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22화 (22/77)

〈 22화 〉 지옥의 조별과제

* * *

" 개운하네. 아까부터 말려서 짜증 나 죽는 줄 알았는데 피고 오니까 세상 개운하네요. "

강의실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오는 지운의 온몸에서 풍겨 오는 독한 담배 냄새에 저절로 손가락을 들어 두 코를 틀어막았다.

아내가 집안에서 담배를 필 때도 있어서 웬만한 담배 냄새에는 적응을 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이분은 그 경우가 너무 심각한 것 같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부터 시작해 나풀거리는 옷에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독한 담배 냄새 때문에 결국 나는 살짝 붙어있던 의자를 약간 옆으로 옮겨 최대한 그와 거리를 두는 수를 선택했다.

" 그나저나 제가 다 피고 올 때까지 생각은 바뀌셨어요? 뭐, 당연히 남자가 그 정도로 말하는데 바뀌셨겠죠? "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어투가 튀어나오자 그녀의 눈썹이 살짝 떨림을 보였다.

" ....아오, 진짜. "

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에 다시 분노가 차오르며 목구멍까지 욕이 차오른 걸까? 몸을 들썩거리는 규리 씨의 옷깃을 예나 씨가 잡고서는 참으라는 표시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었다.

" 후. 하긴, 그렇네요.. 저희는 지성을 가진 인간이니까 거기에 맞게 행동해야 하겠죠. "

옆 사람의 만류에 다시 한번 이성을 찾은 민규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지성인답게 말을 이어갔다.

" 그러면, 지금 지운 씨의 불만은 제가 점수를 더 받는 것에 있다는 것 맞죠? "

" 당연하죠. 왜 당신만 더 점수를 받아 가냐 이 말인 거에요. 다들 똑같이 일을 하는데 왜 하필 그쪽만 더 받아 가냐고요. "

"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PPT 제작부터 시작해서 조별 원과의 대화 창구를 여는 조장의 역할을 맡고 또한 마지막으로 발표까지 모두 제가 담당할 텐데 제가 여러분들보다 점수를 조금 더 받아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요? "

" 왜 당신이 그 역할들을 멋대로 맡으시는 건데요? 누구 맘대로? "

눈을 세로로 뜬 채 팔짱을 끼고서 밋밋한 가슴을 부각하면서 자신이 불만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제대로 티를 내는 그의 투덜거림에 민규리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 다른 조원분들이 안 한다고 말을 했으니까 제가 나서서 맡겠다고 말한 겁니다. 다른 조원분들도 전부 동의를 한 사실이고요. 저기, 예나 씨? 혹시 제가 이 세 가지 역할을 맡는 데 불만이 있으신가요? "

" 없어요. 오히려 귀찮은 일들을 맡아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

" 그럼, 혹시 제가 맡은 세 가지 일 중에 맡고 싶은 역할이 있으십니까? 있으시다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곧바로 양보해드리겠습니다. "

" 아니,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귀찮은 것들을 하는 건 딱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죠. "

휘파람을 불며 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는 정예나. 그다음 그녀의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 그럼, 유진 씨는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건지 ㅇ... "

그녀의 말을 끊고 훅 들어오는 유진의 대답.

" 없어요. 솔직히 저는 PPT 제작이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괜히 애매한 실력을 갖춘 저보다 더욱 잘할 것 같으신 분에게 맡기고 싶거든요. 그리고, 애초에 저라는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바, 발표나 조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

"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제가 이 세 가지 역할을 맡는데 딱히 큰 불만이 없다는 게 맞으시죠? "

없다.

솔직하게 나는 불만이 없다.

교수님이 채점하는 과정에서 조원끼리의 뜨거운 우정과 의리 따위를 채점 방식에 넣을 것 같은가? 조별 과제는 오로지 결과로만 채점하는 방식이다.

과정이 얼마나 거지 같아도 오로지 결과만 잘 나오면 장땡이라는 것. 그러니, 괜히 애매한 실력을 갖춘 내가 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사람이 그 역할들을 맡는 게 더욱 긍정적인 법이다.

" 네. ㅈ, 저는 불만 같은 건 없어요. "

" 그렇군요. 그럼, 잘 보셨죠? 보시다시피 다른 조원분들이 제가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 데 딱히 반대를 하지는 않으시고 할 마음도 크게 없으셔서 제가 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선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제가 멋대로 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앞서 나간 게 아닙니다. "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는 그녀를 빤히 노려보던 지운은 기가 찬다는 듯이 썩은 미소를 띠더니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면서 언성을 서서히 높이기 시작했다.

" 저한테는 안 물어보셨잖아요?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아 놓고서는 뭘 멋대로 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앞서 나간 게 아니라는 뻔뻔한 변명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여자가 그럴 수가 있어요? "

" 그렇군요. 그쪽한테는 물어보지 않았네요. 그러신다면 지금 여기서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지운 씨는 제가 맡고 있는 역할들 중에 본인이 나서서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할 수 있으니 맡고 싶다는 역할이 있으십니까? "

" 아니요. 없는데요? "

순간 짧게 흐르는 침묵.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보았지만 놀랍게도 내 귀는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조차도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지운 씨의 화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 당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규리 씨는 오죽할까?

당연히 그녀의 얼굴은 '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 라는 표정을 지은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그러니까, 제가 맡은 세 가지 역할 중에 하고 싶으신 역할이 없으시다는 거죠? "

" 사람이 한번 말하면 제대로 알아들으세요. 없다니까요? "

" PPT 제작은 왜 하기 싫으신 거죠? "

" 저 아르바이트 해야 해서 그런 거에 목매달고 있을 시간 없어요. 그리고 자료 조사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제가 그런 것까지 만들라고요? 애초에 저 PPT 만드는 법도 몰라요. "

" PPT를 만들 줄 모르신다고요? 아니, 그럴 수가 있나요? 보통 어릴 때 한 번씩 만들어보지 않나요? "

PPT를 만들 줄 모른다는 건 도대체 무슨 헛소리지?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무조건 사용하게 되는 프로그램인데 말이야.

" 그런 건 항상 여자애들이 만들어서 갖다줬으니까 할 줄 몰라요. 그리고 남자가 모를 수도 있죠? "

" 허.... "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사라져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 그러면 발표는 왜 하기 싫으신 거죠? "

" 남들 앞에 나서서 광대처럼 떠들기 싫어서 그런 거죠. 싸 보이잖아요? 남자는 어느 상황에서나 비싸 보여야 하는 법이에요. "

" 남들 앞에 서서 발표하는 게 도대체 왜 싸 보인다는 거죠? "

" 아, 그냥 딱 봐도 싸 보이잖아요? 광대처럼 남들 시선 다 받아 가면서 앞에 서 있는 게 그냥 싫은 거에요. 그리고 원래 그런 건 여자들이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 "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먹이면서 대충 둘러대고 있는데 말의 아귀가 앞뒤가 아예 들어맞지 않고 있다. 아마, 본인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마 모르는 게 백 퍼센트겠지.

급격하게 피곤해 진 걸까? 민규리는 손가락으로 퉁퉁 부을 것 같은 눈두덩이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허, 그러면, 조장 역할은 왜 맡기 싫으신 거죠? "

" 그건 귀찮아서요. 조장 역할 맡으면 다른 조원들한테 연락도 돌리고 챙겨야 하잖아요? 저는 굳이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거든요. 어차피 이 조별 과제가 끝나면 전부다 남남 될 사이일 텐데 일일이 연락 돌리기도 기분 나쁘고 귀찮은 걸요? "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내가 할 말이 다 없어져 버렸다. 이유라도 조금 성의있게 붙이던가, 하나같이 핑계들 모두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악의적인 말뿐이었다.

" 아이참,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되지. 이것저것 캐묻는 거 보니까 되게 깐깐하시네요? 여자가 센스 있게 슉슉 넘어갈 줄 알아야지. 쯧. "

" 하……. 아.... "

마치 바위랑 이야기하는 것처럼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말싸움 사이에 끼인 나와 예나 씨는 그저 최대한 의자를 뒤로 댕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약 일 분간 이어지는 침묵.

아마, 지금 아무 사람들 주머니 속에 있는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켜면 당장 폭발을 하지 않을까? 라는 오해가 생길 정도로 조원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는 도저히 없어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의자에 앉은 채 볼펜 끝자락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는 이제 복잡해진 머릿속이 완벽하게 정리가 된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아직까지 팔짱을 끼고 콧대를 잔뜩 세운 정지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지운 씨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그 역할들을 맡아서 받는 추가 점수는 탐이 나는데 막상 하기는 귀찮고 싸 보여서 그 역할을 맡기는 싫은데 다른 사람이 맡아서 그걸 먹는 꼴은 못 보겠다 이 말인 거죠? "

정지운의 뼈를 때리는 사실만이 담긴 묵직한 공격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 어머, 말씀을 하셔도 왜 그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마치 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속 좁은 남자처럼 들리잖아요? "

손톱 사이를 긁고 입바람을 불면서 마치 자신이 언제 그렇게 말을 했냐는 듯이 뻔뻔하게 다시 한번 눈을 세로로 뜨는 그의 표정에 규리 씨의 표정이 점점 더욱 일그러져 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손이 주먹을 쥐고 거기에 힘이 점점 더해져 가는걸 보아하니 슬슬 한계점에 도달해가는 것으로 보였다.

"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즉, 일은 하기 싫은데 일을 열심히 하고 더 많이 한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대가를 받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

" 아닌데요? 저도 일하잖아요? 자료 조사해서 번역기까지 돌려서 작성할 건데 왜 말을 그딴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남들이 들으면 절 아무것도 안 하는 병신새끼로 오해하겠어요. "

" 그거 조사하는 거랑 이것들이랑 과제의 양이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끊임없이 평행선을 이루는 둘의 대화에서 먼저 지친 사람은 정지운이었다.

영원히 풀 것 같지 않던 팔짱을 푼 그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을 띠고서 손으로 책상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 그냥 거기서 거기죠. 아씨, 짜증 나게 하네. 그냥 남자가 말하면 한 번에 알아듣고 알았다고 대답하세요. 괜히 이것저것 사족 붙여서 짜증 나게 만들지 말란 말이에요. "

정지운은 민규리와의 말싸움에서 본인이 밀린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더 이상 사람 대 사람과의 말싸움이 아닌 남자와 여성의 말싸움으로 끌고 가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약간의 존대도 섞지 않고서 상대에 대한 짜증만이 가득 담긴 악의적인 어투가 섞인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더욱더 짙은 잿빛이 드리워졌다.

" ... "

" 뭐, 어려운 거 말한 것도 아니고 이런 거 가지고 꼬치꼬치 캐묻고 이리저리 말 돌리고 지랄이야. 저기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남자들한테 욕먹고 다녀요. "

" 하, 진짜 내가 살다 살다 별별 사람을 봤는데 그쪽 같으신 분은 처음 봅니다. 모든 인간의 악의적인 군상을 전부 섞어놓는다면 아마 그쪽이 창조될 것 같은데 알고 계십니까? "

" 그건 그쪽도 똑같은 것 같은데요? 여자가 남자를 존중해주고 떠받들고 소중하게 대할 줄 알아야지. 사돈 남 말 하고 계시네. "

" 옆에 앉아계신 유진 씨랑 같은 성별일 텐데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니. 한쪽이 떨어져도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이렇게 밸런스가 안 맞을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

규리 씨도 더는 존중 따위는 해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지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을 서슴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 남자 앞에 두고 여자가 조금 뭐라 욕먹었다고 바로 구시렁거리는 거 봐. 그딴 식으로 행동하지 마요. 여자가 속 좁게 뭐 하는 짓이에요? 누나 하는 거 보니까 백 퍼센트 처녀막도 못 뗀 아다일 것 같은데... "

" ... "

하지만, 그녀의 발언에 상처는커녕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인지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그의 말에 그녀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때였다.

" 남자친구 없죠? 풉. "

피식 들리는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상대를 깔보는 눈빛.

그 순간 그녀의 이성이 끊어졌다.

" 야 이 씹새끼야! "

규리 씨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고 그녀의 옆에 앉아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예나 씨도 일어나 온몸을 던져 필사적으로 규리 씨를 막아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