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지옥의 조별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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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빛이 내리비치는 무더운 날이었지만 에어컨이 빈틈없이 틀어져 있는 덕분에 건물 내부의 온도는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네 명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이곳만큼은 마치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케 하는 황량함과 냉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 ... "
" ... "
" ... "
" ... "
붙여진 책상, 서로를 마주 보며 앉은 4명의 남녀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볼펜을 돌리는 것을 반복했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주위의 눈치를 이리저리 볼뿐이었다.
'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결국 다가왔네. '
다른 사람이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열 손가락의 손톱을 모조리 물어뜯어 버렸을 것이다. 영원히 마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가 없는 노릇인가?
그렇다. 결국 다가오고야 말았다. 맞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학교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그 시간.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알아가는 시간.
대학 생활의 꽃이라고 불리면서 학생들 간에 협동심을 육성하고 또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 라며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행하는지 알 수가 없는 그 시간.
조별 과제.
이 두려운 단어가 코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아니지, 사실상 이미 겪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린 걸까? 난 당연히 오리엔테이션을 저번에 끝마쳤으니 이번에는 교재를 가지고 약간의 진도만 나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뿔싸, 그 예상을 모조리 뒤엎고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가는 첫날에 교수님께서 조별 과제를 던져주셔버렸다.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존재할 수가 있나? 원래 세계에서도 이런 상황은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신비한 일이다.
' 어떻게 첫날부터 조별 과제를 던져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제정신인 건가? '
그렇게 조별 과제를 던져놓고 본인은 사무실 안에 있겠다며 필요한 게 있으며 사무실로 달려오라는 말을 남겨두고 강의실 밖을 나서서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무책임한 교수님이 분명했다. 상식적으로 수업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나서 조별 과제를 던져주거나 진도를 어느 정도 뺀 다음에 조별 과제를 주는 게 상식이 아닌 건가?
' 이 수업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
오리엔테이션 때 교수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이미지를 ' 본격적으로 수업을 들어가는 첫날에 조별 과제를 내주는 몰상식한 교수님이 수업하는 수업' 이라고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큰일이네.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는 첫날부터 조별 과제를 내주는 성격이면 앞으로의 수업은 거의 이런 방식으로 나간다는 뜻인데 말이야.
' 하아. '
손을 휘두르면서 머리를 잔뜩 헝클인 다음 잡념에 빠진 머릿속을 살짝 가라앉히고서 고개를 살짝 들어보자 무심한 표정으로 각자 자기 할 것을 하는 남자 한 분과 여자 두 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분들은 교수님이 방금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전 본인 재량으로 분배를 해서 나와 조별 과제를 같이 수행하게 될 조원들이었다.
옷차림도 그렇고 화장도 본인들만의 개성을 넣어서 분칠을 한 걸 보니 다들 대학 생활을 재밌게 즐기시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학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게 확실해 보였다.
' 그런데 표정이 다들 안 좋으시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
아마 다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 어이없는 상황에 분노를 겨우겨우 마음속으로 삭히고 있겠지.
그 증거로 다들 인상이 굉장히 사나웠으며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기운을 엄청나게 뿜어대고 있었고 특히나 내 앞쪽에 앉은 동그란 안경을 끼신 여성분은 살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띠고 있었다.
' 차라리,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나마 상황이 괜찮았을 수도 있을 텐데... '
그래, 백번 양보해서 조별 과제를 내준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같은 조원이 된 사람들이 다 처음 보는 분들이라서 어떻게 대화를 해나가야 할지 걱정부터 들게 된다.
경섭 씨나 창우 씨가 같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수업은 같이 들을 수 있는 전공 수업이 아니라 따로따로 신청을 넣는 교양수업이었다.
안타깝게도 경섭 씨와 창우 씨는 수강 신청 때 중국어 교양을 신청했고 나는 영어 수업을 신청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시간에서만큼은 떨어져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조별 과제라는 것은 서로 간의 소통이 제일로 중요한 법인데 전공수업과는 다르게 난 이 사람들의 얼굴도 자세하게 모르고 심지어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가 제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 학점 중요한데... '
어느 것 하나라도 쉽게 대충 넘겨버릴 수가 없는 사정이 있는 나였기에 나에게 있어서 학점이 들어가는 수업은 뭐든지 전부 중요하게 작용을 해버린다.
그러므로 하기 싫어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이를 꽉 깨물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억지로라도 손과 발을 들고 부딪혀야만 했다. 그래야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좋은 학점을 받아야지만 지원 비용이 높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 흠, 이거 너무 조용하네요. "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서 살기를 풀풀 풍기던 안경을 낀 여성분이 머리를 긁으면서 낭패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을 읊조렸다.
그러자, 나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고개가 저절로 들렸으며 모두의 시선이 안경을 낀 여성에게 집중되었다. 한눈에 보아도 공부를 열심히 하실 것 같은 모범생의 관상이었다.
실제로 말하는 어투도 그렇고 이 어색한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하려는 것으로 보아하니 이번 조별 과제는 저분이 주축으로 서서 이끌어갈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 그래도, 이렇게 모였는데 무를 수도 없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저랑 똑같이 하기 싫을 텐데 저희가 하기 싫다고 해서 파투를 낼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요. 그렇죠? "
나는 말은 하지 않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과 눈치로 대충 동의의 표시를 나타내주었다.
" 이왕 모인 김에 그리고 처음으로 이행하는 조별 과제니까 열심히 해보도록 합시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면 울상지으면서 하는 것보다는 웃으면서 하는 게 좋잖아요? "
" ... "
" ... "
" ... "
정론이다.
" 자, 그러면 이제 싫어도 저희끼리는 친해져야 합니다. 조별 과제라는 건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럼, 어색한 분위기지만 저부터 먼저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석 공학과 19학번 22살 민규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옅은 박수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바로 내 옆에 앉은 얼굴을 찹쌀떡마냥 하얗게 만들어 목과 머리가 분리된 듀라한처럼 만들어버린 남성분에게 흘러갔다.
" 이런 거 굳이 꼭 해야 해요? 존나 하기 귀찮은데... "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이 짜증 난다는 듯이 손거울을 든 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투덜거리자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아난 민규리라고 말한 여성분이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서로 다 모르는 사이잖아요? 그러니, 소개는 필수라고 할 수 있죠. 남을 부를 때 인마, 야, 이런 거로 부를 수는 없잖아요? "
그건, 그렇지.
" 에휴, 그냥 자기들 편한 대로 부르면 되지. 찐따 같게 뭘 또 그런 걸 정하고 그러는 건지 원, 아씨, 머리 존나 푸석푸석거리네! 스트레스받으니까 더 이상해졌어. 어쩜 좋아! "
그러나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들어놓고 한 귀로 흘려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머리카락을 자꾸 만지며 팍 울상을 지으며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았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개념이 없는 행동에 눈치를 살짝 보며 고개를 돌리자 또다시 이마에 솟아오르는 굵은 힘줄이 그녀가 화를 꽤 많이 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 그나저나 시작하기도 전에 불안 불안하네. '
파트를 나눈 것도 아니고 역할을 분담하는 시간도 아니고 그저 자기소개하는 시간인데 벌써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로 보아 이번 조별 과제는 절대로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지 않아 보인다.
" 후, 저기요. 머리 스타일은 매우 괜찮으시니까 일단 손거울을 잠시 내려두시고 본인 소개만 간략하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
" 하려고 했는데 왜 자꾸 재촉하세요? 별꼴이야. 아, 피부 어떡해? 너무 이상해졌어! "
인제야 손거울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서는 팔짱을 낀 채, 마치 도도한 여왕처럼 고개를 세우고서 그는 우리를 향해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 패션디자인학과 21학번 20살 정지운이라고 해요. "
" 네. 정지운이라, 예쁜 이름이네요. 예쁜 이름만큼 좋은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그다음 사람이 바로 소개해주시겠어요? "
지운 씨에게서 눈길을 떼서 곧바로 앞으로 옮기자 일명 마법의 옷, 입기만 해도 사람이 저절로 불량해진다는 옷으로 불리는 깔깔이를 입고 후줄근한 추리닝과 슬리퍼를 신은 채 무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흑발의 여성이 큰 하품을 내쉬면서 핸드폰을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 전기과 18학번 23살 정예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
학번 진짜로 다양하네. 한 조에 20살, 21살, 22살, 23살 전부가 모여있다니. 테트리스도 아니고 끼워 맞추기 한 번 제대로 돼버렸네.
자연스레 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모두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해본 적이 있어서 그나마 저번보다는 마음이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저절로 쥐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고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본인의 소개를 시작했다.
" 마석 관리과 2, 21학번 21살 오, 오유진이라고 합니다. 조, 조별과제 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
" 유진 씨도 이름이 예쁘시네요. 그리고 말을 약간 더듬으시는 데 혹시 불편한 곳이라도 계신가요? 그런 점이 있으시다면 제가 따로 배려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
불안했다.
아니, 불안하기보단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성분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불편하고 두려웠다. 또한, 아내가 해준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올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두려움도 스멀스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다 같이 협동을 해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하는 조별 과제였기 때문에 내가 불편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죄책감이 들어도 같이 어깨를 맞대고 마음을 맞춰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만큼은 숨길 수 없었던 그는 평소보다 더욱 자신의 손을 책상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말에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 아, 아니요. 불편한 점은 없어요. 말을 더듬는 건 원래 평소에도 자주 그러니까 시, 신경안쓰셔도 괜찮아요. 긴장하고 부끄럽고 무, 뭔가 무서워서 그런 거라서……."
" 그러시다면 뭐, 상관없겠네요. 자, 그러면 자기소개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회의 단계에 들어가서 역할도 배분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볼 건데 그 전에 제가 여러분께 꼭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진 씨는 원래도 잘 듣고 계셨고 지운 씨랑 예나 언니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줬으면 좋겠네요. "
직접 이름이 언급되니 둘은 하던 행동을 잠시 멈추고서는 일제히 시선을 민규리에게로 돌렸다.
" 열심히 해주십시오. 진짜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 저는 놀려고 학교를 나오는 게 아니라 제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수업 하나하나, 학점 1점, 2점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교양수업에 불과한 이 수업도 저에겐 굉장히 소중하죠. "
" ... "
" 그러니, 교양수업이고 어차피 같은 과도 아니니까 마주칠 일도 없겠다고 생각하며 대놓고 활동에 참석도 안 하시거나 수업 자체에 나오지 않는 행위는 제발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혼자 그러면 상관이 없겠지만 여러 명이 모여서 하는 활동에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지 않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일반 사람들이 말이죠. "
그러니, 제발 똑바로 참여해주십시오. 라고 말을 그녀가 말을 끝마치자 나를 제외한 두 명은 일제히 시선을 괜히 엄한 곳으로 둔 채 머리를 긁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안한 감정을 표현했다.
" 좋습니다. 그러면 시작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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