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26화 (26/77)

〈 26화 〉 지옥의 조별과제

* * *

" 켈록. 케헥. "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정체 모를 액체.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과 향기로 소매로 닦아서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입안에서 피가 흘러내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그 양이 조금 많은 것 같았다. 마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터져버린 살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피가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며 모이고 모여 서서히 고여버리는 핏물을 바라보면서 난 옷소매로 입에서 흐르는 핏물을 대충 닦아냈다.

" 다시 자리에 앉아야지? 행동이 조금 굼뜨네? "

" 죄, 죄송해요. 여보. "

무릎을 짚고 일어나자 잠시 휘청거리는 그의 몸은 아까 그녀가 손바닥을 펴고 휘두른 단 한 번의 타격으로 한 번에 그의 몸이 얼마나 큰 피해를 당하였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금니를 꽉 깨문 그는 몸의 균형을 억지로 잡고 재빠르게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 다음 그녀가 말한 대로 얌전히 착석했다.

" 유진아. 네가 생각해도 할 말 없지? "

" 네. 잘못했어요. 여보. "

" 그래, 잘 알고 있네.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럼 지금부터 내가 뭘 할지도 잘 알겠네? "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의 턱을 붙잡고 흔들자 그의 머리가 힘없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그는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용서를 빌어도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 네. 다, 달게 받을게요. 여보가 뭘 하든지 전부 가, 감당할게요. "

그저, 눈물을 글썽거린 채 두 손을 맞대고 싹싹 비비면서 모든 걸 순응하겠다고 말할 뿐.

겁에 질려 있는 그를 보며 미소지은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입술을 타고 흐르는 그의 피를 손가락으로 살짝 훔친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히 말했다.

" 아무래도 아까처럼 눈은 감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눈을 뜨고 있었다가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눈을 찔러버리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하긴, 네가 하루 이틀 맞아본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겠지? "

" ...네. 잘 할 수 있어요. "

" 좋아. 그래야, 내 남편이지. 그럼, 다시 간다? "

통보에 가까운 아내의 말에 나 맞고 또 맞아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고통에 두려워하면서도 다시 두 눈을 꼭 감았다. 아마, 아내는 내가 정신을 잃어버릴 때까지 이 행동을 반복할 게 뻔했다.

아마, 오늘 밤은 길어도 너무 길게 느껴지겠지. 왜 항상 안 좋을 일이 일어날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 이대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면 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으면 좋겠다. '

그렇다면 정말 환상적이겠지만 허상에 가까운 나의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한 생각에 입 밖으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쉬이익ㅡ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아내의 손바닥이 내 볼에 가까워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마, 조금 있으면 아내의 거대한 손바닥이 내 뺨을 아까처럼 사정없이 후려쳐버리겠지. 맞은 곳을 또다시 얻어맞는 것이니 아까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겠지.

가차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내 모습을 생각하자 저절로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을 최대한 잊기 위해 더욱더 눈을 꼭 감았다.

마치,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보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며 자신의 눈에 안대를 감은 사람들처럼.

" ..... "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분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져야 할 내 뺨은 너무나도 멀쩡했으며 하늘로 솟구쳐 바닥으로 다시 떨어졌어야 할 내 몸은 여전히 의자에 가만히 착석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잠시 멈춘 것처럼.

하지만, 당연하게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는데 어째서, 아내의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치지 않는 걸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거지?

아마,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목격한다면 오히려 안 맞아서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사정을 모르고 함부로 말을 하는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전혀 목격하지도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지니 오히려 나의 마음속에서는 더욱 큰 불안감이 샘솟아 올랐고 더욱 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 아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걸까? '

' 갑자기 왜 때리는 걸 멈춘 거지? 무슨 이유로? '

'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

' 난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

'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아내의 화를 더욱 돋우지 않을 수 있는 걸까? '

' 나에게 시험을 내리는 건가? '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뭐가 더 나의 목숨줄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붙여놓을 수 있을까를 눈을 꼭 감고 판단하던 그 순간, 어느새 새빨갛게 퉁퉁 부은 그의 볼에 그녀의 손바닥이 살포시 얹어졌다.

갑자기 온몸에 감도는 따뜻한 기운에 그가 꼭 감고 있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선유린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고 손바닥을 그의 볼에 올린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잔뜩 쫄아서 벌벌대고 있는 거 보니까 씨발, 존나 웃기네. "

마치, 나이 많은 선생이 학생을 괴롭히는 듯 볼을 툭툭 건드리는 아내의 행동에 나의 눈동자가 저절로 커졌다.

" ㄴ, 네? "

" 유진이 네가 저지른 죗값은 한대 정도면 충분해서 이제 안 때릴 거니까 몸에 들어간 힘 빼. 내가 이런 거로 뭐라고 욕을 하고 구타하는 무지막지한 여자로 보이는 거야? "

갑자기,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볼에 살짝 꼬집고서는 곧바로 손을 떼고 두 손을 든 채 씩 웃어주는 아내를 보니 혼란이 더욱 가중되기 시작했다.

아내와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저절로 할 말이 사라졌고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이 떨어진 것 같았다.

" 우리 유진이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면 나 좀 섭섭해지는데 말이야. 설마, 너 나를 이런 같잖은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는 쓰레기 년으로 보고 있던 거 아니지? "

" 아, 아니에요. 그렇게 안 보고 있었어요. 여보는 항상 저를 위해 일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인걸요. "

일단,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그는 최대한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천천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 그렇지? 맞지? 난 나 자신이 되게 젠틀하고 배려심 많은 아내라고 생각하는데. "

" 맞아요. 여, 여보는 항상 멋지시고 배려심이 넘치시는 분이에요. "

" 역시, 우리 유진이는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구나. 그래, 솔직히 아내가 해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남편 혼 좀 낸다고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를 힐끔 본 그녀는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곧바로 새하얀 연기를 그의 얼굴에다 내뿜고선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처럼 킬킬 웃음을 보이면서 자신이 행동을 멈춘 이유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 네가 나한테 예전에 조별 과제나 여러 학교 활동 때문에 여자들이랑 대화를 안 나눌 수는 없다고 그것만큼은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었잖아? 그래서, 내가 그때 네 말에 뭐라고 대답해줬었지? 기억 안 나? "

" ...기억이요? 그때라면, 분명... "

그런 때가 있었나?

아내가 저런 말을 하는 거면 분명 있었다는 건데 왜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를 않는 거지?

' 어, 잠깐만 생각났다. '

그때가 아마, 내가 처음 등교하고 강의실에 혼자 앉아서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 날일 텐데.

잊혀진 기억을 휴지통에서 꺼내 다시 조각조각 맞춰보면서 기억의 퍼즐을 완성해나갈 때쯤 아내가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는 나를 대신해 정답을 말해주었다.

" 허락한다고 했을 텐데? 그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해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었고 그 대신 네가 말한 불가항력의 상황을 제외하고선 절대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경고했었지. "

" 아.... "

" 건방지네. 건방져. 내가 했던 이야기들을 까맣게 있고 있다니. "

머릿속의 퍼즐이 전부 조립되었고 그때, 카톡으로 강의실에 앉은 채 아내와 나눈 대화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분명 저 질문을 했었고 아내는 그 질문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여성과 공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 허락을 내렸던 것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처음에는 내가 공적인 대화만 하라고 선언한 걸 어기고서 혹여나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게 아닐까 혹은 짝짜꿍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단톡방을 뒤져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있어봤자 과제에 대한 이야기만 있고 사적인 대화에서는 우리 유진이가 대답도 안 했더라고? 거기서 일단 일차 합격. "

" ... "

" 거기서 보통 여자들 같으면 약속을 잘 지켰구나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아니지. "

" ... "

"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위해 너한테 핸드폰을 던져주고 갑자기 전화도 걸어보라고 시킨 건데 그 민규리라고 했나? 하여튼 그년이랑 너랑 나누는 대화를 듣고 딱 생각난 게 이거야. "

이차 합격ㅡ

" 캬, 내가 정해놓은 선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다니. 우리 유진이가 내가 말한 것처럼 밖에서 몸과 마음가짐을 아주 조신히 챙기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너무 기뻐. "

" 아, 고마워요. 여보. 조, 좋게 봐주셔서. "

일단, 이상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내의 기분이 풀어지고 있다는 좋은 결과가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굳은 나의 얼굴도 점점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 그런데, 유진아. 여기서 문제 하나 낼 테니까 한번 맞춰볼래? "

" 아, 네? 어떤 문제를... "

" 그게 말이야. 난 분명 허락을 다 해줬고 유진이 너도 내가 정해놓은 선을 벗어나지 않고 올바르게 행동했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제일 처음에 나한테 맞았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싱글벙글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그녀의 질문에 저절로 그의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 어, 새,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왜 맞은 거지? '

분명 아내가 말한 대로라면 난 아내가 정해놓은 선을 벗어나지 않았고 몸과 마음가짐도 조신하게 행동해서 전혀 잘못한 점이 없다는 건데 내가 왜 아까 아내에게 맞게 된 걸까?

' 무슨 이유지? '

일단, 아내가 이런 문제를 내는 것이라면 내가 아까 한 행동 중에 분명 잘못된 행동이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 마, 맞혀야 하는데. '

저절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못 맞히면 아내가 또 화를 낼지 몰라서 무조건 정답을 맞혀야 하는 게 좋은데 지금 이 상황이 내 예상과는 아예 정반대로 흐르고 있어서 머릿속이 복잡한 나머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도저히 굴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질문에 알맞은 정답을 찾지 못한 그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서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족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모, 모르겠어요. "

혹여나 좋아졌던 아내의 기분이 다시 상하지는 않을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유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잠시 얼굴이 찌푸려진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겠다는 듯 인상을 편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휘저었다.

" 에휴, 이럴 때 딱 알아채고 말해야 하는 거 몰라? 하여튼, 기분 안 좋았으면 바로 다시 손부터 움직였을 것 같은데 내가 지금 기분이 좋으니까 한 번 봐줄게. 다음은 없는 거 알지? "

" ㄴ, 네. 가, 감사합니다. 아니, 고마워요. 여보. "

내가 정답을 맞히지 않아도 그대로 넘어가 준다니, 아내의 기분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 그러면 지금부터 네가 범한 잘못을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들어. 만약에 지금 알려준 이후부터 다시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넌 한대로 안 끝나. 알아들어? "

" 아, 알아들을게요. 알려만 주신다면 다음부터는 그런 일은 안 벌어질 거에요. 믿어주세요. "

" 좋아. 그럼 알려줄게. "

" ... "

" 너, 내가 아무리 허락을 했어도,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공적인 대화만 나눌 것이라도, 조별 과제를 해야 해서 바쁜 상황이라도 나한테 따로 보고도 안 하고 여자들만 있는 단톡방에 들어가면 어떡해? "

" 아.... "

" 제정신이야? 따로 나한테 카톡을 보낸 것도 아니야, 전화로 말한 것도 아니야. 이 집안의 기둥을 담당하고 있는 내가 밥을 먹는 도중에 네 핸드폰에서 울린 알람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담배를 문 채 연기를 내뿜어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주었다.

" 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

그래,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원래 아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에 관한 일은 아내에게 무조건 보고를 하고 아내의 의견을 받아 행동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섣부르게 행동한 것 같았다.

" 그래, 잘 알아듣네. 네가 나한테 제일 처음 혼이 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야. 감히, 나한테 보고도 하지 않은 점, 그리고 내가 그러한 소식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점. 바로 이 두 가지지. "

" ... "

" 하여튼, 내가 이렇게 친히 말해줬으니 유진이가 한 번에 알아들었을 거라고 난 생각하거든? "

" 네, 아, 알아 들었어요. 아, 아주 확실하게! "

" 흠,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남편이지. "

담뱃불을 그릇에 비벼 끈 그녀는 꽁초를 밥그릇에 넣고서는 배를 두들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 내 잘못이야. '

내가 멋대로 행동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내가 아내에게 훈육을 당한 거야. 즉, 자업자득이지.

전부 내 잘못이야. 모든 게 내 잘못이야.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고쳐나가야 해.

" 유진아.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자. 네가 평소에 하던 것처럼 말이야. 알았어? "

" 네. 조, 조심할게요. "

다시 식탁 한쪽에 놓여 있는 수저를 꺼내 밥을 먹는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속으로 끝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이번에도 저번과 똑같이 모든 게 자기의 잘못이라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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