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지옥의 조별과제
* * *
" 일단, 다들 저희 조별 과제 주제가 뭔지 아시죠? "
아무런 대답 없이 흐르는 적막.
방금 교수님이 주제까지 설명해주시고 나가셨는데 다들 못 들으신 건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분들의 첫인상을 놓고 봤을 때 못 들었다기 보다는 안 들었다는 게 알맞은 표현이겠지.
" 방금 교수님이 설명해주시고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 진짜로 모르시는 건가요? 하아.... "
저절로 암이 발생하는 걸까? 말끝에 약한 신음을 내며 그녀는 쓰고 있던 안경을 잠시 벗은 뒤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규리 씨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분은 딱히 대답해줄 마음도 없고 주제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냥 내가 대답해줘야 할 것 같네.
" 여행이라는 주제로 여러 가지 풀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해 각 조원이 4명씩이니까 총 4가지 이상의 의견들을 영어로만 정리해 PPT로 만들어라. 아, 아닌가요? "
" 오? 맞습니다. "
" 그리고 발표 시간은 무조건 3분 이상을 넘길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각각의 발표자료에 알맞은 사진이나 참고 자료도 무조건 한 개 이상을 넣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 전부 다 맞습니다. 다행히 유진 씨는 교수님이 말한 이야기를 잘 기억하시고 계신 것 같네요. 진짜로 고맙습니다. "
자신의 말에 올바르게 대답을 해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악수라도 하려는 걸까? 그녀의 손이 책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유진의 손가락을 향해 움직였다.
' 아. '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피해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다시 책상 밑으로 내려놓았다.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에 민규리는 뻘쭘한 것인지 입맛을 한 번 다시고 곧바로 말을 돌려나갔다.
" 큼, 자, 일단 주제는 이제 다 아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유진 씨가 말한 것처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거기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이번 조별 과제에서 시행해야 하는 점입니다."
" ... "
" 솔직히 말해서 조별 과제라고 부르기에는 그 수준이 굉장히 쉬운 편이죠. 다들 집에 컴퓨터 한 대씩은 다 있잖아요? 간단하게 자료만 조사하고 번역기만 돌려서 PPT를 만드는 사람한테 보내주기만 하면 되니까 난이도가 절대로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과목들의 조별 과제처럼 무조건 강제적으로 카페같이 한 공간에 모여서 머리를 싸매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각자 자료만 조사해서 번역기를 돌리고 책임자한테 그 내용을 보내주기만 하면 되니까 이 조별 과제는 정말 쉽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 큰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여러분들도 그렇고 저도 인터넷의 힘을 빌려서 자료를 찾을 거니까 기껏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봤자 30분을 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다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조금만 시간을 할애해서 좋은 협조를 보여줬으면 좋을 것 같네요. "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모두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충분한 동의의 표시를 받은 그녀는 일이 잘 풀려나간 것에 대해 기쁨을 숨기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역할을 분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조장이 있는데 혹시 하시고 싶은 분 계신가요? "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으며 나 또한 손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마치 먹이를 물색하는 하이에나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조장이라는 막중하면서도 귀찮은 역할을 맡아줄 희생양을 찾아내고 있었다.
" 아무도 없으신가요? 유진 씨는 조장해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
그 탐지 망에 제일 먼저 내가 걸린 것인가? 갑자기 나를 호명하는 말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 네? "
" 조장해보실 생각 진짜로 없으세요? "
조장해볼 생각 없냐고요?
" 아, 죄, 죄송합니다. 조장은 조금 부, 부담스러워서 잘 못 할 것 같아요. "
조장은 무리다.
조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면 조의 구심점으로서 카리스마 있게 사람들을 휘어잡거나 아니면 잘 다독여서 조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것을 올바르게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이리저리 끌려만 다닐 것 같기 때문에 괜히 내 분수에 넘치는 역할을 일부러 나서서 수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 아쉽네요. 그럼 유진 씨가 안 한다고 하면 남은 두 분 중에서 혹시 하실 분이 있으신……. 아닙니다. 그냥 제가 조장하겠습니다. "
오유진을 제외하고 차라리 남은 두 사람에게 맡길 바에는 차라리 본인이 그 짐을 짊어지고 말겠다는 마음을 먹고서 민규리는 결국 본인이 스스로 조장 역할을 자처했다.
"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조장답게 PPT 제작과 발표도 제가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하기 싫은 사람한테 맡겼다가 이상하게 결과물이 나올 바에는 제가 전부 다 도맡아서 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으니까요. "
혼자서 그렇게나 많이 하신다고?
" 호, 혼자서 그렇게 많이 하신다고요? 힘 드실 텐데... "
괜히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게 만들고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가만히 뒤에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손사래를 휘저었다.
" 괜찮습니다. 이게 뭐 그렇게 어려운 조별 과제도 아니고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꼭 말해두고 싶은데 PPT 제작과 발표 그리고 조장도 제가 수행을 하니 가산점이나 점수 측면에서는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
이건 무조건 인정한다.
억지로 역할을 떠맡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제일 귀찮고 어려운 것들을 스스로 떠맡아서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남들이랑 똑같은 점수를 받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규리 씨가 우리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면서 동의의 표시를 나타내주었다.
" ....뭐, 그렇게나 열심히 하신다는데 우리보다 점수를 더 받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딱히 거기에 대해서 왈가불가할 말은 없습니다. "
깔깔이를 입은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예나 씨도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할 말이 없는 것인지 규리 씨의 제안에 반대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 흔쾌히 동의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럼, 다들 동의해주신 거로 알고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냐면 일단 저한테 연락 ㅊ.... "
그때였다.
" 저기요, 제 의견은 왜 묻지도 않고 건너뛰는 거예요? 저는 그 말에 동의 못 하겠는데요? "
옆에서 들려오는 개가 짖는 소리에 셋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팔짱을 끼고 다리도 꼰 채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한쪽 눈을 치켜 새우고 있는 지운 씨가 규리 씨를 따갑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순간 이들에게 미묘하게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민규리가 먼저 깨고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 왜 동의를 못하시는 거죠?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될 게 있었나요? "
" 우리보다 점수를 더 받는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건데요? 조별 과제를 한다는 것은 다 같이 고생을 한다는 건데 그쪽만 점수를 더 받는 건 형평성에서 어긋나는 것 같아서 말이죠. "
" ......하. "
충격에 할 말이라도 잃어버린 걸까? 민규리는 헛웃음을 내뱉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면 지운 씨가 조장이나 혹은 PPT 제작, 그게 아니면 발표,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볼 태도인 것인지 규리 씨는 곧바로 굳은 표정을 정상적으로 바꾸어놓고서는 친절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 아니요? 없는데요?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생뚱맞은 대답이었다.
" 네? "
" 아르바이트 갈 시간도 없어서 바빠 죽겠는데 제가 언제 PPT 제작도 하고 발표도 준비하고 조장 노릇을 해요? 원래 그런 건 시간 남는 사람이 전부 다 도맡아서 해야 하는 법인 거 몰라요? "
" .... "
내가 들어도 꽤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과연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조금의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얼굴을 띄고 있는 우리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클러치백을 열어 담배를 꺼냈다.
" 남의 점수를 쪽쪽 빨아버리려 하다니, 양심이 있으셔야죠. 누나. 그리고 왜 남은 두 분은 가만히 듣고만 계신 거예요? 본인이 사기당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
저기, 죄송한데 규리 씨가 한 건 사기가 아니라 정당한 요구를 한 것뿐인데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러한 말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일은 없었고 나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다들 그렇게 소심해서야 세상 살겠어요? 아무튼, 본인 혼자서 좋은 점수 받으려는 거 저는 못 봐주니까 알고 있으세요. 저 담배 피우고 올 때까지 한 3분 정도 걸리니까 그때까지 의견 바꿔놓기 바랄게요. "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챙긴 채 강의실 밖을 나가는 그는 엉덩이를 씰룩쌜룩 움직이면서 저 멀리 사라졌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마자 욕설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들은 규리 씨는 허탈하다는 듯이 초연한 웃음을 보여주면서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책상에 세게 던져버렸다.
' 히끅. '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볼펜은 책상 한쪽에 부딪히고선 어딘지 파악하지도 못할 장소로 급히 안녕 날아갔고 그와 동시에 내 앞에 앉은 채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던 규리 씨의 얼굴도 흉악한 도깨비처럼 일그러졌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걸 보니 화산처럼 분출하려는 분노를 겨우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을 예나 씨도 눈치를 챈 것인지 그녀도 뻘쭘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는 규리 씨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 하아. 저 씨발 같은 새끼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개 같은 새끼가 내 앞에서 형평성을 들이밀고 앉아있네? 과연 저 새끼가 대가리를 단체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맞는 건가? "
" .... "
" 씨발, 봊같은 새끼가 다리 사이에 자지 달고 있는 게 벼슬인가? 다리 사이에 물건 하나 쳐 달고 있다고 지랄 염병을 처 떨고 있네. 머리채 잡고 몇 번 개 패듯이 패면 찡찡 울어댈 병신같은 새끼가 도대체 왜 가오를 쳐 잡는 거지? "
원색적인 모욕과 욕설에 같은 남성의 성별을 가지고 있는 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분명 나를 향해 내뱉는 욕설이 아니었지만, 겁을 저절로 먹게 되는 현상은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 봊도 생긴 게 연예인 뺨칠 정도로 잘생긴 것도 아니고 존나 며칠 전에 따먹은 보도남처럼 생겨놓고서는 존나 비싼척 구는 것도 역겨워 뒤지겠네. 씨발, 내가 저딴 새끼 비위를 일일이 하나하나 맞춰줘야 한다니. 진짜 씨발 존나 자괴감 드네. "
" ... "
" 아, 그냥 개 같네. 이 조별 과제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지네.저딴 새끼는 피고 있던 담뱃불로 그냥 온몸을 지져ㅂ...."
감정이 격화되고 욕설의 수위도 점점 올라가는 그 순간 그녀의 옆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예나가 손을 내밀며 그녀를 제지했다.
" 저기, 죄송한데 규리 씨? "
" 네? "
" 그, 화가 나시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주위 사람들도 귀가 있고 앞에 유진씨가 앉아계시니까 이제 거기서 그만 멈추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상하시면 조금 위험할 것 같거든요. 그래도 화가 안 풀리신다면 발언의 수위를 조금 낮추시는게.... "
그녀의 고개가 유진에게 향했다. 민규리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약하게 떨리는 유진의 몸.
자신이 이성을 잃고 바깥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은 걸 이제야 인지한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서 눈을 한 번 질끈 감고서 분노를 삼키는 한숨을 내뱉었다.
" ....하, 그럼 일단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진짜 죽여버리고 싶네. "
무서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