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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24화 (24/77)

〈 24화 〉 지옥의 조별과제

* * *

늦은 저녁 시간.

흔한 가로등 하나 설치되어있지 않은 골목길에 집이 있어서 그런지 어느새 창문 바깥의 풍경은 굉장히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형광등으로 인해 마치 대낮처럼 환한 풍경을 유지하고 있는 집안에서 분홍색 앞치마를 단단히 동여매고 있는 청년, 오유진은 자그마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 하아. "

하지만 무언가 풀리지 않는 것처럼 낭패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린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곧바로 등을 의자에 푹 기대고서는 말린 반건조 오징어처럼 의자에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 너무 힘드네. "

장시간 목을 빼고 컴퓨터를 들여다봐서 그런 걸까?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빨갛게 색칠된 것처럼 충혈된 눈까지 몸 곳곳에서 심한 격통이 나에게 선사되었다.

'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네. '

단순히 번역기만 돌려서 보내주면 될 것 같아 일찍 끝날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자료를 찾아보고 번역기를 돌려 어색한 문장을 최대한 안 어색하도록 스스로 고치고 발표 시간을 맞추려 양도 꽤 많이 채워야 하며 심지어 조에 민폐를 끼치던 한 사람이 해야 하는 몫까지 맡아서 해야 하므로 예상과는 다르게 꽤 시간이 걸리고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찾아보고 조원과 카톡으로 소통을 하면서 문장에 대한 교정도 같이하다 보니까 쨍쨍하게 빛나던 창밖이 어느샌가 어둑어둑해져 버렸다.

" 아, 뻐근해. "

이럴 때는 편안하고 폭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 자동으로 안마를 해주는 안마의자의 혜택을 받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에 그런 사치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손을 말아 쥐고서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최대한 목과 어깨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최대한 줄일 뿐이었다.

' 안 되겠다. 조금만 쉬자. '

격렬하게 내 몸이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의자 앞에 앉아서 목을 쭉 뺀 채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 키보드를 붙잡고 있다가는 골병이 날 게 확실했으므로 그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었다.

스트레칭을 마친 그는 다른 행동대신 곧바로 핸드폰을 붙잡고 조원들이 모인 카톡방에 짧은 글을 남겼다.

유진­>[저,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까요?]

민규리씨­>[아, 괜찮습니다. 애초에 그런 건 저한테 물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다음 주까지 기한이 있으니까 다음 주까지만 자료 보내주셔도 괜찮으니 너무 몸 혹사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진­>[그래도, 제가 제 입으로 오늘 끝낸다고 말했는데 시작한 김에 끝내야죠. 조금만 쉬고 곧바로 다시 정리한 다음 자료 곧바로 보내드릴게요]

정예나씨­>[아이고, 아닙니다. 학생이기 전에 주부 일을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렇게나 열심히 해주시니 저희야 정말 감사할 따름이네요. ㅠㅠ]

민규리씨­>[예나 씨 말대로입니다! 쉬엄쉬엄하셔도 괜찮으니 몸부터 챙기세요! 남편으로서 아내분도 챙기셔야 하잖습니까!]

유진­>[아하하.... 배려 감사드립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말을 카톡방에 남긴 뒤 그는 화면을 끄고서 곧바로 방 밖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안방을 나서 밖으로 나오자 주방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저녁상이 나를 반겼다.

" 계속 이대로 놔두면 식어버릴 텐데. "

집에 돌아와서 빨래와 청소를 끝내고 곧바로 아내에게 주기 위해 만든 저녁밥이 혹시나 식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소고깃국은 다시 끓이면 되고 기본적인 반찬은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되겠지만 메인메뉴인 고등어구이는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키친타월과 비닐로 덮어놓긴 했지만 저대로 계속 놔둔다면 분명 맛이 없어질 텐데 말이야.

" 혹시, 식었나? "

비닐과 키친타월을 걷어내고 손가락으로 고등어를 살짝 눌러보자 다행히도 아직은 뜨거운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 이 정도면 괜찮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아내도 돌아올 것 같고. "

어느새 시계의 초침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아내가 따로 늦어진다는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곧 있으면 도착을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현관문에서 울려 퍼지는 도어락 소리.

삑ㅡ 삑ㅡ 삑ㅡ

생각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도착해버렸네.

기지개를 피며 최대한 몸을 풀어주고 있었던 그는 곧바로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서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쪼르르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 나 왔어. "

검 두 자루를 허리춤에 꽂고 옷 소매에 초록색 피를 잔뜩 묻힌 채 항상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들어오던 때랑은 다르게 오늘은 깔끔한 모습을 유지한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아내를 향해 늘 하던 것처럼 난 고개를 숙였다.

" 오셨어요? 여보? "

" 역시, 마중 나와 있었네? "

씩 미소를 지으며 신발장에 신발을 넣지 않고 대충 휙휙 벗어던져 버린 그녀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치 재롱을 부린 강아지를 자랑스러워하듯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 만져주었다.

" 언제나처럼 마중 나와 있으니까 좋네. 오늘 안 그래도 같이 일하는 결혼한 동료가 자긴 집에 돌아갈 때마다 남편이 마중을 안 나와서 속상하다고 말해서 나도 오늘 네가 마중 안 나와 있으면 혼내려고 했는데 다행이네? "

" 아, 그,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

마중을 안 나오다니.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다. 만약 내가 그런다면 그날은 머리카락이 전부 뜯기고 죽은 몸으로 네발로 기어서 집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까?

" 그렇다니까? 아, 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니까? 돈 벌어와 주는 하늘 같은 아내님이 집에 돌아왔는데 버선발로 후다닥 뛰쳐나오지는 못할망정, 마중도 안 나온다고? 그건 건방진 걸 뛰어넘어서 아내를 무시한다는 행동이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진아? "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손길이 어느샌가 그의 얼굴을 타고 가슴 쪽으로 내려갔고 옷 위로도 느껴지는 투박하고도 거친 손길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 아, 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 역시. 그래야지. 그래야 내 남편이지. "

반들반들한 그의 가슴을 한 번 움켜쥔 그녀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칼을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리고 하품을 크게 내쉬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쪼르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는 바닥에 내팽개친 두 칼을 힘겹게 두 손으로 들어 세워 가지런히 정리한 뒤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외쳤다.

" 아, 여보. 혹시 곧바로 씻으실 건가요? "

" 뭐, 오늘은 바쁘지는 않아서 평소보다는 깨끗하긴 한데 그래도 일은 하고 왔으니까 곧바로 씻어야지? 무슨 문제 있어? "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 움직인 그녀를 향해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 아, 그게 사실 제가 오늘 조별 과제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만들었는데 저대로 계속 놔두면 식어버릴 것 같아서.... "

" 저녁을 일찍 만들었다고? 뭐 만들었는데? "

" 아, 그게 소고깃국은 다시 끓이면 되고 기본 반찬은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되긴 하는데 고등어를 구워버려서 저대로 계속 놔두면 식을 것 같아서 마, 말해봤어요. 아직 따, 따뜻하긴 한데 혹여나 해서... "

혹여나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며 아내의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행동에 잠시 그녀가 입맛을 다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래? 음, 그러면 그냥 먹고 씻어버리지. 어차피 오늘 크게 더러운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출근할 때랑 별로 다른 상태도 아니니까 말이야. "

" 아, 그, 그러시려고요? "

" 어, 그러려고. 그거 먼저 한다고 몸이 닳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먹고 씻어버리지. 이거 그대로 먹으면 되는 거 맞지? "

잠시 고민의 기색을 내비치던 그녀는 곧바로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서는 화장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틀어 식탁 의자를 꺼내 그 자리에 풀썩 앉았다.

" 네. 구, 국은 아직 따뜻하긴 한데 그래도 조금 데워드릴게요. 나머지 반찬은 지금 곧바로 드셔도 괜찮아요. 아, 아직 따뜻하니까... "

곧바로 몸을 돌려 얼른 국을 다시 끓이려는 그의 행위를 제지하는 그녀의 외침.

" 아니야. 그냥 적당히 따뜻해도 되니까 그냥 소고깃국까지 전부 내와. 너무 펄펄 끓으면 또 국 자체의 본연의 맛을 잃는 법이라고. "

" 아, 네. 알겠어요. 고, 곧바로 덜어드릴게요. "

대충 외투를 의자에 걸어놓은 뒤 옷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는 남편이 내오는 국그릇을 받아들이고 제일 먼저 젓가락을 들어 비닐과 키친타월을 벗긴 다음 고등어구이를 뜯어 한 점 먹어보았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에 아내가 내릴 평가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난 조심스레 그녀의 앞에 앉고서 식탁 밑으로 손을 모아 아내의 평가가 좋길 하늘에 기도했다.

" 음, 맛있어. 괜찮게 구웠네. "

소금으로 간할 때 너무 많이 간을 한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입맛에 맞나 보네. 정말 다행이다.

" 무슨 조별 과제 하는 거야? "

늘 하던 것처럼 밥을 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물어보는 아내의 질문에 나는 내가 만든 밥을 맛있게 먹는 아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 그, 그냥 영어 조별 과제에요. 자료 찾아서 번역기 돌리고 기입하고 하는 건데... "

" 그러면 일찍 끝나는 거 아니야? 뭘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 대충 써서 번역기 돌리고 복사 붙여넣기 하면 끝나는 거 아니야? "

" 아,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고 문장도 어색한 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받을 거 같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집중해서 꼼꼼하게 하느라 아직 하고 있어요. "

" 그래? 뭐, 과제를 주면 열심히 해야지. 우리 유진이가 대학교 생활을 아주 잘 이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네. "

" 열심히 해서 좋은 학점 받고 장학금도 받고 자격증도 따서 어, 얼른 여보의 짐을 덜어줘야죠. 그, 그게 제가 대학교에 다니는 이유인걸요. "

" 그렇지. 역시 우리 유진이야. 남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참 좋단 말이지. 참, 나 입 좀 헹구게 물 좀 컵에 담아와. "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그녀는 숟가락으로 그의 뺨을 톡톡 때려주고서 곧바로 싱크대 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큰 생수병을 가리켰다.

" 네, 알겠어요. 여보. "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위 선반을 열어 큰 크기를 자랑하는 대용량 컵을 꺼내 생수병의 뚜껑을 열었다.

" 그나저나, 조별 과제면 조 만들어졌겠네? 몇 명이나 있어? 보통 네 명 아니야? "

" 아, 워, 원래 네 명이었는데 지금은 세 명이 돼버렸어요. 그, 나가신 분이 남자분인데 조원분이랑 다투신 다음 자기가 못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나가버렸어요. 그, 그래서 저희가 그 분 것도 전부 도맡아서 하고 있고. "

" 제대로 시작도 안 하고 나갔다고? 에휴, 팀플레이에서 그딴 거지 같은 짓거리를 한다고? 하여튼 그런 건방진 새끼들은 한 번씩 짐승 때리듯이 거칠게 때려주면서 그 거만한 태도를 고쳐줘야 하는데 말이야. 내가 혹시나 말하는 건데 유진이 너는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지 마. "

" 저는 절대로 아, 안그래요. "

"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 그런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온다면 내가 아가리를 다 찢어버릴 테니까. 그러한 행동이 아내인 내 얼굴에도 먹칠하는 행동인 거 알지? "

마치 쌍절곤을 휘두르듯 숟가락을 교차하면서 휘두르는 그녀의 행동에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 저, 절대로 안 그래요. 제,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여보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

" 그렇지. 우리 유진이가 그럴 인물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있잖아. 그냥 조심하라는 이야기야. 언제든지 대비를 하는 게 중요한 법이잖아? "

그때였다.

카톡ㅡ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의 화면이 켜지면서 나와 아내 사이의 대화를 저절로 멈추게 만들었다.

카톡ㅡ

카톡ㅡ

카톡ㅡ

곧이어 세 번 정도가 이어지는 카톡 알림음에 나는 황급히 핸드폰의 화면을 켜 알림음이 울린 이유를 알아보았는데 단톡방에서 조별 과제에 대해 규리 씨와 예나 씨가 이야기를 나누느라 알림이 울린 것이었다.

내가 미처 무음으로 바꾸지 않고 단톡방의 알림음을 끄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핸드폰의 알림을 무음으로 바꿔놓은 뒤 살포시 핸드폰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 ... "

하지만 황급히 카톡 알림을 확인하고 핸드폰의 알림을 무음으로 바꿔버리는 그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진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웃음을 띠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고 그녀는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남편을 향해 물었다.

" 누구야? "

그녀의 눈이 악귀처럼 흉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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