 그는 빠르게 자판을 눌러나갔다.
' 아, 안돼. 절대로 안 돼. '
여기서 아내가 대화를 끊어버린다면 저번과 똑같은, 어쩌면 저번보다 더욱 심한 상황이 나에게 펼쳐질 게 너무 뻔했으니까.
유진>[여보, 이, 일단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추, 충분히 화가 나시는 건 이해하는데 일단은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딱 한 번만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아내>[......지껄여봐]
구구절절 긴 장문의 문자를 연속으로 끊임없이 보내주면서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자 잠시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그에게 변명의 기회를 선사했다.
유진>[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사실은, 제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스무 살 남자애들이 있는데 ㄱ…….]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는 재빠르게 아내에게 그런 카톡을 보내게 되었는지 배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으며, 그의 카톡이 둘 사이의 대화방을 꽉 채워갈수록 눈에 띄게 화가 나 있던 아내의 말투가 마치 불에 데운 마시멜로처럼 사르르 녹아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아내>[아, 그래?]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아내는 아까와는 아예 다른 매우 화사하고 안심이 된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제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그럼요. 그러니 오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여보가 아까 안된다고 말했을 때 티는 안 냈는데 되게 행복했단 말이에요]
아내>[하긴, 네가 사람 많은 곳은 물론이고 술자리도 별로 싫어하는 애니까 말이야. 씨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별 봊같은 카톡이 날아와서 깜짝 놀랐네]
유진>[쉬, 쉬는걸 제가 방해했었나요? 아, 죄송해요. 저는 그런 지도 모르고….]
아내>[씨발, 이미 방해할 거 다 방해해놓고 이제 와서 사과하면 상황이 달라지냐? 아, 개 봊같네.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말하는 건데 너 똑똑히 잘 들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너랑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야]
유진>[그,그렇죠]
아내>[여자랑 마시는 건 아예 생각조차도 하면 안 되고 남자끼리만 마시는 것도 솔직히 나는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용납할 수 없으니까 똑똑히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놔. 알겠어?]
유진>[네. 여보]
아내>[그래, 잘 알아듣고 있어서 좋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거짓말하고 밖에 돌아다니면서 술 마시거나 몰래 마시다가 걸리면 넌 나한테 반으로 찢겨서 죽는ㄱ…….]
" 형!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말해줘요! "
아내가 욕설이 가득 담긴 경고의 카톡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그 순간 갑자기 내 몸 안쪽으로 들어오는 경섭의 팔.
당황과 놀람도 잠시, 나는 혹여나 나에게 안긴 그가 내가 아내와 나누던 카톡, 정확하게는 아내가 나에게 보냈던 여러 카톡을 볼 수 없도록 빛과 같은 속도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서 곧바로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 말도 안 하고 계속 핸드폰만 만지시면 어떡해요! 아까부터 창우랑 계속 형이 대답해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
" 아..... "
" 허락만 맡는데 벌써 오 분을 넘게 쓰셨단 말이에요! 전화하는 것도 아니고 카톡으로 그거 물어보는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시는 거예요? "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버린 건가?
" 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내랑 대, 대화를 하다 보니까 이것저것 말이 나와버려서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어요. "
분명 허락만 맡는다고 말해놓고 계속 핸드폰을 붙잡은 채 대답도 들려주지 않고 카톡만 몇 분째 하고 있는 나를 기다리는 것에 지쳐버린 것이겠지.
" 흥! 지금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아내랑 러블리하고 애정 넘치는 카톡을 많이 했다고 잘난 척하는 거죠!? 흑, 여자친구나 아내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
" .... "
장난스럽게 눈물을 훔치는 그의 행동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미소지어주었다.
"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된 거에요!? 아내분이 당연히 허락해주셨죠? 갈 수 있는 거죠? 갈 수 있는 거 맞죠!? "
성큼성큼 다가와 유진이의 한쪽 팔을 감싸 안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는 그는 마치 유진, 창우, 경섭 이렇게 셋이 모임에 가는 게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은 채 콧구멍을 벌렁벌렁 움직이며 당장이라도 유진이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면 이곳이 사람이 꽉 찬 강의실이라는 것도 잊고 방방 뛰어다닐 듯이 격양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경섭과 다르게 그는 무언가 어색하면서도 안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어, 어떡하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그걸 내 손으로 직접... '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경섭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울상을 지은 채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한껏 느끼는 중이었다.
분명 아내와 카톡을 하는 그 시간 동안 경섭은 나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즐길 거리, 추억거리를 머릿속에서 그려내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었을 텐데,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것을 깨부숴야 한다니.
' 실망하겠지. '
갈 것처럼 말해놓고 못 간다고 하면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원래 줬다가 뺏는 것이 아예 안 준 것보다 더욱 열 받는 법이니까.
정말로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이 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최고결정권자인 아내가 내가 그런 모임에 참가하는 것을 아예 안 된다고 못을 박아버렸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한번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서는 자신의 한쪽 팔에 매달려 있는 경섭을 향해 말하려고 하는 그 순간.
" 저기, 여기 다들 주목해주세요! "
그 사이 학회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온 설서윤이 손에 두꺼운 종이 한 장을 쥔 채 단상 위에 서서 큰 소리를 내며 강의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 오늘, 혹시 사정이 있어서 오늘 모임에 참가를 안 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있으시다면 손 한 번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러자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적은 숫자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여성과 남성분들이 각각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 가면 재밌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손을 드시는 걸까? 안 친해도 가서 술 먹으면서 친해질 수도 있을 텐데. 안 그래요 형? 저희는 저희끼리 모여서 맥주나 소주 한 잔 딱 걸치면서 각자 재미난 썰도 풀면서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모임을 즐기면... 어, 형? "
그리고 손을 든 남성중에는 당연하게도 내가 포함되어있었고 손을 들어 불참여 의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을 했던 경섭 씨는 내가 손을 들고 있는 걸 목격하자마자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 지금 손든 분들은 제가 따로 전달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복도로 나와주실 수 있나요? 막,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
우르르 일어나는 그들을 따라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경섭 씨와 창우 씨를 향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현했다.
" 죄, 죄송해요. 아내랑 연락해 봤는데 저, 저는 오늘 모, 못갈것 같아요. 정말로 죄송해요. 제, 제가 나중에 바, 밥한번 꼭 살 테니까.... "
그들이 어떻게 대답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하겠지.
" 죄송해요! "
나는 굳이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 할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형사에게 쫓기는 범죄자처럼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와 우르르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대열에 끼여 황급히 도망쳐버렸다.
억지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과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채 그녀를 빙 둘러 싸고서는 가만히 서서 저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다들 모이셨죠? 이제 강의실 안에 오늘 모임에 참석 안 하시는 분들은 없는 거죠?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고? "
다들 말을 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음, 그러면 여기 있는 분들이 오늘 사정이 있으셔서 부득이하게 모임에 참석을 못 하시는 분들이 맞으신 거죠? 뭐, 물론 오기 싫어서 안 오려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거기서 거기니까 그건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텐데... "
말을 하다가 끊어버린 그녀는 마치 문제를 풀다 막힌 학생처럼 입술을 이빨로 살짝 물어뜯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는데, 참고로 말하지만 저는 진짜 여러분들 모두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
" ... "
" 저는 여러분들 모두를 이해하는 사람이고 또한 전 학회장님처럼 전달해주는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는 점도 미리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 아니,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길래 아까부터 딴소리만 계속하시는 거예요? 본론만 말해주세요. "
마치 보험처럼 밑밥을 계속 깔아가며 자신을 변호하는 설서윤의 행동에 다른 여성 한 분이 짜증이 난 것인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빨리 이야기를 진행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통 같으면 무례한 언행에 다들 인상을 찌푸려야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들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면서 얼른 과대의 이야기를 재촉시켰다.
" 아씨…. 이거, 말하면 씨... 괜히 나만 욕 존나 먹을 것 같은데. "
우물쭈물하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반복하던 그녀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우리의 눈치를 한 번씩 쓱 보고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 그, 정말 죄송한 말인데, 방금 제가 개인적으로 이학년 과대 분이랑 연락을 했는데 그쪽에서 뭐라고 했냐면, 불 참가자들 없이 모두 다 모임에 참가하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봤을 땐 여기 있는 분들 전부 다 마치고 어디 가시지 말고 따라.....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
마른하늘에 날벼락.
그것이 지금 이곳에 모여있는 모든 이들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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