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D급 헌터 선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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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아침 시간.
원래라면 오늘 아침은 공강이라서 꽤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침대 이불을 둘러메고 늦잠을 즐겨도 됐었다.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운명의 장난인 걸까?
아내가 오늘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한마디 덕분에 난 아침 일찍부터 이불을 박차고 분주하게 아침밥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밥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밥과 국을 만드는 것과 달리 이번에는 정성스럽게 고기까지 구워가며 열심히 주방 안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아무래도 아직 아내에게 참교육을 당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앙금은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며칠간은 더 아내를 정성스럽고 진심으로 모셔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행동은 아예 자제하고 있다.
" 배 존나 고픈데 밥 아직 멀었어? "
나시 하나만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쿠션을 안은 채로 반건조 오징어처럼 늘어져 TV를 보고 있는 아내의 재촉이 들려왔다.
" 아직 멀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또한, 혹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말실수에 대비해서 정말 필요한 말만 제외하고서는 요즘은 입을 열고 있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행동해서 혹시나 벌어질 대형사건을 예방해야 하지 않겠는가?
"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고기 그까짓 거 그냥 대충 휘리릭 구우면 되잖아? "
저도 그러고 싶어요. 여보.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제가 프라이팬 위에 올려서 열심히 굽고 있는 고기가 소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랍니다.
" 소고기였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돼지고기라서 대충 구우면 몸도 안 좋아지고 맛도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보. "
" 에휴. 나 배고프니까 빨리해. "
소고기였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굽고 있는 것은 돼지고기다. 요 앞에 정육점에서 떨이로 싸게 팔길래 후다닥 달려가서 대량으로 사 온 것이라서 양이 좀 매우 많다.
거의 큰 봉투에 가득히 담아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마 소고기를 이 정도 샀다가는 며칠간 아침, 점심, 저녁을 컵라면만 먹으며 살아가야겠지.
뭐, 아무튼 소고기였으면 뜨거워진 프라이팬에 누른 상태로 3초 정도만 새고 곧바로 뒤집어 익히면 되겠지만 이건 돼지고기이므로 조금 시간을 들여가며 꼼꼼히 익혀나가야 했다.
그래야 고기의 맛과 풍미를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고 득실거리는 기생충의 감염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이니까.
" 연기가 꽤 많이 나네. "
아무래도 고기를 굽는 일이니 프라이팬에서 연기가 마구 솟아올랐고 나는 급히 공기 후드를 켜고 주방의 창문을 모조리 열어 급히 환기를 시작했다.
' 이래서 집에서 고기 굽는 걸 싫어하는 건데. '
주방에 달린 공기 후드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연기를 잘 빨아들이지 못하므로 한 번 구워서 먹고 나면 집안 곳곳에 기름이 튀어버려서 물걸레질로 집 안 전체를 모조리 닦아야 했다.
귀찮지.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야.
내가 청소기로 방 청소하는 건 별로 안 귀찮아 하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물걸레질하는 건 귀찮아서 미쳐버리겠더라.
한 번 하고 나면 허리도 엄청 아프고 팔이랑 손목도 빠져버릴 것 같고.
" 아, 맞다. 유진아! "
" 네? "
집게를 들고 열심히 고기를 굽고 난 뒤 물걸레질을 시작할까? 말까? 라는 주제로 고민을 하는 내 생각을 깨뜨리는 그녀의 외침에 나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 너 지금 안 바쁘지? 얼른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내 칼 좀 가져와. "
칼? 아, 아내가 매일 일터에 나갈 때 들고 가는 그거 말하는 건가? 근데 갑자기 TV보다가 칼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 칼이요? 칼은 왜... "
" 어제 일 갔다 와서 보니까 칼날이 많이 상해있어서 한 번 갈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지금 기억이 나버렸네. 어차피 지금 딱히 하는 것도 없으니까 날 갈면서 TV 보고 있으려고. "
" 아... "
" 어차피 고기 다 구우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잖아. 그러니까 당장 안방 가서 옷장 열면 내 칼 있으니까 후딱 뛰어가서 얼른 가져와. 나 여기 소파에서 일어나기 귀찮으니까. "
" 네. 알겠어요. 여보. "
손에 들고 있는 집게를 잠시 내려놓고서 손에 묻어있는 기름을 앞치마에 닦아냈다.
어차피, 고기를 익히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고 구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옷장 안에 놓여있는 칼 하나를 빼 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리도 없었으니 고기를 태워버릴 가능성도 없었다.
총총걸음으로 안방으로 걸어가 아내의 옷을 보관하는 옷장의 문을 열자 케케묵은 담배 냄새가 내 얼굴을 순식간에 덮쳤다.
" 켈록, 켈록. "
저절로 후각을 느끼는 코를 손으로 덮었고 순식간에 안방 전체에 퍼져버리는 담배 냄새에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한데? "
아내가 담배를 피우고 냄새가 잔뜩 베여버린 옷을 빨지 않고 곧바로 옷장에 박아둬서 옷장 전체에 냄새가 퍼진 것 같았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 하나하나 전부 다 들춰보니까 냄새가 제대로 코를 찔러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내가 옛날부터 일할 때 입은 옷은 곧바로 세탁기에 돌릴 테니까 빨래통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역시나 내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 같네.
아이참, 이러면 다른 멀쩡한 옷에도 담배 냄새 다 묻어나서 건강에 안 좋고 주변 사람들이 안 좋게 본다고 수도 없이 말했는데....
" 나중에, 쉴 때 옷장 한 번 들어서 싹 다 청소해야겠네. "
일단 임시방편으로 페브리즈를 살짝씩 뿌려주었다.
이미 깊숙이 옷장 안에 침투한 담배 냄새를 모두 쫓아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방금보다는 확실히 상황이 나아진 게 느껴졌다.
아내가 일터에 안 나가고 집에서 쉴 때 날 잡고 한 번 옷장에 있는 옷들을 싹 들어내서 모조리 빨고 지금은 그냥 페브리즈로 임시방편을 세워두는 수밖에 없다.
나도 학교에 나가야 했고 아내도 조금 있다가 옷을 입고 일을 하러 나가야 했으니까 지금 모조리 세탁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일단 내가 안방에 들어온 목적은 아내가 부탁한 칼을 찾아서 아내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한 손에 들고 있는 페브리즈를 책상 위에 대충 놔두고 옷걸이에 단정히 걸려있는 옷들을 신이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한쪽으로 쫙 밀어버렸다.
그러자 구석에 박혀있는 채로 자태를 드러내는 초라한 검집에 꽂혀있는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 무, 무거워. "
손잡이를 살짝 잡아도 온몸에 퍼지는 엄청난 무게의 압박이 확실히 전해졌다. 아내는 항상 깃털 다루듯이 세 손가락, 어떨 때는 두 손가락으로도 들고 다닐 때가 있어서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었네.
두 손으로 겨우 검집과 손잡이를 잡고서는 옷장에서 질질 끌어 일단 바닥에 살포시 검을 놓았다.
확실히, 과연 이게 어제까지 아내가 일터에 들고 간 무기가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골동품처럼 물건의 상태가 매우 낡아져 있었다.
" 밖은 이렇게나 심한데 안쪽은 더 심할 것 같은데. "
혹시나 하는 궁금증에 손잡이를 잡고 검집에서 검을 살포시 빼보자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이 전부 다 들어맞기 시작했다.
앞서 아내가 말한 것처럼 검의 날은 굉장히 상해 무뎌져 있었고 찐득하게 굳어버린 핏자국과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쇳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 이래서 집에서 뭘 하기 귀찮아하는 아내가 검날을 갈려고 한 거구나. '
소파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시간이 남을 때마다 침대 아니면 소파에 항상 붙어서 TV만 보는 아내인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 상태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나저나 나도 이제 이런 걸 봐도 아무렇지 않아 하네. 예전에는 이런 물건들을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는데 이젠 딱히 별 감흥도 없고 말이야.
그만큼 내가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는 증거겠지.
과거 이 세상에 처음 떨어지고 나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총과 칼 그리고 도끼를 대놓고 어깨에 짊어지고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고 경찰서로 곧바로 뛰어가서 신고하려고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흉기를 들고 다닌다고 얼른 잡아가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경찰들도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봤던 그 눈빛.
경찰들의 경멸이 담긴 그 눈빛, 나는 그것을 난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으니까....
뭐, 그러고 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이 단순한 남녀역전의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굉장히 정신이 멍해졌었다.
나는 이 세상이 단순히 남녀의 역할이 바뀐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고 사실 이곳은 웹 소설에서 단골 소재로 사용되는 현대 판타지 요소가 적용된 그야말로 잡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였다는 것.
즉, 이곳은 남녀역전의 세상이면서도 이 세상엔 괴물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 압도적인 초능력을 가진 헌터라는 게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것.
처음에 이러한 사실을 알자마자 ' 씨발, 뭔 이딴 거지 같은 세상이 다 있어? ' 라며 혼자 욕을 했던 기억도 난다. 아니, 솔직히 남녀역전의 세상에 떨어진 것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에다가 헌터라는 요소가 더해진 세상이라니.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도 엄청 당황스러워할 걸?
뭐, 그래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괴물을 마주치고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사람들이 길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걸 며칠 동안 계속 보니까 저절로 적응되더라고.
애초에 내 아내가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말 그대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괴물들을 처리하는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적응을 빨리 안 할 수가 없지.
무슨 원리로 평범한 사람이 헌터가 되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그건 국가에서도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한 진실이라서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평생을 걸쳐도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초능력, 즉 이능이라는 것은 갑자기 한순간에 발생하고 그러한 능력의 종류와 위력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능력의 종류와 위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흔히들 웹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각 국가는 헌터들의 능력과 위력을 측정하고 시험해 세부적으로 등급을 나누어버린다.
바로 S급 A급 B급 C급 D급 E급 이렇게 5가지 종류로 말이다.
S급은 사실상 전술 핵무기 취급을 받는 국가 최대 병기로 평가받는 등급이다. 혼자서 한 나라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S급 헌터다.
물론, 전 세계에 미국과 러시아 딱 두 나라밖에 존재하지 않아서 전 세계적으로 거의 논외로 평가받는 등급이 바로 S급이다.
그다음은 A급.
S등급은 너무 뜬구름을 잡는 형식이기 때문에 사실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등급이라고 평가받는 등급은 바로 A등급이다.
이미 A등급의 헌터도 일반적인 나라의 전술 병기 취급을 받는 존재이고 실제로도 그 수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분포해 있지 않다. A등급 헌터 몇 명이 모인다면 재래식 무기를 갖춘 나라의 군대를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다음은 B등급.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혼자서 기계화된 육군 1개 사단 정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귀중한 전력으로 평가받는 등급이다.
그리고 5가지로 나눠진 헌터 등급 중에서 가장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등급 구간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S급이나 A급은 국가 비상사태 때나 감당하기 어려운 적들이 등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나서는 일이 없음으로 실질적인 괴물 처리는 거의 B급이 도맡아서 하므로 가장 실전경험이 많은 등급일 수밖에 없고 동시에 가장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등급일 수밖에 없다.
그다음은 C등급.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일반적인 헌터들이 가장 많이 분포해 있는 곳이다.
무난하게 강하면서도 헌터들이 가장 많이 분포해있는 등급이며 또한 실질적으로 각 나라의 헌터 세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요소의 등급이 바로 C등급의 헌터들이다.
무력이 굉장히 낮아 보이지만 그래도 혼자서 기계화된 육군 대대 정도는 너끈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고 헌터 중에서도 가장 숫자가 많이 분포해있는 곳이 바로 C등급이기 때문에 절대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등급이다.
그다음은 D등급.
실전경험이 부족하고 능력의 적응이 끝나지 않은 미숙한 사람들이 분포해있는 즉, 아직 수습단계에 있거나 이능의 위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종류가 적은 사람들이 분포해있는 곳이 바로 D등급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약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능의 능력을 갖춘 존재들이므로 일반인들보다는 강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아직 실전경험이 별로 없거나 혹은 다른 헌터들에 비해 능력의 종류가 적거나 위력이 약하므로 전방에 서서 괴물들을 처리하는 임무보다는 후방 경계, 정찰, 시체 처리 등 잡무를 맡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인 등급이다.
마지막으로 E등급인데, 이것은 사실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등급이다.
애초에 이제 막 능력이 발현돼서 검사를 마치고 나오면 E등급의 헌터 자격이 주어지므로 사실상 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등급이다.
이러한 헌터들의 등급은 술기운에 아저씨들이 술자리에서 야매로 정한 것이 아니고 세계 헌터 기구라는 범세계적 기구 협회에서 지정한 전 세계 통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식 그 자체.
하지만 아내는 항상 집에서 술을 먹고 나서 취하면 이러한 헌터들의 등급 공식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고는 한다.
' 지들이 뭐라고 함부로 남의 등급을 평가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딸꾹, 그 세계 헌터 기구라는 곳은 이 나 같은 사람의 내면 안에 있는 진정한 힘도 못 알아보는 병신들 집합소라고. 공식? 딸꾹, 흑, 지랄하고 있네. '
나는 당연히 대중에 공개된 정보를 제외하고는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내가 그런 말을 할 때는 항상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 경청해주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전부 통합하고 있는 이러한 헌터 등급의 공식에 불만을 표하는 우리 아내의 등급은 도대체 어디냐고?
D등급.
우리 아내는 D등급의 헌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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